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강요할 때도 있지 않는가?

조회 수 445 추천 수 6 2013.08.24 01:22:01
(보충질문) 하나님이 강요할 때도 있지 않는가?


[질문]


목사님 추가질문 드려도 될까요? 글 중에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에게 어떤 일을 강제로 시키는 분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이런 류의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모세, 예레미야, 또 예수님이 골고다에 올라가실 때 대신 십자가를 진 구레네 출신 시몬을 예로 들어 반박합니다. 이런 부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답변]

아주 중요한 사항을 잘 지적해주셨습니다. 우리말의 표현이 영어나 헬라어처럼 과학적이고 세밀하지 못합니다. 거기다 한국인의 사고가 감성 우선적이며 어려서부터 토론 논술 등의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두리뭉실하게 설명하고 두리뭉실하게 이해하고 치우는데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때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 나름대로 독자의 오해를 부르지 않게 가능한 정확한 의미로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만 여전히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핵심 주제가 아닌 부연 설명은 아무래도 간략하게 언급하고 마니까 독자로선 필연적으로 추가 의문이 생깁니다. 신학을 공부하시는 질문자이신지라 예리하게 짚어주시어 더 깊은 논의를 할 수 있게 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

틀림없이 제가 “절대로”라는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했기에 추가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주제 밖의 이야기지만 저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절대, 완전, 완벽, 유일 등의 단정적 표현을 사용하기 좋아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강조합니다. 작금 기독교계 일부에선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유일성, 절대성, 완전성 등을 왜곡 변개 타협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렇지 않은 교회도 불신자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다는 핑계로 거의 강조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고 완전하신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의탁, 순종, 헌신, 감사, 경배, 찬양 등이 없이는 죽은 신앙, 최대한 양보하여 힘이 빠진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맡길 때에 “절대로” 강제로 시키지 않는다는 뜻은 일차적으로 그분의 속성 내지 성품에 비추어 설명한 것입니다. 그분의 생각은 인간처럼 아침저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하면 인간이 그분과 교제하면서 인도와 통치를 받을 때에 혼선이 생겨서 진정한 순종은 물론 온전한 신뢰도 하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의 절대로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특성이라는 뜻입니다.

첫 인간 아담에게 주신 선악과 금령에 바로 그런 특성이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담이 자기 의지를 동원해서 자발적이고도 기꺼이 당신께 경배와 찬양을 돌리기 원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원죄 하에 태어나는 인간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수많은 선지자를 보냈어도 돌이키지 않는다고 그 자리에서 벌을 주지 않았습니다. 일시적 징계를 주면서도 여전히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보다는 그분은 당신을 자원하여 진심으로 따르는 남은 자들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경우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구원은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당신께서 한 사람의 타락한 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일입니다. 그 십자가 은혜를 자기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 자체도 당신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에게서 보았듯이 반드시 인간의 자발적 동의와 의지적인 믿음의 결단과 헌신이 함께 동반되게 하십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한 치의 상충과 모순 없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강제(强制)와 강권(强勸)

성경에는 질문자께서 예로 드신 모세, 예레미야, 구레네 시몬처럼 하나님이 강제로 당신의 일을 시킨 것 같은 경우가 나옵니다. 이는 당신께서 강제로 시킨 것이 아니라, 강권적으로 역사한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먼저 강제는 인간의 자발적인 수긍과 동의가 없이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여서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까지 너무 하기 싫어도 거부할 힘이 아예 없거나 벌이 두려워서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독재정권의 폭압정치에 맹종하는 것처럼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을 수행하는 중에는 물론 끝까지 그 강제력이 무서워 굴종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는 당신만의 방법을 동원하여서 어떤 일을 시키지 전까지는  신자 스스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그 일을 하고자 하는 헌신, 자원은 물론 그런 일을 하리라 상상도 못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여 반드시 그 일을 정말로 하고 싶다는 소원이 생기게끔, 최소한 그 일을 기꺼이 하겠다는 동의를 얻은 후에 그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강제나 강권이나 결과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입니다. 강요에 의한 것은 맹종, 굴종, 무조건 복종인 반면에, 강권적 역사에 의한 것은 순종, 정확히 말해서 “조금 뒤늦은” 순종입니다. 따라서 절대 강요치 않는다는 말은 수긍, 동의, 결단, 자원, 헌신의 절차를 필하지 않고는 당신의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자 쪽의 자원과 동의가 미처 없었는데도 강권적으로 역사한다는 것은 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먼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과 경륜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비상한 일을 시키기 위해서 특정한 인물을 특정한 시기와 여건에 당신만의 방식으로 준비시켜 두었다가 당신의 때가 차매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권적 역사로 그 소명에 대한 신자의 자발적 동의와 헌신을 얻어냅니다.      

