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없는 무덤도 있다.

조회 수 106 추천 수 0 2017.03.03 06:56:56

핑계 없는 무덤도 있다. 

출애굽기 강해 (6)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출2:9-15)

 

 

모세의 가정교육

 

모세의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갓난아기 모세를 바로의 공포정치에서 극적으로 살릴 수 있었다. 그 지혜는 인자하고 히브리인을 차별하지 않는 바로의 공주에게 아기를 보여 보라는 것이었다. 공주는 모세를 죽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년기를 친부모와 함께 기거하며 생모의 젖을 먹으며 자라도록까지 배려해주었다.

 

“그 아이가 자라매” 공주의 궁정으로 이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0절) 식사나 잠자리 같은 기본적인 생활을 혼자 처리할 수 있고 또 서로 대화가 가능한 이후라는 뜻이다. 그럼 그 동안에 모세는 친부모로부터 히브리 민족의 유래와 여호와 신앙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특별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소유케 해주실 것이라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소망도 품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록 바로의 왕자로 외적 신분이 바뀌지만 히브리인으로서 정체성을 절대 잊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히브리 남자 신생아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었는데 모세가 생존하고 바로의 공주의 양자로 입양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 온 가족이 일 년 가량 하루도 빠짐없이 눈물로 가정예배 드렸다는 그간의 사정도 설명해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네 인생에 동족을 위한 어떤 큰 계획을 하나님이 마련해놓았음이 분명하다고 인식시켰을 것이다. 나중에 하나님이 막상 너를 들어 쓸 때를 대비해서 바로의 궁정에서 선진 학문과 무술을 철저히 익히라고 신신당부했을 것이다.

모세는 유년시절을 동족과 함께 기거함으로써 그들이 기본 인권과 자유가 말살된 채 처참한 생활을 함을 목격했다. 반면에 바로의 궁정에 들어가선 평안한 가운데 화려하고 사치함의 극치도 누려봤을 것이다. 그럴수록 그 모든 풍요가 노예인 동족의 땀과 눈물과 피 위에 쌓인 것임을 알고 비분강개 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가르침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차츰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을 회색분자 같은 위치에 두신 하나님의 뜻만은 아직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곤혹스럽긴 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동족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인생을 헌신하겠다고 스스로도 단단히 결심했을 것이다.

 

모세의 큰 약점

 

그 잔인한 바로가 모세만 예외로 살려주었고 또 왕자로 삼는 것까지 허락한 일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우선 공주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을 것이며 그 위에 자신의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로마나 일본의 한국강점기 때나 어떤 나라든 다른 민족을 지배할 때는 피지배 민족 출신의 관리나 중재자를 세우기 마련이다.

 

모세의 부모는 둘 다 레위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1절) 아직은 율법을 전수받기 전이라 레위인이 제사장 지파로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출애굽기는 분명히 율법을 받은 후에 기록되었고 또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세의 부모가 히브리인들 가운데 존경을 받는 영향력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암시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바로는 모세를 잘 키워 자기편으로 만들면 히브리 노예의 불만을 잠재우며 통제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지금 모세의 나이는 40세다. 한창 혈기 왕성할 때다. 성경을 앞뒤로 전체적으로 살피면 모세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틀림없이 성격이 아주 급했던 것 같다.

 

출애굽 후에 광야를 방황할 때에 므리바에서 하나님이 반석을 명하여 생수를 내라고 분명히 명령했다. 아무리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을 해서 짜증이 많이 난 상태이긴 해도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이나 내리치는 바람에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또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고 내려오니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경배하는 광경을 보고 격분했다. 하나님이 직접 십계명을 새겨준 두 돌 판을 그 자리에서 깨트려버렸다. 그는 한마디로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타이프였다.

 

지금 히브리 동족을 친 애굽인은 노역을 감독하는 관원이었을 것이다. 히브리 노예 중에 한 사람이 탈진했거나 쇠약해서 하루에 할당된 책임량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기에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때렸을 것이다.

 

마침 현장을 목격한 모세가 가뜩이나 성격이 급한데다 시쳇말로 꼭지가 돌아서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살피고 관원을 죽이고 모래에 파묻어 버렸다. 나중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목자들 여러 명을 상대로 이길 정도로 모세는 기골이 장대하고 왕자로서 갈고 닦은 무술실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양심의 가책이 없는 모세

 

모세가 애굽 관원을 죽일 때에 도덕적 죄책감이 전무했을 것이다. 동족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바이자 선한 일을 한다고 인식했을 것이다. 아마 평소에 가장 악질적인 감독관임을 알고 마침 그런 장면을 보자 저놈만 없애면 동족들이 좀 편하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인간적 윤리로는 히브리인의 열렬한 호응을 받아 마땅한 영웅적 행위였다.

