시34:1-3 여호와와 함께 춤추어 봤는가?

조회 수 519 추천 수 9 2012.02.01 01: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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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와 함께 춤추어 봤는가?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1-3)


다윗은 항상 여호와를 송축하는데 그 찬송을 듣는 곤고한 자가 기뻐한다고 합니다. 나아가 그는 그들더러 함께 찬양하자고 초대합니다. 그럼 그의 노래 부르는 실력이 아주 뛰어나 듣는 이가 저절로 흥겨워져서 찬양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뜻입니까?

모든 시편은, 특별히 다윗의 시편은 저작할 당시 상황에 비추어 읽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를 놓쳐버리기 쉽습니다.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으로 좋은 말씀을 나열한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배경을 모르니까 그 시편을 자신의 신앙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지도 못하고 단지 관념적 이해에 머뭅니다.  

본 시편은 그 표제가 말하는 대로 그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적에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아마도 아둘람 굴에서 지은 것으로 추측합니다.(삼상21:10-22:2 참조) 오죽하면 적국인 가드로 피신해보려 했을 정도니 다윗의 당시 신세가 정말로 곤고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경내에 남아 있으면 사울의 추적을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과 이별한 후에 따르는 이 하나 없이 홀로 피신했습니다. 급히 도망치느라 수중에 창이나 칼 하나도 챙기지 못했습니다.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은 사흘이나 굶은 그가 안쓰러워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주었습니다. “그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삼상21:10)에게 간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스의 신하들이 사울 왕보다 더 강한 대적인데 맞아들이면 안 된다고 간했습니다. 다윗은 다시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21:12)하게 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나 외국이나 몸 붙일 곳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기스에 의해 곧바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미친 체하여 그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경을 벗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본 시편의 표현이 그 사건과 별로 연관이 없는 것 아닙니까? 순전히 자신의 임기응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구했고 응답하여 구원해주신 구체적인 결과가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항상 송축”한다는 표현대로 지금까지의 모든 은혜를 뭉뚱그려 찬송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선 히브리인들은 하나님만이 모든 지혜의 원천이자 공급처라고 여겼습니다. 어떤 지혜라도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것입니다.(잠1:7) 비록 그가 자신의 재치로 위기를 극복했어도 그조차 하나님이 주셨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저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원칙 아래 스스로 해결한 일마저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는 종교적 수사가 아닙니다. 어떤 일이든 구체적으로 전개되어지는 세밀한 과정 하나하나가 다 그분의 신비하고 은혜로운 간섭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한 해석은 다윗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먼저 기도부터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부하들의 열렬한 충고를 무시하고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줄 때도 마음속으로 잠시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아말렉이 임시 피난처인 시글락을 침공해 이스라엘의 부녀자를 잡아가는 바람에 부하들이 돌로 그를 치려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고 말합니다. 그 급한 와중에도 잠시 기도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아기스 왕 앞에서도 다윗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신하들의 설왕설래가 있는 동안에 틀림없이 속으로 잠깐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God help me!), 세 마디라도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미친척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뚜렷하게 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령의 세미한 음성으로 들었을지 모릅니다.

미친 척하는 것이 조금 영리한 자라면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지혜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성경이 얼마나 정미한지 모릅니다. 자기 호신용의 무기도 챙기지 못했던 다윗은 놉의 제사장에게 혹시 병기가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마침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을 보자기에 싸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삼상21:9)라고 청했습니다.

말하자면 그 칼을 갖게 된 순간 차라리 가드 왕에게 피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인간적 생각이 그에게 든 것입니다. 골리앗은 바로 가드 사람이었습니다.(삼상17:23) 성경에 아무 설명이 없지만 갑자기 다윗이 적국 가드로 피신하려 든 것과, 또 아기스 왕이 자기들 원수인 그를 곧장 죽이지 않고 받아들일까 잠시 주저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으로선 비록 자기가 그를 죽였지만 가드 영웅의 유품을 챙겨서 선물로 바치고, 또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라고 말하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너무 간단하게 계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그 칼을 본 가드의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골리앗보다 더 위험한 자를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간했습니다.  

스스로 짜낸 다윗의 지혜는 너무나 얕고도 어리석었습니다. 당시로선 가장 영민했던 그지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겉모양새는 이상하고 마음에 안 들지만 미친 척하는 수 말고는 없다고 응답했던 것입니다.