넓은 의미에선 신자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전부가 강권적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예수 믿어 구원을 얻는 것부터 그러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감당시키셨도다.”(사53:6) 우리는 죄 중에 빠져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서 예수를 믿을 생각도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거역하고 비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무한한 긍휼과 절대적 주권으로 구원 받을 자를 택하여서 성령의 역사로 마음 문이 열리게 했습니다. 신자 주위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서 그때까지의 자기중심 가치관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도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 앞에 완전히 벌거벗고 진정으로 겸비하게 엎드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첫 답변에서 살펴본 요셉의 생애가 바로 그랬지 않습니까?

신약 최대의 사도로 세운 바울도 그렇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의 찬란한 빛을 보도록 하여 사흘간 실명케 만들었습니다. 예수 믿는 신자를 잔해하려 가는 길이었으니 이야말로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믿음 자체도 강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겁을 주어 무조건 믿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하늘 보좌에 않아 계신 것을 그로 직접 보게끔 해서 당신께서 정말로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임을 확신시키려는 뜻이었습니다. 또 무엇보다 율법과 대비되는 십자가 은혜의 구원교리를 정리하여 설명하는 신약 성경들을 저작케 하려고 구약율법의 전문가로 그를 미리부터 준비시켰습니다.

그 사건 직후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곧바로 증거한 것도(행9:20) 그가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흘간 눈이 멀 동안에 자기가 자랑했던 지난 모든 것들이 깨어지고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구주이자 전부가 됨을 체험했기에 그대로 나눌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그 후 아라비아 사막에서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진 후에(갈1:17)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보태여 십자가 죽음의 의미 즉, 온전한 복음을 설파하고 교회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가 먼저 사도로 자원하기는커녕 믿을 마음도 없었지만, 예수님이 강요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사역을 하기 전에 그의 자발적 동의와 헌신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가 선행되었습니다.  

트라우마에 걸린 모세

모세의 경우, 하나님이 나중에는 화를 낼 정도로(출4:14) 무려 다섯 번(출3:11,13, & 4:1, 10,13)이나 자신의 소명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절한 것보다는 주저했다고 보는 것이 옳은 해석입니다. 처음 답변에서 “내가 누구관대”라고 시작해서 입이 뻣뻣하다는 등의 핑계를 자꾸 대었습니다. 순종하기 싫다기보다는 자기의 자격이 되지 않거나 능력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물론 감히 다섯 번이나 주저한 것은 하나님 앞에 엄청난 불경일 수 있고, 거절의 뜻으로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마지못한 듯 하나님께 순종한 뒤에 하나님은 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출4:1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주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두렵고 싫었던 것이 아니라, 애굽으로 돌아가는 일에 주저했던 것입니다.

그는 살인죄를 범한 도망자였습니다. 애굽 당국에선 법적으로 기소중지자로 언제든 돌아가면 체포되어 사형될 처지였습니다. 그런 판국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거기다 동족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말해야할까요 물었던 까닭도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 애굽 왕궁에서 바로의 왕자로 컸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나서면 모세의 민족적 정체성을 동족들이 문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가 애굽 관원을 죽일 때에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출2:14)고 이미 그 문제를 걸고 넘어졌지 않습니까?

