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5:2~5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대부분의 환자와는 달리 이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환자들과 달리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주여 나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 나를 물에 밀어 넣어 주십시오’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비뚫어진 태도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으시고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무리들이 예수님의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직접 언급하신다든지 하지 않으시고- 이 환자가 예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주여 낫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이 없는 가운데 그를 고쳐 주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낫고 난 이후에도 예수님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그가 그토록 갈망하였던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 한마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리를 들고 가다가 유대인들의 위협을 느끼고 변명을 합니다.
그토록 오랜 자기의 병을 고쳐준 자를 조금만 생각했다면 자기 잘못으로 인정하고 자신이 대신 책임질 수 없었을까요?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 환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이 대목은 고민해 볼 대목입니다. 이 신중하지 못한 자는 예수님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자기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시킨 사람은 예수라고 떠 벌였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더욱 박해하게 되었고 또한 예수님을 죽일 모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이 병자를 고쳐주었고 거듭 이 병자에게 나타남으로써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습니다.
이 환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두 번째 이 환자에게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환자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는커녕 자신의 조그마한 위기를 모면하려고 유대인에게 가서 안식일에 자기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시킨 사람은 예수라고 떠 벌였습니다.(심하게 보면 고자질 했습니다.)
그들의 논쟁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환자를 고쳐주셨는가가 아니라 자리를 들고 가라고 안식일을 범하게 시킨 범죄자가 누구인가가 관심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이나 자신을 위해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돌이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신 해 버린 이 환자는 어쩌면 성경에 기록된 병자 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환자일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이 환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은 과연 이 환자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몰랐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환자에게 자신을 영접할 기회를 다시 주시기까지 끝까지 이 환자(저)를 사랑하신 예수님 사랑합니다.
P.S : 사실 고침을 받은 10문둥병자 중 오직 1명만 예수님께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의 표시를 하는 등 예수님의 은혜와 이적을 체험한 사람 중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과 예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 같으면 실망하고 상처 입어서 다시는 병든 사람 고쳐 주기 싫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개념치 않으시고 우리 인생의 질고를 불쌍히 여기시고 여전히 은혜와 치료를 베푸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당신 목숨 아랑곳 않고 치료하여 주시고 줄곳 사랑하여주시는 주님을 제 체면, 제 자존심, 제 유익....을 위해선 딱 외면해 버리기 일수인 바로 저 같아요. 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여 주시고,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까지 품으시며 중보하시는 우리 예수님. 우리 예수님만을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