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에 하나님 음성을 듣고 행해야 하나요?

조회 수 7537 추천 수 8 2013.08.24 01:19:52
(질문1/3) 매사에 하나님 음성을 듣고 행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뜻과 신자의 자유의지)


[질문]


목사님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일상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동해야 하나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기도 하시지만, 또 한편으론 자유의지를 주셨잖아요. 하지만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또한 어디까지 인가 궁금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입니다. 한 청년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학점이 좋아서 여러 직장에서 오퍼가 왔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아직 어느 직장으로 가야할 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2년이나 넘게 아무 직장을 구하지 않고 백수로 살면서, 지금껏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들었다며 기도만하고 아무 것도 안하는 경우 입니다.

또 다른 경우입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청년이 사업에 은사가 있어서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고, 또 시작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목회자의 길을 가야된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목회자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고, 또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기쁜 마음이 없고 목회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삽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할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태풍으로 홍수가 나서 지붕에 피신한 사람이 하나님께 자기를 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 이웃사람이 고무보트를 타고 지나가며 어서 빨리 자기와 함께 피난 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겠노라고 거절했습니다. 다른 이웃들이 두 번이나 보트를 타고 지나가며 어서 자기 배를 타라고 권했으나 같은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결국 홍수에 떠내려가 죽었습니다. 천국에  간 그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구해주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불평하자, 하나님은 내가 세 번이나 너를 구원하러 이웃을 보냈지 않았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실화가 아니라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예화입니다. 하나님은 일상적인 모습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직접 환상으로 보이거나 육성으로 들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예화이긴 해도 이웃의 배를 보내 구하려 했다는 것은 일상적 모습에서 순전히 신자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판단 결정 행동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하나님이시라.

이 주제에 대해 정확하고도 구체적인 답을 해주는 성경의 예가 있는데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가 꾼 꿈을 두 번이나 자랑삼아 이야기해서 미움을 샀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애굽에 노예로 팔리어 갔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등 우여곡절을 겪지만 마지막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기 가문을 기근에서 구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요셉의 모든 행동은 자유의지에 의한 자기만의 결정이었습니다. 그가 기도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하지 않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그의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이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따랐던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은 일상적인 인간사의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그 또한 환경과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스스로 최선의 결정을 하며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형들과의 지난 모든 잘못이 선하게 마무리 되고 난 후에야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 하나님 뜻을 사건이 마무리 되고서야 온전히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고백한 그대로 요셉의 일생을 자세히 살피면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스스로 총리가 될 큰 비전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의 #3 “요셉은 꿈꾸는 자가 아니었다.”의 글을 참조 바람.) 어렸을 때의 꿈 두 번도 하나님이 꾸게 한 것입니다. 그가 청소년 때에 타국에 노예로 팔려가는 것은 물론 나중에 그 나라의 총리까지 될 것은 정말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그 대비책까지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안 일에 해당은 됩니다. 그러나 그 지혜도 분명 하나님이 심어준 것입니다. 그가 어렸을 때에 하나님이 밤에 꿈을 꾸게 해주었던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해몽과 기근 해결의 지혜만 받은 것이지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리라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에게 해몽하고 대책을 알려줄 때에 어떻게 말했습니까?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시고.”(창41:33) 여전히 자신이 총리가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바로가 간단히 수고했다고 포상하는 것으로 그쳤을 수 있으며, 심지어 그 해몽을 믿지 못할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가 총리가 된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간섭과 통치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요셉이 전혀 또 미리 알지 못하는 와중에도 한 치 어김없이 그대로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각각의 사건에서 나름대로 그가 최선의 결정을 한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그 둘 사이에 전혀 상충도 모순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인간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각각 따로 행한 것 같지만 그 둘은 결국 하나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톱니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톱니 둘이 정확히 맞물려서 돌아갔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일은?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도 하지 않았거나,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한 적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빠트려졌을 때만 해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히 매달렸겠습니까? 하나님도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형 유다로 하여금 그를 죽이지 말고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자는 제안을 하게끔 하신 것입니다(창37:26,27).