지면 관계상 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가 하나님께 건방지게 대꾸한 답변마다 나름의 충분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관원을 쳐서 죽일 만큼 그에게 노예 살이 하는 동족을 돕고 싶다는 소원이 강렬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는데도 바로의 왕자로 자라게 만든 하나님의 섭리도 자기더러 그 일을 하라는 그분의 계획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일을 하려고 나서자 하나님은 자신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로 내몰았고, 사십 년간이나 계속 침묵하시다가, 80 노인이 되어서야 구원자로 돌아가라고 하니까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를 구원자로 세우기 위해서 바로의 궁정과 광야에서 훈련시킨 것입니다. 나중에 바로와 맞상대해야 하고 또 동족을 광야에서 인도해야할 책임에 꼭 필요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마저 대든 것 같은 모세의 주저 내지 거절은 사실은 그의 애굽에 대한 두려움, 동족 앞에 나서기 꺼려함,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의심 등을 해소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모세로 자발적 동의와 헌신을 하게끔 한 강권적 역사입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가 신비하고도 놀랍도록 엄청나지만, 짓궂은(?) 면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제 애굽엔 너의 생명을 찾던 이가 없다고 즉, 공소시효가 만기 되었거나 왕조가 바뀌어 지난 일을 잊었다고 알려주면 금방 순종할 텐데 순종의 결심을 한 후에야 그 일을 가르쳐주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부터 먼저 온전히 신뢰케 하여 당신과의 관계를 바로 세운 후에 현실적 상황도 알게 해주었습니다.

미리 애굽의 장애가 제거된 줄 일찍 알면 모세의 그 급한 성격과 자기 의가 작동할 것마저 하나님은 막으신 것입니다. 그보다는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당신만 전적으로 의뢰해야만 당신의 종으로써 당신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일을 달성하는 것은 하나님 몫이고 신자의 몫은 순종뿐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세에게도 맹종 굴종하는 강요를 하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순종하게끔 강권적으로 역사한 것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누차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비상한 일을 시키기 위해서 특별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미리 훈련 예비했다가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불러냅니다. 사무엘을 필두로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등 구약의 선지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미리 하나님의 일에 대한 큰 비전을 갖고 준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불리어 나올 때 다들 자신의 자격과 능력이 너무 모자란다고 여겨서 주저하다 못해 두려워했습니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성막의 시종으로 일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도 못 알아들어 제사장 엘리가 시키는 대로 따랐습니다. 그런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엘리 집안의 죄악을 심판하겠다는 메시지부터 먼저 주셨습니다.(삼상3:10-18) 아무리 어렸어도 그가 성막을 지키는 엘리와 두 아들의 부정한 죄를 보고 평소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죄가 많은 부정한 자이기에 도무지 선지자로 합당치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게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화저를 그 입술에 대어 죄를 사하여주는 은혜를 먼저 체험케 한 후에 당신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종으로 세웠습니다.(사6장)

예레미야는 틀림없이 구변이 모자라고 수줍음이 많아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부름을 받자마자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렘1:6)고 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곧바로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7,8절)고 용기를 북돋우었습니다. 또 당신의 손을 그의 입에 대시고는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절)고 선포합니다. 그가 부끄럽고 두려워했던 최고 약점을, 모세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을 해결해주었듯이, 바로 치유해주었습니다.

나아가 그를 열방 위에 당신의 선지자로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며(10절), 그것을 확증하는 환상을 두 번이나 보여주었습니다(11-16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당신이 항상 함께 하여 구원할 것이며 그를 온 땅과 유다 왕들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으로 세우겠으니 안심하라고 재차 격려했습니다(17-19절). 그는 하나님을 직접 만났고, 그분이 당신의 종으로 세웠다는 언약을 받았고, 자신이 평소 괴로워했던 최고 결점까지 고침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예언이 실현될 것을 환상으로 직접 보았으며, 당신께서 함께 하니까 아무 염려 말라는 약속과 격려를 여러 번 받았습니다. 아무리 심약한 자라도 담대히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2장 이후의 기록을 보면 즉, 선지자로 세움을 입자마자 너무나도 심각하고 엄격한 하나님 심판에 관해 담대하고 거침없이 직선적으로 선포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순간적이고도 전인적인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입에 당신의 손을 대고, 두려워 말고 당신만 믿으라고 권하고, 입에 당신의 말을 심어주겠다는 약속 등은 그에게 성령을 충만케 내주하게 하여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진 후에는 전적으로 순종하였고 어떤 핍박과 방해에도 담대히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만 선포했습니다.    