성경이 정미한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사무엘상의 두 구절(21:10 & 12) 다 다윗이 피신한 이유를 “두려워하여”라고 설명했습니다. 본 시편 4절에서 “내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셨다고 합니다. 내 모든 환난, 질병, 위경 등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셨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곧바로 죽을 수밖에 없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 잠시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에 응답하여 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시글락 사건 때에는 적들이 얼마 못 갔기에 곧바로 추격하면 부녀자들을 충분히 찾아올 수 있다고 오히려 부하들을 독려하라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지금 아기스 왕 앞에선 미친척하는 것이 유일한 수라는 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너무 두려워 앞뒤 분간도 못하고 그저 벌벌 떨다가 죽었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곧바로 죽을 지경에 처해도 정신도 차려야 하지만 하나님께 찰나라도 속으로 “Help me!"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더 중요하게는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럴 수 있으려면 평소에 쉬지 말고 기도하는 습관이 들여져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에 장애물이 제거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이유가 그가 의롭고 선한데다 그분을 열심히 경배했다는 뜻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그것도 순간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언제 어디서나 기도와 말씀에 전무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비록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그 일생은 곤고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곤고함을 오직 기도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目前)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라는 실제적 체험적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수가 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의 눈앞에 있습니다. 또 상(賞 reward)이 아니라 그분과 교제 혹은 경배하는 상(床-table)입니다. 그리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랐습니다. 실제 기름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머리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본 사건에 적용하면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척하라는 지혜를 여호와께 받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가 항상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분을 자랑하는 내용은 실제로 그가 체험한 것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영혼으로 여호와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거짓과 과장이 없는 순전한 진심으로 그분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또 현실적 축복을 넘어서 그분과 교제함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영혼의 평강과 기쁨과 자유를 얻게 된 은혜를 자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곤고한 자들에게 얼마든지 자신 있게 함께 찬양하자고 초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목전에서도 그분께 도움을 청해 살았다는 놀라운 체험이 바탕이 된 것입니다. 단순히 정신심리학적 충고, 종교적 수사, 음악을 통한 감정적 고양을 맛보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광대하신 하나님 그분을 자기처럼 세밀하게 체험해보라는 것입니다.

그의 표현이 놀랍지 않습니까? 자기로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게” 만드신 그분을 “광대하다”고 합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어도 사탄이 심어준 생각이라고 금방 거부해버리거나,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런 치사한 응답을 하실 리가 없다고 의심할 텐데 말입니다. 항상 그분을 송축하며 교제하는 다윗이 아니고는 쉽게 따를 수 없는 하나님만의 지혜이지 않습니까? 진짜로 위급한 환난에서 오직 여호와의 도움으로 벗어난 자가 드리는 찬송이었기에 동일하게 곤고한 자들이 다윗의 찬송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향해 진심(眞心), 전심(全心), 일심(一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합심(合心)이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한분에게만 완전히 미친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장수가 적국의 왕과 신하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미친 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 사실은 그는 하나님에게 완전히 미쳐서 세상 사람들은 아예 짐작도 못하는 그분과의 신기하고도 아름다운 교제 속에서 그분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둘람 굴에서 곤고한 자가 듣고 기뻐할 수 있는 찬양을 저작한 다윗에게 어떤 결과가 생겼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가드 왕 아기스)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22:1,2)

우선 가족이 전부 그에게 모였습니다. 거기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순수한 찬양이 그와는 생면부지임에도 이스라엘 전국에서 곤고한 자들을 모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혈혈단신의 피난길이 순식간에 사백 명의 군대로 바뀌었습니다. 본 시편의 17-19절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다른 말로 아둘람 굴에선 너무나 은혜로운 찬양집회가 매일 열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찬양이 예배 분위기 고취용이어선 안 됩니다. 찬양은 정말로 찬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실제로 받은 은혜가 너무나 신기하고 세밀하고 풍성하고 아름답고 엄청나서 그 받은 그대로 하나의 가감 없이 증거하고 자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위의 곤고한 자들더러 위로와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함께 누릴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그 광대하심의 지극히 작은 일부라도 실제로 체험해본 자가 그분께 감탄하고 감사하는 고백이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절제할 수 없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것이 참 찬양입니다. 그분과 일상적이고 끊임없는 교통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랬던 다윗이 그분께 온전히 미쳐서 왕이라는 체면과 위신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언약궤 앞에서 웃옷을 벗고 춤추듯이 말입니다. 또 여호와 함께 하기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원수들 앞에서 얼마든지 미친 척할 수 있는 그런 찬양 말입니다.

1/18/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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