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만난 사람 중 참 안타까운 형편의 사람들이 있다. 남편이 아파서 일을 하지 못하고 여자 혼자 벌어 살아가려니 늘 쪼달리는 생활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생인 두 아들이 있는데 몇일 전엔 울상이 되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작은 아이가 감기가 심한데 병원에 가질 못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은 모든 국민들이 혜택을 누리도록 어찌나 잘 되어있는지 한국에 돌아와 제일로 감사한 것이 이 의료보험제도였다. 그리고 병원 진료비도 싸서 미국에서 약 사먹는 돈 보다도 적게 든다. 그런데 아파도 병원에 가질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있다.
중국교포인 젊은 새댁이 있다. 외국인인 그들은 의료보험 혜택을 받으려면 우리보다 훨씬 많은 보혐료를 지불해야만 한다. 그 돈이 버거워 보험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두 살된 아들이 있는데 한번 아파 병원엘 가면 몇가지 검사하는데만 월급의 반이상이 소요된다며 울상이다.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보험료 보다는 싸다고 한다.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슴 절절하게 아파온다. 그림으로 그리자면 희뿌연 잿빛 하늘에 황토빛 짙은 척박한 땅 같이 보여진다. 세상 살이는 그렇게 아픔을 동반한 잿빛하늘과 황토빛 땅인 것 같다.
얼마 전 다녀가신 선교사님이 생각난다. 선교 보고를 하며 한 영상을 띄워 주셨다. 잿빛하늘에 황토빛 땅, 금방이라도 먹장구름 속에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듯한 울적한 풍경, 그런데 그 잿빛하늘과 황토빛 땅 사이에 해바라기 한 그루가 오롯하게 서 있었다. 선교지의 사택에서 바깥을 바라보다가 찍은 사진이라며 설명을 곁들이셨다.
그 날 보따리를 싸고 선교지를 떠나오려고 맘의 준비를 하다가 창문 너머 우연히 머문 시선에 들어온 풍경 속의 해바라기가 다시 사명을 일깨워 주었다고 하셨다. 잿빛하늘과 황토빛 짙은 흙 가운데 한 송이 꽃이 피어 있기에 머무르고픈 풍경이라는 싯귀가 떠올라서 그만 보따리를 다시 풀었다고 하셨다.
짐을 꾸려 선교지를 떠나려 했던 이야기를 해 주셨다. 한 여자 성도가 죽었다. 장례식장에서 그녀의 친척인 다른 성도가 사망연유를 설명해 주었다. 무엇에든지 중독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환경, 형편인 그 곳의 사람들, 술로서 달래고 마약으로 달래야하는데 그런 것을 구할 돈이 없으니 그녀는 청소하는 락스도 마시고 향수도 훔쳐 먹곤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멍한 상태로만 살아낼 수 있는 현실이기에... 그곳엔 술을 담궈 파는 곳이 있다. 그 술 속엔 유리를 곱게 가루로 만들어서 함께 넣는다. 그것을 마시면 목구멍에 유리 가루 넘어가는 느낌이 있는데 그 느낌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엇엔가 중독되어야만 사는 사람들...
그녀는 선교사님께 다쳐서 피가 난다며 소독약이 필요하단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녀의 중독성을 모르던 선교사님은 그럴 때 마다 소독약을 사다가 주곤 했다. 그런데 그 소독약도 그렇게 먹어버렸던 것이다.
선교사님은 자신이 그녀가 죽는데 도왔다라는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보따리를 싸곤 떠나려했다. 그 때 발견한 그 풍경에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깨닫고 다시 사역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머물고 싶은 풍경, 그런 것 같다. 잿빛하늘에 황토빛의 척박한 땅에서 우리 모두는 살아가고 있지만 그 곳에 꽃 한송이로 오신 우리 예수님이 계시기에 머물고 싶은 풍경으로 바뀌는 것 같다. 그 꽃 한송이를 닮아 나도 이 땅 살아가는 동안 해바라기 한 송이로 서 있고 싶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한송이로.. 그래서 그 곳도 그 누군가가 머무르고 싶은 풍경으로 변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가난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길거리에 방치되다시피 자란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 가르쳐 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가셨는데, 글을 읽으면서 그 선교사님의 말씀이 오버랩되며 정말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해바라기처럼 하늘에 소망을 두고 뿌리내릴 수 있는, 그래서 소망이 있는 삶을 살게 해야겠다 느꼈습니다.
척박한 땅에 해바라기 한 송이로 남아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될 수 있는 성도가 되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