이때도 그가 구덩이에서 살아나와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갈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미디안 상고들이 마침 바로 그 때에, 실은 유다가 그런 제안을 하기 전에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었지 않습니까?(25절). 그렇지만 형들은 물론 요셉도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했다기보다 당시로선 자기들 나름의 결정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 사건 이후로 요셉은 온전히 기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모르고 우상 숭배하는 이방 땅에 노예로 팔려왔는데, 언어와 문화와 관습과 제도 등 모든 것이 서툴기만 한 곳에서 그가 의지할 데라고는 오직 여호와뿐이었을 것 아닙니까? 구덩이에서 기도했더니 완전한 절망 아니, 죽음 직전에 구원 받은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매사에 쉬지 말고 주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바로의 호위대장 보디발의 처가 유혹할 때에도 그로선 한창 때인지라 잠시 흔들리지 않았다고는 아무도 장담 못할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잠시 속으로 기도하여서 간음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인 줄 깨닫고는 그 유혹을 물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평소에 그의 신앙 양심은 물론, 인생관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올바르게 서있었기에 기도할 필요도 없이 그 시험에 전혀 흔들림 없이 대처했다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습니다.

이 일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후에도 여전히 무슨 일에서든 기도했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나 부모 형제가 계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제목부터 시작해서 말입니다.  그는 옥중에서 보디발의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도와 함께 이미 형성된 그의 신앙 양심에 따라 매사에 바르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성경이 그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보디발 처와의 사건 이전에 이미 그는 여호와를 믿는 자답게 매사에 의롭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그의 인품과 의로움을 보고 전옥은 매사를 그에게 맡겼고 성경은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3)고 말합니다.

요셉이 재물과 권력이 많아져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린 것이 아니라 정반대였습니다.  종일 노예로 일만 했고 또 감옥에 갇혀 있는 열악한 상황인데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형통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는 “형통”이란 평소에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때에 매사에 당신께서 보호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인도가 신자로 사전에 미래 일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신자에게 세우신 계획대로 신자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 당신께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모든 고난이 바로 그 종착지를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신자로선 하나님이 정한 종착지를 모르니까 그 연단의 과정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으로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 구덩이에서 건짐을 받는 순간 장래 자기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감도 잡을 수 없어도, 그 어떤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시리라는 점만은 확신했을 것입니다. 또 그분이 목적하는 곳은 몰라도 어쨌든 그분이 자기를 지금도 그곳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은 알기에 묵묵히 순종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즉, 일상사에서 자유의지를 자신의 신앙관에 따라 최선 최적으로 활용해서 스스로 신자답게 사는 것이 신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전형적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음성을 어떻게 들려주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어떻게 누구랑 하라는 식의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음성을 사전에 들려주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 털어서 손으로 헤아릴 정도이며 그 또한 완전하고도 구체적인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예: 여리고성 사건-수6장, 사무엘이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울 때-삼상 16장,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게 된 사울을 찾아간 아나니아-행9장, 베드로를 청한 로마 백부장 고넬료-행10장 등)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여호와가 갈대아에서 불러낼 때에도 떠나라고만 했고 그는 최종 목적지는 전혀 모르는 채 순종했지 않습니까? 심지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구름 기둥, 불 기둥 같이 눈에 확연히 보이는 방식으로 인도할 때에도 그저 그 기둥이 움직이면 함께 움직이고 멈추면 같이 멈추기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목적지를, 바로 그 다음 날의 행선지조차, 미리 알지 못했습니다.
  
바꿔 말해 어떤 문제를 두고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환경 가운데, 그것도 아주 일상적인 모습으로 인도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서두에 든 예화에서 하늘에서 황금 동아줄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람의 작은 고무보트로 구해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도 우연히 관원들의 꿈을 해몽하는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그것도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의 일을 잊고 이년이 지나서야 감옥에서 풀려나왔지 않습니까?  

