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목사님!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교회/사람마다 말하는 것이 달라 궁금하여 성경문답에서 목사님께서 올린 글을 읽었습니다.이 글을 읽으실 지 모르겠지만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부분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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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우리는 율법을 절대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이웃을 내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8절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100퍼센트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죠.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교만한 마음을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사가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자 네 말대로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에게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실 때 이미 예수님은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전제해 놓으신 것입니다.
저는 강도만난 자가 죄인인 우리를,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비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고, 돈을 내주었다 -> 이 모든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강도만난자는 살기 위하여 자신이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사마리아인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살려주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를 따라 사마리아인을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라고 한다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기에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구원에 대해 너희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얻는 구원, 행위구원이 아니라는 것이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오직 예수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내가 물에 빠졌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튜브를 던져주었고 내가 스스로 빠져나왔다면 그것은 살기 위해 도움을 얻은 것뿐이지만, 내가 물에 빠졌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본인의 목숨을 걸고 수영을 해서 나를 육지로 데려갔다면, 나는 살기위해 스스로 한 일이 없으나 은혜를 입어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기 위해 살짝 도움을 주신 것이 아니고(그렇다면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해야 합니다) 죄사함을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착하게 선한 행위를 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은 십자가 구원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영생과 구원이라는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강도만난자가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통해 구원을 얻었는 것과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마음으로 믿는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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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해석을 읽어보면서 참 마음에 감사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부분을 다른 시각에서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간단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을 하고 마음에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때로는 어렵기도 합니다. 머릿속으로 혼자서 생각하는 부분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아 남겨봅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바로 답변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주신부분에 제 의견과 조금 다르게 해석한 부분이 있어서 댓글드립니다.
그냥 지나친 사람들은(모든 유대인들) 사마리아인(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선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뜻한다면 주님은 강도를 포함한 유대인들의 구원을 외면했다는 조금 무리한 해석이 되어버립니다. 억울하게 당한 자, 비유 자체에선 아무 죄가 없는 자만 구원하시는 예수님으로 축소된다는 뜻입니다.
-> 강도만난 자를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지나치지 않고 온전한 구원의 손길로 그에게 생명을 주셨기에 사마리아 인이 예수님을 뜻하고 강도를 포함한 레위인, 제사장, 강도만난 자 등 모든 인물을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죄없는 사람만 구원한다는 측면에서 글을 적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두 죄인이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 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은 율법을 지키는 방법으로 스스로를 혹은 같은 인류를 구원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강도만난 자를 지나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볼 수있고 지나치지 않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사마리아인 같이 오직 예수님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뜻으로 성경을 읽으며 마음에 남았고 글을 남겼습니다.
저 또한 꼬투리를 잡자는 것은 아니고, 제 생각을 전달하는데 있어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 정정해드리려고 합니다. 이 홈페이지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글을 읽으면서 다른 측면에서 (객관적인 시각) 바라 볼 수 있는 시간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자유게시판을 통해 성경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부분을 공유하고, 배워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칼렛님이 말씀하신 아래 의견에 제가 오해했거나 다른 뜻을 갖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당연히 전적으로 동의하며 올바른 진리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에 강도당한 자를 구원 받은 우리에게 적용을 해도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부분에 오해가 없으시기 바라며 혹시라도 제 뜻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해 마음에 조금이라도 불편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죄없는 사람만 구원한다는 측면에서 글을 적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두 죄인이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 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은 율법을 지키는 방법으로 스스로를 혹은 같은 인류를 구원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강도만난 자를 지나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볼 수있고 지나치지 않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사마리아인 같이 오직 예수님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뜻으로 성경을 읽으며 마음에 남았고 글을 남겼습니다."
제가 이전 글이나 상기 댓글에서 말씀드리려 했던 초점은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뜻을 그 본문은 물론 앞뒤 문맥에서 비유해석법에 합당하게 먼저 찾아낸 후에 다른 영적 진리와도 연결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든 귀하신 의견을 나눠주시고 말씀 안에서 아름다운 교제와 동역이 아름답게 이어지길 소원합니다. 다시 한 번 환영하며 감사드립니다. 샬롬!
스칼렛님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회원가입하자 바로 귀하신 의견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제 해석의 초점을 다시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답변도 제가 항상 그렇게 해왔듯이 성경 본문이 문맥 안에서 말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살펴본 것입니다. 지금껏 교회가 가르쳐 온 해석인 단어나 문구 하나하나에 영적인 진리와 의미를 부여하는 알레고리칼(우의적)한 방식은, 그렇게 해야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따르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 글에서 여러 번 설명하고 강조한 대로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법(관련 책들이 나와 있음)에 관해 배워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에서 아무 죄 없이 피해를 당한 강도 맞은 사람보다는 아무래도 그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레위인, 제사장, 그리고 질문한 율법사가 더 확실히 우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요? 문자적으로 목회자 같은 사역자의 뜻이긴 해도 마침 질문한 자가 율법사이기에 주님은 의도적으로 레위인과 제사장에 비추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맥 전체적으로는 첫째는 유대인들 모두가 갖고 있는 영생을 얻는 방안과, 둘째는 그에 부차적으로 따르는 이웃의 범위와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정확하게 가르치려는 뜻이니까 말입니다.
비유 자체에서 강도 당한 사람은 아무런 범죄함이 없는 즉, 도덕적 영적으로는 단순히 중립적인 상태입니다. 그냥 지나친 사람들은(모든 유대인들) 사마리아인(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선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뜻한다면 주님은 강도를 포함한 유대인들의 구원을 외면했다는 조금 무리한 해석이 되어버립니다. 억울하게 당한 자, 비유 자체에선 아무 죄가 없는 자만 구원하시는 예수님으로 축소된다는 뜻입니다. 이웃 사랑을 온전히 못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믿어야 한다는 관점에서도 강도 당한 자보다는 레위인과 제사장 등으로 대변되는 유대인들이 우리와 더 흡사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온전한 이웃 사랑을 할 수 없으니까 우리 죄값을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 은혜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율법사가 물었고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려는 영생을 얻는 방안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본문 자체의 뜻을 먼저 찾은 후에 사마리아인과 강도당한 자를(반쪽의 관계) 예수님과 우리라고 적용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스칼렛님의 의견에 꼬투리를 잡자는 뜻이 아니라 제가 수없이 강조해온 대로 본문 자체의 뜻을 먼저 찾으신 후에 적용해야 한다는 뜻일 뿐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