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31:3-5 진짜로 본받을 만한 기도(2)

조회 수 301 추천 수 15 2011.12.20 05:5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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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본받을 만한 기도(2)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시31:3-5)


성경에서 다윗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자도 드물 것입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겼을 때에 잠시 이스라엘의 환호를 받은 일을 빼면 비록 왕이 되었어도 고난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어쩌다 평안한 짬이 났을 때마저 충직한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 그 부하는 죽이는 큰 죄를 저질렀고 그 사이에 난 아들은 죽어버려 결코 그 마음이 편할 수만 없었습니다.

알다시피 그 모든 고통을 자신이 지은 시편에서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 시편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컨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내며”(9b,10a절)라고 합니다. 슬픔과 탄식이 끊어질 날이 없었기에 영육 간에 다 쇠퇴해졌고 심지어 눈마저 침침해졌다는 것입니다. 또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11b)라고 했습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상했으면 친구들이 놀라고 길에서 마주치는 자들마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몰골인지라 슬슬 피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고통이 이렇게까지 심한 경우는 인생에 몇 번 안 되지 않습니까? 반면에 다윗은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매년 탄식으로 시작해서 탄식으로 마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간구하였고 그분이 주시는 구원으로 그 모든 슬픔과 탄식을 극복해내었습니다. 주님만이 그의 반석과 산성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슬픔과 탄식을 불러오는 고난이 닥치면 주님만 의지합니다. 주를 뜨겁게 믿는 믿음과 새벽마다 간절히 구하는 기도의 세기는 어쩌면 우리가 더 강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우리가 한없이 작아짐을 느낍니다. 그것도 우리는 그처럼 철면피한 간음과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그 원인이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를 만난 적도 없고 그의 인물됨을 구체적으로 배운 바도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 기록된 내용만으로 그를 판단합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왕으로서 세운 그의 업적과 비교해 우리가 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 다르며 그분도 이 땅에서 행한 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지은 시편을 읽을 때에 깊이 묵상하지 않아도 그의 고백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여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심령이 정말로 순수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이해타산, 간사, 욕심, 죄악의 티끌이 하나도 섞여있지 않음을 명백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성령을 통해 살아 움직이기에 다윗의 깨끗한 심령이 수천 년의 장벽을 뛰어넘어 우리 심령에 그대로 울린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에겐 그만큼 자신의 속을 전부 다 끄집어내어서 주님 앞에 토해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면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까지 주님의 인자만 바라며 씨름해본 적이 없거나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아무리 풍부해도, 반대로 아무리 궁급해도 항상 여호와 쪽으로 자기 모든 것을 향하게 만드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느꼈던 환난의 종류가 우리와 달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워서 주님께 구원을 바라는 환난은 거의 전부 현실적 어려움입니다. 질병, 경제적 궁핍, 출세 내지 성공하는 문제, 권력과 명예에서 뒤처지는 것 등등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지금 어떤 괴로움을 주께 호소하고 있습니까? 전부 사람들 사이에 겪는 괴로움입니다.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우리의 고통도 육신적 질병 빼고는 실제 삶 즉, 인간관계에서 겪는 것이기에 다윗과 다를 바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6절)라고 말했습니다. 또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18절)라고 간구했습니다. 세상에 만연하는 죄악으로 인해 겪는 괴로움을 호소한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단순히 사회생활에서 일상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나의 영을 주께 부탁하나이다.”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자기의 피폐해진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도는 진리였습니다. “내 곤고한 삶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능력의 하나님! 어서 빨리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우리의 모든 기도에 녹음기 틀듯이 되풀이하여 등장하는 내용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는 “나를 구속”해달라고 했고, 우리는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차이를 분별하겠습니까?  

본 시편 전부는 볼 것도 없고 상기에 인용한 본문만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반석과 산성이시니 “주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나를 인도하고 지도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오직 여호와의 이름에 즉, 당신의 성품과 절대적 주권은 물론 이 땅을 다스리는 완벽한 진리에 합당하게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과 말과 행동이 당신의 이름에 합당한지부터 살펴봐 달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당신의 이름에 합당하지 않으면 구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구원되지 않아도 당신의 이름에는 전혀 손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다윗은 자기가 여호와의 이름에 혹시 누를 끼쳤으면 구원이 아니라 벌도 달게 받겠다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미처 모르는 잘못이 있다면 자기를 지도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런 기도를 평생에 몇 번 할 수 있을까요?)

불신자도 부모의 이름에 똥칠을 하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일마저 멀리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의 이름이 세상에서 손상 받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은 그런 바탕에서 자신의 고난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해결을 간구한 것입니다. 십계명으로 자신의 전부를 먼저 점검한 후에 여호와 앞에 기도하러 나갔던 것입니다. 또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중에 자신의 존재와 삶을 주님의 계명에 비추어 되돌아 본 것입니다.

자기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한다는 것은 단순히 영적인 평안을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영이 주의 손에 맡겨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본 시편을 지을 때에 다윗이 죽음을 의식하거나 각오했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일차적으로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영혼에 주님의 생명을 부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혹은 그 이전에 자신의 삶과 죽음이 오직 주께 달려있고 나아가 만약 자신의 죄악을 징계하여 주님이 죽음을 내리더라도 자신은 언제든 달게 받겠다는 믿음의 바탕이 항상 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는 말씀과 함께 운명하셨습니다. 이제 육체적으로 완전히 죽음으로써 그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육신 하시어 이 땅에서 행해야만 했던 사역을 아버지 뜻대로 완수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내 영을 주님의 손에 부탁한다는 말도 자신의 평생이 오직 주님의 거룩하신 손 안에 있었다는 기본적인 뜻 외에 평소 여호와의 뜻대로 살면서 그분을 증거하는 일에 충성했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우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최대한 끌어내린다 해도 만약 주를 증거하는 일에 등한히 했거나 방해를 하고 있었다면 내 영에 다시 주님의 영으로 채워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니까 괜스레 주눅만 듭니까? 우리 영의 상태가 너무나 가난해서 애통해집니까? 물론 저부터도 다윗에 비하면 한 없이 작아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심령이 가난해서 애통해지는 것이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첫 걸음이자 지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나는 길은 주님의 복음 안에 온전히 들어가는 길 밖에 없음을 다시 확인하고 그 십자가 앞에 엎드려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도덕적, 종교적, 영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라는 촉구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성화의 궁극적 목표이긴 합니다. 그러나 정작 다윗의 기도에서 배워야 할 내용은 아주 쉽고도 간단합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충만히 채워져 있지 않으면 죄악으로 흐르게 되고 심지어 현실에서의 평강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가장 먼저 간구하여 기도할 내용이 바로 다윗처럼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해 주시옵소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울부짖는 대로 “우리 문제를 주의 크신 능력으로 해결 주옵소서”가 응답되었다고 해서, 아니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과 명예와 부귀를 누린다고 해도 우리의 영에 그분의 영이 부족하면 결코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무엇을 주의 손에 우선적으로 부탁드리고 있습니까? 당신 주변의 문제입니까? 당신 자신,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영입니까?

11/17/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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