그 동안에 요셉이 때로는 하나님께 실망하고 어쩌면 영영 풀려나지 못하는 것 아닌지 의심도 한두 번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감옥에서 구출하여선 장래에 이스라엘 나라를 보존하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계획을 한 치 어김없이 진행시켰던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우연의 사건으로 보였겠지만 하나님의 필연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바울은 지진을 일으키고 베드로는 천사를 보내는 기적으로 감옥에서 구출한 적도 있습니다. 신자에게도 그런 기적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경우 정말로 자기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파했으며 초대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저작할 일을 맡겼기에 그 소명을 완수할 때까지 그렇게 보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그런 기적은 한두 번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성에서 광주리를 타고 도망가고 배가 파선하는 등 엄청난 고통을 수도 없이 겪었습니다. 베드로도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그들이 미리 음성을 들었다면 그런 고통을 피하거나, 최소한 덜 겪을 것 아닙니까? 바울의 경우 성령의 경고음을 듣고도 자신의 서약을 지키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지만(행21장), 과연 우리에게 그만한 믿음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비상한 경우에, 당신이 선택한 특정인에게, 당신의 비상한 임무를 달성시키기 위해서 당신만의 비상한 방법까지 동원하십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즉, 평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자에게는 평범한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도 분명히 하나님의 일이지만 평범한 일이기에 비상한 방식이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오직 주님만을 위해 정말로 목숨까지 걸고서 충성하는 일도 아니면서 어쨌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일을 시행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아주 게으른 책임 회피일 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광대하시고도 완벽하시며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너무나 큰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이 일상적인 모습에서 당신의 뜻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먼 장래의 일을 미리 알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입니다. 기껏해야 바로 자기 눈앞의 일만 알게 한다는 뜻입니다. 눈앞만 인도하시는 것도 미리 그 의미와 결과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일단 진행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반드시 그 일을 해야만 나중에서야 알게 는 그런 방식의 인도입니다. 홍수로 지붕에 앉아 있는 자로선 이웃 사람의 고무보트가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당장에 빌려 타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컨대 신자는 매사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그 상황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과 결정과 시행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피조물 중에 최고 수준의 지성, 감성, 의지를 주신 까닭입니다.

평소의 신앙양심대로 행하라.

이성을 신앙에 바르게 맞추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올바른 신앙은 이성과 상충하여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신앙이 이성과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자신의 올바른 성경적 신앙관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자신의 지정의가 주위 환경과 사람에 따라서 너무 자주 요동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심지어 성경이 없었어도 매사에 기도했기에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정립했고, 그에 따라 행동했기에 하나님의 형통한 자가 되었지 않습니까?

이제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완비되어 있습니다. 항상 말씀을 읽고 숙지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인생관 가치관 윤리관 등을 형성하여서 그에 따라 결정 행동하면 됩니다. 성경이 이미 완비되었기에 하나님은 구태여 자세하게 미리미리 지시해주실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당신의 기본적인 원리만  깨우쳐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일은 신자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신자가 혹시 자기가 구체적 적용을 잘못할까 미리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항상 그분의 인도하심을 바란다면 그런 구체적 적용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신자 스스로 자신의 판단으로 결정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마음의 생각까지도 주관하십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설령 자기 판단에 착오가 있고 잘못된 결정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일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 중에 바로 잡아 주십니다. 그 잘못을 깨닫게 하시거나 강권적으로도 당신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요셉의 형들이 동생을 죽이려 들었지만 하나님은 요셉만 살린 것이 아니라 오랜 시일이 걸리긴 했지만 그들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리로 이끄셨지 않습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또 신자가 잘못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기록된 형태로 신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경이 현실의 모든 경우를 다 풀어서 설명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근본원리는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정말로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통달하면 자기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그분의 뜻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며 살 수 있습니다.  최근에 대두되는 안락사 자살 동성애 성전환 낙태 같은 문제도 명시적 구체적 지시는 없어도 충분히 그분의 뜻을 알아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신자가 하나님이 어떤 일을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지 미리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괜스레 그런 결정이 힘들다고 상담을 요청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쪽에 자기 마음, 욕심, 기호, 감정이 쏠리지만 신앙양심에 꺼리니까 제삼자, 특별히 목회자로부터 그렇게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즉, 모두가 선한  방안이라면 자기 판단으로 좋은 쪽을 택하여 시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간혹 정말로 아무런 욕심, 사심, 이해타산, 죄의 본성이 작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느 길로 가야할지 꼭 하나님 뜻을 묻고 싶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비상하고 특별한 경우라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가르쳐 주십니다. (이에 대해선 아래 Case Study 2를 참조 바람.)

그보다는 성경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가 행한 행동이 특별히 선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마음을 항상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 노력했기에 그 결과가 그런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누가 봐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 같았지만, 그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도 순간적으로 기도는 했겠지만 평소에 그의 가치관, 인생관, 신앙관 때문에 장인이자 이스라엘 왕을 결코 죽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에 잠시 방심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자기 마음을 맞추지 못하자 실족하여 밧세바와 간음하는 큰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영혼을 깨워라” 사이트의 #78 “환경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의 글을 참조 바람)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

누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일상적 모습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지만 직접적인 음성은 들려주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들리지 않는 음성을 자꾸 들으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가르침이 틀린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일에 대한 접근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구체적인 적용과 영적인 인식이라는 두 측면에서 다 그래야 합니다.  

