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겨워 말씀 앞에 구푸려 울 때가 참 많다. 그 감정은 어느사이 말씀이 나의 상태가 되어있다고 착각을 하게 만든다. 이론이 사실은 그저 이론에 머물러 있을 뿐인데 실체가 되었다고 착각하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닌 것 같다.
주일 예배 말씀이 누가복음 5장 1 절에서 11절의 말씀이였다. 베드로의 모습이 보인다. 밤이맞도록 수고하였으나 빈배일 뿐, 허탈한 심경으로 그물을 씻고 있다. 많은 사람은 물가로 몰려온다.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심한 듯 그저 그물만 씻고 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신다.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으로 떠나는 베드로의 모습은 많이 잡아오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는 듯 하다. 무심한 듯, 허탈한 듯 그저 떠나 보았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고기떼를 보았을 때 횡재라, 기쁨이라. 감격이라 떠들어 제끼지 않고 그저 예수님 발아래 구푸려 자기의 죄인됨을 고백한다. 죄인이니 떠나주시라고.. 그 고백은 진정 떠나시지 말라고 애써 붙잡고 싶은 감정을 속으로 삼키며 말씀드리는 울부짖음이다. 죄인임을 너무도 잘 알기에 떠나시라고.. 그런데 가시지 마시고 삶의 주인이 되어주시라고.. 이런 베드로의 심경이 나의 맘 속을 헤집고 들어와서 어프러 울고 말았다.
어프러져 울고 있는 나는 또 감정에 겨워 두 배 가득 담긴 고기떼엔 관심도 없고 두려워 말라시며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정말 예수님 한 분이면 된다고, 세상의 그 어떤것도 우리 예수님과 바꿀 수 없다며 엉엉거리고 울고만다. 하지만 가만히 나를 들여다 보면 이건 이론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이론을 실체가 되었다고 착각하도록 감정에 겨운 울음으로 자주 속는다.
조금 숨을 쉴만하다고, 아이들의 소원이였던 공부를 마져할 수 있는 상황이 생겼다고 이제 좀 더 욕심이 생기는 것은, 이 고단한 삶에서 좀 놓임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육신의 고달픔, 시간에 쫒겨가며 바삐 살아야하는 현실을 이제 벗어나고 싶은 욕심이 살금살금 생기고 있다. 그래서 나름 노후설계를 손주들 키우며 동네 아낙들과 어울리며 손주 자랑 그리고 자식자랑하며 그럭저럭 살고 있는 모습으로 설계를 하고 있다. 예수님은 오간데 없이...
이제 나의 감정에 겨운 생각들로 인해 착각을 하며 이론과 실체 사이를 방황하지 않으면 좋겠다. 아니 착각이라 깨닫는 그 간격이 좀 좁아져도 참 좋겠다. 늘 이렇게 한참을 지난후에야 알게되는 이 미련스럼이 너무 싫다. 유월절을 맞이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안 구석구석 누룩을 발견하여 없앤던 것 처럼 내 안에 이상한 누룩,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착각하면서 나를 사랑하고 있는 누룩, 이웃을 섬기노라 착각하며 내가 섬김받기를 원하는 이런 이상한 누룩들을 샅샅이 뒤져서 발견하여 예수님 발 아래 내려 놓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려 본다.
제게도 어쩌면 쓸모없는 누룩들이 이리도 많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