 

그런데 다음 날 사태는 정반대로 전개되었다.(14절) 모세가 두 히브리 사람들이 싸우는데 그 중에 분명히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상대를 두들겨 패는 현장을 목격했다. 모세가 그 잘못한 사람을 꾸중 내지 충고를 했다.

 

“우리끼린 설령 잘못을 범했어도 같은 노예이자 동족이니까 서로 양보하며 용서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당신이 잘못해놓고 거꾸로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잘못이 없는 사람을 치면 애굽 관원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 우리가 싸울 대상은 애굽인이지 동족이 아니지 않느냐?”라고 다그쳤을 것이다.

 

그 히브리 사람이 대뜸 누가 너로 우리를 다스리는 재판관으로 세웠느냐고 반발했다. 이는 참 의미심장한 말이다. “네 말대로 히브리 사람끼리 좋게 해결하자면 너야말로 이 일에 개입할 자격조차 없지 않느냐? 네 방식으로 따지면 히브리인이면서 애굽 왕자 노릇하는 그것부터 잘못이지 않느냐?”

 

모세에겐 이어지는 반발이 더 충격적이었다. 네가 애굽 사람 죽였듯이 나를 죽이려 드느냐? 모세로선 살인이 들키면 사형이거나 왕자 신분이 박탈된다. 자기 목숨을 걸고 동족을 위해서 애굽 관원을 죽였는데 히브리 동족을 죽일 리는 만무하다. 자기 입장을 몰라줘도 너무 몰라주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마치 강도에서 구해주었더니 지갑이 없어졌다고 내어놓으라는 꼴이다.

 

모세는 자기 딴에는 주위 사람이 없는지 잘 살폈다. 그러나 성격이 급한데다 비명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신속하게 죽여서 매장해야 하니까 아주 서둘렀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누군가 모세의 살인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지금 히브리인이 모세에게 대드는 소리를 주변의 애굽 관원이 못 들었을 리 없다. 바로에게 즉시 보고했을 것이다. 그 동안에는 모세가 눈꼴은 쉬었어도 히브리 노예의 중재자 역할을 맡겼기에 왕자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애굽 관원을 살해한데다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을 확인했으니 모세의 이용가치는 더 이상 없어졌다.

 

평소의 바로의 성격과 애굽의 법률 관습에 정통한 모세는 잡히면 바로 사형임을 직감했다. 왕자가 하인 한 명 대동하지 못하고 도피자금으로 사용할 금붙이 하나 챙기지 못한 채 몸 동아리 하나만 이끌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주하기 바빴다. 졸지에 온 사방이 캄캄한 절망으로 빠졌다. 난지 석 달 만에 나일 강에 던져졌던 바로 그 상황으로 되돌려진 셈이다.

 

히브리인이 반발한 이유?

 

모세는 자기 신분과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동족의 박수는 못 받을지언정 그냥 자기들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정도로 그쳤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예 살인자로 고발당했다. 이 히브리인은 자기 잘못을 거꾸로 상대에게 덮어씌워 팰 정도로 경우가 없이 제멋대로인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가 모세에게 대든 이유는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누가 너를 재판관을 삼았느냐(14절)는 말은 너는 애굽의 바로가 임명한 재판관이지 않느냐는 뜻이다. 우리 히브리인들이 힘이 없어서 바로에게 어쩔 수 없이 복종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단 한 번도 복종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차세계대전 나치의 홀로코스터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개스실에서 그렇게 많이 죽어나갔지만 마음속으로는 절대 독일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 히브리인은 평소에 모세의 행적이 아주 못마땅했던 것이다. 여호와 신앙을 제대로 갖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가 반발했던 아주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지금 모세의 모습이 어떠한가? 히브리 남자들은 삼손의 예에서 보듯이 머리카락과 수염은 남자의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 여기고 자르지 않고 잘 가꾸었다. 반면에 애굽 사람들은 영화나 박물관 그림에서 보듯이 완전히 머리카락과 수염을 미는 관습이 있었다.

 

모세가 도주하여 미디안 광야에 이르자 미디안 처녀들이 모세의 외모만 보고 그가 자기 신분을 밝히기도 전에 애굽 사람임을 금방 알아본 까닭이다.(19절) 모세도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었고 왕자로서 사치스런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평소에 영양 섭취와 운동을 충분히 해서 체격도 건장한데다 얼굴에 반지르르 윤기도 흘렀을 것이다.