먼저 구체적 적응 방식은 앞에서 대충 설명했습니다. 다시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평소에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여 신앙관, 가치관, 인생관 등을 하나님 뜻과 부합하게 올바르고도 확고하게 정립시켜야 합니다. 구체적 사안에선 이미 세워진 그 가치관과 성경적 원리와 주변 여건과 자기 능력 등을 종합해서 최선의 판단을 하여 그대로 시행하면 됩니다.

그와 동시에 그런 결정과 시행이 주님의 뜻에 부합되도록, 아니라면 주님이 바로 잡아주도록, 그래서 주님의 때와 방식으로 이끌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일을 판단하기 전부터 일을 시행해나가며 결과가 드러나고 그분의 뜻을 확실히 깨닫기까지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단 일을 시행한 후에는 자기가 기도한 대로 일이 이뤄지는지 혹은 하나님의 다른 인도와 특별한 의미가 드러나는지 진행되어져 가는 상황을 기도한 내용과 연결해서 세밀히 살펴봐야 합니다. 기도의 정확한 정의는 자기 뜻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뤄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수정해 나가는 작업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에 대한 영적 인식에서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사이의 한계를 정하려는 접근 자체가 무리한 시도, 엄격히 말해서 잘못된 시도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인간의 영적 분별력이 완전치 못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관계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일까지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고 어느 일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를 받아야 한다면, 일의 종류에 따라 인간과 하나님이 서로 분업을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는 당장에 인간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진리에 위배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그것도 신자의 일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고 하루에 몇 번 무슨 음식을 먹고 언제 샤워하고 몇 시에 취침해 몇 시에 일어나는 식의 허드레 일만 인간의 자유에 맡겨져 있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어디까지가 인간의 일상적인 일이고 어디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일인지 인간이 어떻게 정확한 구분 지을 수 있습니까? 신자의 모든 활동에 절대적 기준이 되는 성경에도 그런 구분은 없지 않습니까? 대신에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주권 혹은 전지전능성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통치가 미치지 않는 장소, 시간, 일이란 이 우주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따지면 흑암의 세력이 활동하는 것까지 그분의 절대적 계획과 온전한 섭리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신자의 일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분업(分業)인가? 동역(同役)인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기계적인 운명론과 다릅니다.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로봇이나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일을 하던 안 하든, 최선을 다하든 안 하든, 아무 계획도 하지 않아도, 자신과 무관하게 사전에 정해져 있는 코스대로 인생이 흘러간다는 것이 운명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 뜻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주에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신자의 삶은 더더욱 다릅니다.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계획대로 요셉의 일생을 이끌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일방적 강요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으로 반드시 범사에 기도하게 하고, 매번 최선을 다해 스스로 판단 결정 시행하게 했고, 필요하다면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로 당신의 근본 마음을 깨달아 알게 하여 당신의 자녀로 변화시키고 삶의 중요한 고비에서도 당신의 뜻에 맞게끔 행동하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요셉은 하나님의 일에 종으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그의 존재와 삶과 일생 전부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계획을 이뤄가는 도구요 과정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자유의지로 결정하여 자의로 행했던 그 모든 일이 사실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실패 혹은 죄마저 즉, 어렸을 때에 형들에게 자랑했던 그 일조차 하나님의 각본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때 그에겐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인식이 없었습니다.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빠진 이후로 그는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순전한 주의 종이 된 것입니다. 여전히 그가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를 통해 구원받게 하실 하나님의 비전이나 계획을 품지 않았으며 단지 일상에 충실했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참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선 매번 구체적인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먼저 되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을 일상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차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인 소명 즉, 어떤 직업을 통해 어떤 구체적인 일을 하며 또 그 일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할지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나아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과 자원 등을 하나님이 예비해 주시고 신자의 자발적이고 기꺼운 순종을 통해서 당신의 비전을 함께 동역하면서 달성시켜 나갑니다.  

신자는 그래서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동역자(co-worker, 同役者)가 되어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쓰임 받기를 진정으로 소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리고 또 바로 그런 동역자의 모습과 자세로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분의 음성을 들어서 행하는 것의 본질입니다.

지금 신자가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그 일을 맡기시고, 그런 여건과 그런 자원을 주신 것 자체가 그분의 뜻이지 않습니까? 신자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심지어 하루 세끼 식사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일이며 그분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일상적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구체적 계획이 아님, 자기 마음에 담아서 기도하면서 신자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면 됩니다.