그가 눈물의 선지자가 된 것은 그 기질이 여리고 성품이 아주 인자했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동족의 죄악과 부패상에 평소부터 너무나 안타까워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로 부름 받기 전부터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 심정에 함께 동참했던 것입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4:19) 전쟁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받았기에 슬프긴 하지만, 그에게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는 마음이 없었으면 이런 외침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그는 부름을 받자마자 말을 못하는 약점부터 실토했습니다. 그런 약점이 없으면 순종하겠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기 싫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아가 평소에 백성들의 죄악을 고발하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지만 말문이 잘 안 터지고 변론을 제대로 주도하지 못했던 경험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역으로 따져 말만 잘하면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게 해주고 싶다는 소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선지자가 되게끔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가장 적합한 자로 당신께서 택하여 준비시킨 후에 그 약점마저 고쳐서 자발적으로 또 담대히 순종 헌신케 한 것입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구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동안에 길가에서 구경하던 애꿎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 십자가를 대신 지는 일을 맡았습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당시 로마 병사가 시키는 일은 식민지 백성이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했습니다. 예컨대 오리까지는 무슨 일이든 심부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라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말하자면 시몬이 십자가를 진 것은 그 일을 싫어하고 전혀 마음에도 없었던 자를 하나님이 강요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는 기본적으로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유월절 절기 기간이었습니다. 그 때에 먼 구레네의 이방인이 예루살렘까지 왔다는 것은 성전에 순례하러 왔다고 봐야 합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인 트라폴리 지방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는 상당히 먼 곳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그 인근에 위치한 구레네에는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이고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을 칭하는 성경의 명칭 예:행13;26)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도 익히 들었고 그 처형 사건의 전말이 궁금해서 길가에서 구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사나 친지 방문의 목적으로 왔을 수도 있겠지만 구태여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 중 하나로 아주 복잡한 시기를 택할 이유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그를 하나님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일을 맡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성경에 그가 경건한 자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있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 15:21) 마가는 그를 루포의 아버지라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바로 그 루포에게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롬 16:13) 루포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시몬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바울로부터 곧 내 어머니라고 불릴 만큼 그를 정성껏 섬기고 그의 사역을 도와주었다는 반증입니다.

현재는 이슬람이 대세인 북아프리카 지역은 초기에는 기독교가 아주 왕성했었습니다. 그 여파로 아직도 에디오피아는 기독교 교세가 우세합니다. 성경의 상기 두 기록에 근거해 아프리카에 유대 회당이 아닌 기독교 교회를 세운 자가 바로 루포와 알렉산더 두 형제를 키운 시몬과 그 아내로 추정합니다.

오순절 성령 사건을 목격하고 베드로의 설교로 회심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은 각기 살던 곳으로 돌아가 교회들을, 최소한 신자들의 모임을, 사도들이 선교하기 전에 이미 결성했습니다. 그 순례객 중에는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행2:10)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십자가 사건에 감동을 받은 시몬이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정황을 살펴볼 때에 하나님은 당신을 전혀 모르고 아무 연관이 없는 자를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프리카에 교회를 세울 계획을 벌써 세우시고 그에 적합한 자로 시몬을 예비했다가 바로 그 때에 골고다 언덕길에 세워두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로마 병사의 눈에 띄게끔 했으며 또 그러기 위해서 체격이 아주 건장했을 것입니다. 거기다 마침 그 장소에 이르자 예수님이 기진해서 쓰러졌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필연이겠습니까?

물론 시몬이 처음부터 자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위해서 순종해야지 하는 생각이 그 자리에서 생긴 것도 아닙니다. 나사렛의 젊은 랍비가 참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연민은 생겼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그야말로 얼떨결에 십자가를 대신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맡긴 하나님의 일은 단순히 탈진하신 예수님을 도와주는 역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갈 수도 있었고, 로마 병사는 다른 유대인에게 그 일을 맡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정말로 맡기고 싶었던 일은 아프리카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미 여호와 신앙을 가진 경건한 자로 예비해 놓았던 것입니다. 나아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직접 대면케 했으며, 틀림없이 성령의 역사로 그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해 열리게 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형장에까지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에 그가 가졌거나 변화되었을 마음의 감회를 추측해보십시오. 틀림없이 그 경건했던 이방인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 그 일로 인해 더 크고 간절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임을 확신했을 것이며, 오순절 성령 사건까지 보았다면 더더욱 아프리카에 최초로 교회를 세우는데 최고적임자였을 것입니다. 요컨대 그를 강요한 것이 아니라, 준비시켰다가 강권적 역사를 통해서 기꺼이 자원하며 순종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요한 유일한 인물 - 요나