 

히브리인의 반발이 단순히 나는 폭행 죄인이지만 너는 훨씬 더 중한 살인 죄인이지 않느냐는 뜻이 아니었다. 차라리 바로의 말은 들어도 모세 네 말은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너는 히브리인도 아니고 애굽인도 아닌 박쥐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더 결정적으로는 왕자로서 호사스럽고 풍요롭게 아무 걱정 없이 산 주제에 우리의 한숨 눈물 고통을 알면 얼마나 알 것이냐는 뜻이었다.

 

모세의 나이가 지금 사십이다. 그 나이면 자기 인생의 뜻을 세우고 실현할 나이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비전대로 동족의 유익을 위하려 과감하게 처음으로 시도했던 일이 무참하게 실패했다. 모세의 실패한 원인은 성급한 기질 때문에 살인이 들킨 때문이 아니다. 말을 더듬어서 충고를 잘못한 것도 아니다. 그가 히브리인을 꾸중한내용은 틀린 것 하나 없이 옳았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오직 하나다. 비단옷을 입은 채 그 다툼에 개입했던 탓이다.

 

친구의 위로인가 자랑인가?

 

제가 삼십 초반의 젊은 나이게 적은 규모이긴 하지만 명색이 사업을 하다가 완전히 망했다. 아이들의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 예수를 믿기 전인데 많은 친구들이 한 끼 밥과 술을 사주면서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밥과 술 사줄 여유가 있으면 차라리 현찰로 주지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스스로 자격지심도 생기고 그럴수록 제 열등감만 부추기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그들이 싫고 미워서 아예 전화 코드를 빼놓았다.

 

본문 상황에서 모세처럼 친구들의 동기는 순수했고 저를 위해 일부러 시간과 경비를 소비했다. 잘못은 본문에서 히브리인이 범한 것처럼 제 쪽이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비단옷을 입은 것 같고 나는 누더기만 걸친 것 같은 반발만 생겼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이야기이지 않는가? 윤리적으로 따져 저야말로 너무나 추하고 악했다. 친구들의 선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 속은 꼬일 대로 꼬여있었다. 거꾸로 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다니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위로하러 온 친구들도 엄격히 따져서 저와 대동소이 했다는 사실이다. 식사 한 끼로 참 위로가 결코 될 수 없음을 몰랐다. 당연히 행해야 할 바이자 아주 의로운 행위를 한다고 여겼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선하고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위로가 된다고 착각할 정도로 어리석다는 뜻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인지라 일부 친구들은 저를 멸시하고 심지어 쌤통이라고 여기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저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로하고 있었고 나아가 자기를 자랑까지 했다. 당시 삼십 초반이라 그들은 겨우 회사의 말단 직원인데 저는 팔자가 좋아서 그 나이에 사장이라고 번듯한 사무실 채려놓고 기사를 데리고 다니는 꼴이 그 동안 보기 싫었던 것이다.

 

지나고 나서 보니, 특별히 예수를 믿고 나서 생각하니 저도 불쌍했고 위로하는 친구들도 불쌍했긴 마찬가지였다. 본문의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만 불쌍한 것이 아니다. 그는 비록 도망자 신세라도 마음껏 자유롭게 다닐 수는 있다.

 

거주 이동의 자유도 없이 짐승 같은 처우를 받으며 평생을 노예로 지낼 히브리인들이 더 불쌍하다. 나아가 화려하고 장엄한 궁전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애굽 사람들도 사탄의 종이 되어서 참 사랑과 참 진리는 평생 가도 누리지도 알지도 못한 채 흑암 중에 허망하게 인생을 마감하니까 더더욱 불쌍하다.

 

가정별 심방을 마친 소감

 

한국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한다. 모든 인생에 구구절절 사연이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핑계를 잔뜩 안고 죽었다는 뜻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는 뜻이다.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외면 부재되는 곳에는 전정한 기쁨과 만족은커녕 선한 것도 단 하나 생기지 않는다.