단 자기 전부를 사도들처럼 주님을 위해 내어 드려야 합니다. 정말로 신자가 사도와 같은 심정으로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구태여 그분의 음성을 따로 들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니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이미 자신에게서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고 십자가 복음만 전하고 있는데 또 다른 음성을 들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또 그럼 나머지 일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이끌어 가실 것 아닙니까? (결론적으로 이 사이트의 예로 든 다른 글들은 몰라도 “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의 #1 “좌하면 우하고 우하면 좌하리라(창13:5-13)”의 글은 꼭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Case Study (1) - 어느 직장에 취직할 것인가?

상기에 말씀드린 원리를 바탕으로 인용하신 두 가지 경우를 간단히 살펴봅시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여러 직장의 offer를 거절하고 계속 직접적인 음성을 들으려 기다리는 청년입니다. 참으로 답답할 따름입니다. 평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 자기 적성과 재질과 은사에 적합한 일, 각 회사에서 제시하는 현실적 조건과 회사 분위기와 전망과 업무성격 등을 자기 이성을 동원해 합리적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결정 시행해야 합니다.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부터 하나님의 일입니다.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영적으로 신령해야만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성을 주신 것은 이성을 사용하여 합리적이고 선하고 의로운 결정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그분의 뜻에 따라 이성을 제대로 활용하여 행하면 바로 그분의 일이 되지 않습니까?

또 자신의 성격, 기질, 재능, 은사 모두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받은 하나님의 것을 활용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금까지 교육받고 경험하게 한 모든 배경에도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 자리에 이르게끔 그분께 훈련과 연단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현실적 요소들을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짓입니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지금껏 한국교회는 종교적인 일, 그중에서도 교회에 충성하는 것만 하나님의 일이거나 우월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너무나 엉터리로 가르쳐왔습니다. 교회는 실제 현실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그분의 뜻과 원리를 배우는 훈련소입니다. 삶에서, 이 경우에는 회사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나아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우선적인 뜻은 당신의 자녀답게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이가 신자를 보면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고 냄새를 맡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하는 일로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는, 거룩하게 변화된 신자로 영광을 얻습니다. 신자가 하는 일의 종류, 다니는 회사의 종류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회에서 이름도 빛도 안 나는 청소부, 식당배달원, 아파트경비 등의 일에도 당신의 거룩하고 완전한 뜻과 계획이 반드시 있습니다.  

신자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먼저 되면 됩니다. 그러면 신자가 행할 일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이 청년의 경우에 2년이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이 바로 아무 회사나 자기 편안한 대로 가라는 뜻입니다. 일상적인 일에서마저 비범한 인도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자 교만입니다. 사도처럼 어떤 핍박도 이기고 생명을 걸면서까지 예수를 전하는 일이 아닌데도 비상한 인도를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완고하고 속이 좁은 분으로 제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영적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모든 이의 하나님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은 고의로 악한 일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도 된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심지어 월급을 가장 많이 주는 회사를 택해도 됩니다. 대신에 삶을 살아가는 태도, 방향, 자세 즉 이미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사는지가 관건입니다. 2년이나 쉬고 있는 것은 정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질책만 들을 뿐입니다. (“성경문답” 사이트의 #40 “크리스찬 상담가가 된다는 의미는? (신자의 소명과 직업)”의 글도 참조 바람.)  

Case Study (2) - 하나님의 부르심과 목회자의 길

사업에 은사가 있어서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고 또 시작하려고 했었던 청년의 경우도 문제가 많습니다. 갑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목회자의 길을 가야된다고 하면서도 목회자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고 신학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기쁜 마음이 없으면서 목회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두고 사업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일의 종류로 하나님의 일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부자가 하늘나라 가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직하고 치사한 방안이 아니라 정직하고 순수한 경쟁력으로 사업을 하여서 번 돈으로 직원의 복지 후생과 지역사회 발전에 사용하면 됩니다. 정말 크리스천 사업가다운 모습을 드러내면 목회자가 되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 큰 의로움과 영향력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Case Study 1에서 월급 최고 많이 주는 회사를 골라도 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가 들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가 갖는 생각의 근원은 1) 하나님이 심어주는 것, 2) 사탄이 미혹한 것, 3) 선하든 악하든  신자 스스로 떠올린 것, 셋으로 나눌 있습니다. 이중에서 2와 3의 경우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도 광명한 천사로 위장합니다. 신자가 선한,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위한 생각을 해도 사탄이 심어준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구분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심어준 생각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자신에게도 진심으로 기쁘게 달성하고 싶은 소원으로 명료하게 인식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십자가 은혜만 높여지는 결과가 그 일의 확실한 목적임을 본인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아무리 선하고 경건하며 신령하고 또 그 이루는 과정도 의롭다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어떤 형태로든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심어준 생각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되면,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심어주는 생각을 내면의 성령의 미세한 깨우침으로 인지하게 되면 반드시 감사와 기쁨이 따릅니다. 무엇보다 심령이 평안하고 안식하는 가운데 자유함을 느낍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온전한 헌신과 실천이 따릅니다.