성경에서 그나마 하나님이 강요하신 유일한 예외는 요나 한 명뿐일 것입니다. 사악한 도성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당시로선 땅 끝인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능력으로 큰 물고기를 준비해서 살려주고 결국에는 니느웨로 가게 만듭니다. 그는 마지못해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으며, 니느웨 사람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선 끝까지 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께 그 모든 일에 진심으로 승복했는지 여부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습니다.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 내지 추궁으로 기록은 급작스레 끝납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불만을 가졌다고 봐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분통을 터뜨리며 변론했던 욥조차 마지막에는 회개하여 복을 받았다고 끝나는 것과 비교하면 요나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함이 합리적입니다.

요나는 정말로 예외적인 선지자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강요당한 자의 예로 선택된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꼭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당신의 주권으로 반드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아무리 사악하게 타락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나의 입장에선 끝까지 정의로운 심판을 고집하는 자로 선택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의의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섬기는 자였습니다.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 대신에 긍휼을 입는다면 차라리 자기는 죽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큰 풍랑에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큰 물고기에 의해 구출되자 도무지 하나님의 권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 대신 구원으로 이끌려는 뜻에 대해선 여전히 불만이 많았지만, 어쨌든 하나님 명령을 실천하겠다고는 결심한 것입니다.

그가 마지못해 니느웨에 회개하라고 외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결코 쉽게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준 것뿐이며 곧바로  심판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그렇게 믿고 싶었던, 말하자면 자기가 알고 따르는 하나님은 꼭 그래야만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말의 기대마저 무참히 부숴버렸습니다.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욘3:3,4)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순식간에 그 큰 도성에 큰 회개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성의 1/3만 돌았는데도 전 성읍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고”(5절)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인간 신자의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었습니다. 그분은 죄인을 반드시 심판만 하는 정의로운 분이 아니며, 정의 대신에 사랑만 베푸는 인자한 분도 아니라, 참 사랑을 통해 당신의 참 공의도 동시에 실현시키는 완전한 분으로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는 물론 그 지성과 감성을 무시하고 강제로 일을 시킬 만큼 작으신 분이 결코 아닙니다. 또 그렇게 해야만 할 만큼 결핍한 분도 아닙니다. 인간이 먼저 자원하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은 하나님은 벌써 당신의 일에 가장 적합한 자를 선택하시어 그 일에 필요한 재능과 은사를 주어서 많은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준비시킵니다.

선택된 당사자는 장래 자기가 하나님의 어떤 일에 쓰임 받을지 전혀 모릅니다. 또 부름을 받는 방식뿐만 아니라 맡겨지는 임무도 자신의 소원과 계획은 물론 기대와 예상과 상상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인간 쪽의 자발적 동의나 순종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일을 실천하기 전에 생기게 해 주십니다. 로봇이나 허수아비처럼 인간의 자발적 동의와 상관없이 무조건 강요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비록 고달프고 외롭긴 해도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없는 그분의 동역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당신의 주권으로 무조건 일을 맡길 때가 있으니 무조건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오류입니다. 심지어 그런 복종을 개별교회나 목회자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은 너무나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 완전하심, 시공을 초월하는 전지전능하심, 온전히 거룩하심, 사랑과 공의에 모순이 없음, 등등 그분의 성품과 사역의 특성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힘으로 강요하는 일은 그분의 심판에만 적용됩니다. 당신의 일을, 그것도 당신의 동역자로 부르고 준비시킨 이에게 어찌 그 동역자의 기꺼운 동의와 순전한 헌신 없이 시키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가난하고 속이 좁고, 무엇보다 권능이 모자란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8/11/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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