 

모세가 살해해서 암매장한 애굽 관원을 인간적 가치관으로 따지면 어떻게 되는가? 히브리인들을 가장 혹독하게 다뤘지만 애굽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공사기간을 단축시킨 애국자가 된다. 죽고 난 후에 가족들이 훈장과 포상금을 받았을 것이며 피라밋에 이름이라도 새겨 애굽인들이 영원토록 영웅으로 기억해야 할 정도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따지면 한창 나이에 인생을 훨씬 더 오래 재미있게 살 수 있는데 졸지에 비명횡사 당했다. 국가적 영웅인 그도 핑계 많은 무덤에 묻힐 수밖에 없다. 그는 애굽인에겐 최고로 선한 자였지만 히브리인에겐 최고의 악인이었다. 이처럼 인간사회에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선은 없다. 참된 선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인생에 참 기쁨이 생길 수 있겠는가?

 

그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경우가 또 있다. 히브리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타 민족에게 사백 년 넘게 노예로 혹사당하고 있다. 그런데 노예끼리도 힘센 자가 힘이 약한 자에게 자기 잘못을 덮어씌워서 두들겨 패고 있다. 이 얼마나 치사하고 비겁한가?

 

인간본성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 의롭지 않다. 모두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거꾸로 인간은 아주 선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너무나 어리석고 불쌍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 사회에서 참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지 않는가?

 

이번 가정별 심방을 통해서 저희와 각 가정들이 더 친밀해질 수 있어서 참 감사하고 좋았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절실히 느낀 점이 있다. 가정마다 고유의 문제와 상처와 어려움이 없는 가정이 단 하나 없다는 것이다. 누가 더 편하게 살고 있다고 순서를 매길 수 없었다.

 

남들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고 자기들 문제보다 덜 심각할 것 같아도 막상 그 당사자 입장에선 최고로 중요하고 너무나 심각한 골칫거리다. 아무리 오래 동안 눈물로 간절히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고 더 악화되기도 한다. 결론은 저부터 시작해서 우리 모두가 불쌍하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신자가 된 의미

 

그러나 예수 믿는 신자는 그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신자 된 의미가 무엇인가? 절대로 절망에 빠진 채 인생을 마감할 신분과 존재가 더 이상 아님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 그렇게 놓아두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오직 하나다.

 

하늘의 비단 옷을 벗고서 이 땅의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고 오신 예수님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 대신에 우리의 죄는 물론 고난, 상처, 수치, 억울함 모두 다 감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셨지 않는가?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이 땅에서의 삼 년간의 공생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한숨을 듣고 있고 눈물을 보고 계시며 하늘의 위로와 힘과 소망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신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비참한 상태에 빠져있어도 있는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 그 고귀한 이름만 불러도 반드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다. 우리의 기도를 당신이 성부 하나님께 중보 해주신다. 반드시 당신의 방식과 때에 당신의 뜻대로 선하게 응답해주신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선언했는가? 하늘에 자기를 위한 아름답고 영원한 장막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금방 썩어 없어질 장막과 그 영원한 장막 사이에 끼여서 사는 것이 신자의 신분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기는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했다. 천국을 실제로 갔다 온 체험을 한 그였기에 더욱 그럴 수 있다.

 

그 말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고 감사하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자기는 얼마든지 핑계가 전혀 없는 무덤에 누울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며 살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신자들더러 자기를 본받으라고 했다. 언뜻 교만한 자랑 같지만 그렇지 않다. 현실에선 수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예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수행하며 그분과 개인적으로 깊이 교제하는 것이 너무 좋고 귀한 삶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도 제발 자기와 같은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로선 십자가 복음으로 한 미혹된 영혼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인생에 큰 보람이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헤롯 아그랍바 왕에게 쇠사슬에 매인 것 하나만 빼고 모든 점에서 나와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당당하게 권했지 않는가? 자기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성공한 인생을 살지 않고는 그런 말을 감히 할 수 없지 않는가?

 

본문이 말하는 바가 모세와 두 히브리인과 애굽 관원 중에 누가 더 선하고 더 악한지 밝히려는 뜻은 전혀 없다. 모든 이가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하며 전적으로 그분께 의탁하지 않으면 똑같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자 모세 같은 살인자라는 것이다. 하나님 모르고는 핑계를 잔뜩 안고 죽어야만 하는 너무나 불쌍하고 해 아래서 행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인생이라는 것이다.

 

또 모든 인생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앞에서 자기도 불쌍하고 예수를 모르는 모든 인생들이 너무나 불쌍하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자신의 그 불쌍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인생의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할 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그럴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신분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도 흔들 수도 없다. 어떤 실망 아니 절망이 닥쳐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봐야 한다. 그럼 그분이 우리 다리에 힘을 주어 다시 일어나게 해주신다. 넉넉히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바울처럼 핑계 없는 무덤에 누울 수 있다.

 

2/12/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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