나아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과 자료와 인력 등을 하나님이 다 마련해주셨거나 지금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일을 수행해나가는 전과 도중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품과 재능과 능력만으로 행하는 일이 절대 아님을 본인만은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매사에 기도하면서 그분이 이끄는 대로, 현재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묵묵히 그분 따라 걸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음성은 신자로 하여금 혼동하지 않고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컨대 보통의 꿈들은 깨어나면 그 내용을 거의 잊어버리지만, 요셉이 어려서 꾼 두 꿈, 옥중의 애굽 관원들과 바로가 꾼 꿈은 너무나 사실적이었고 또 정확하게 기억했지 않습니까? 거기다 분명하고도 동일한 메시지가 있는 꿈을 거푸 꾸게 했지 않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일을 수행해 가는 중에 혹시 그분의 뜻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 다시 순전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기쁨과 평강을 주셔서 당신의 뜻임을 확신시킵니다. 기드온처럼 당신의 뜻임을 확인할 수 있는 징조를 달라고 기도해도 됩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을 즉, 사탄에 미혹되었거나 혹은 자기 욕심만으로 행하는 잘못된 일이라면 결코 자유, 평강, 기쁨, 안식, 확신 등이, 더 중요하게는 그 일을 끝까지 열심히 수행하고자 하는 열성과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봐집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자부는 하지만, 사실은 착각일 확률이 훨씬 높은데도, 전혀 기쁨과 감사는 물론 평강과 확신도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확실한지 그것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 징조를 달라고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에게 어떤 일을 강제로 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면제 시키는 구원조차 그러할진대, 당신의 종으로 삼는 일은 더더욱 그러할 것 아닙니까?    

앞에서 신자의 일상사가 신자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기에,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분명히 있지만, 스스로 이성을 갖고 결정 시행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유일한 예외는 목사 선교사 같은 하나님의 풀타임 사역자가 될 때입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지만, 특별히 신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그 공동체를 이끌 사역자는 반드시 주님의 특별한 소명(召命, calling)의 절차가 선행됩니다.

사역자는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택하고 불러주셔야만 합니다. 사람마다 그 방식은 다르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분명하고도 실제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지명한 일대일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 일을 기쁨과 감사로 순종하게 됩니다. 앞으로 외롭고도 고달픈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절차 없이 무조건 억지로 당신의 종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예의 신학생은 신학교에서 말씀을 배우는데도 기쁨이 없다니 자신의 소명을 진짜로 다시 심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자가 말씀에 흥미가 없이 그 일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면 그런 소명이 없는 자도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야할 길이 아닌데도 가고 있다는 부담감이, 이야말로 내주하신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임, 그런 가장 기초적인 기쁨마저 방해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혹시라도 하나님 음성을 듣고 신학교에 입학 했는데 중간에 진로를 바꾸면 하나님께 서약한 것을 어기는 죄를 범한다고 착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이 별로 내키지도 않은 자를 사역자로 세울 리는 없습니다. 본인보다 그에게 양육 받을 양떼를 생각해서라도 하나님이 나서서 말릴 것입니다. 그 본인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영혼에 평강과 자유를 얻는 것이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원을 어기는 죄도 아닙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일은 목회자뿐 아니라 일반 세속의 일도 그분이 기뻐하시고 아주 귀하게 여기는 그분의 일입니다. 이 시대는 흘러넘치는(?) 사역자보다 오히려 진정으로 크리스천다운 사업가가 더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더 늦기 전에 아무 부담감 죄책감 갖지 말고 당장에 진로를 변경하거나, 아니면 진짜로 하나님과 씨름하여서 그분의 뜻을 제대로 확인한 후에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8/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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