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도 회개하시는지요?

조회 수 62 추천 수 0 2015.07.23 16:07:36

 

 

[질문]

 

회개를 주제로 단계별 설교를 준비하던 중 먼저 신학적인 부분부터 살피고자 벌콥*의 글을 읽었습니다. 벌콥이 구약에 나와 있는 회심을 의미하는 단어 중 '나함'을 언급하면서 이는 하나님에게도 적용이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무척 당혹스럽고 의아해서 히브리어 사전을 찾아 봤고 그것이 분명 회개의 의미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입증을 위해 웹서핑을 하는 도중 하나님도 뉘우치시냐는 물음의 답변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함이란 단어를 구약의 몇 군데서 찾아볼 수 있었고 그때 마다 하나님은 다시 되돌리셨습니다. 다시 돌리셨다는 것은 어쩌면 ‘슈브’라는 단어가 품은 뜻과도 거의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벌콥의 글에 ‘슈브’는 구약에서 회개를 말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뉘우치심. 회개라 말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점이 있어 현재 고민 중입니다. 허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뉘우치시고 새롭게 다시 되돌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목사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드리고 해석해야 할지 무척 난감합니다.

 

[답변]

 

악을 도모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내(여호와)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삼상15:11).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15:29)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32:14)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므로 뜻을 세우시면 절대적으로 선하며 완벽하고 영원합니다. 당신의 심경과 계획에 뉘우침, 돌이킴, 변개, 포기 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기에서 아랫줄을 친 부분이 우리말 번역은 각기 다르나 히브리 원어로는 똑 같이 ‘나함’입니다. 대체로 영어성경은 일관되게 ‘repen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수의 용례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만 인용했습니다.)

 

히브리어 ‘나함’은 심정적으로 유감스럽게 여기고 후회 반성하는 것은 물론 돌이켜서 계획을 바꾸는 행동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앞에서 춤추며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세대를 일으키겠다고 했지만(출32:1-10), 그 뜻을 돌이켜서(나함-출32:14) 심판을 취소했습니다. 단순히 마음만으로 자신의 계획을 후회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시정조치까지 했습니다.

 

거기다 상기 출32:14의 “말씀하신(원래 계획했던) 화(심판)”에서 ‘화’의 원어가 ‘라’(나쁜, 사악한 일, 고난, 재난, 역경 등의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KJV, ASV, RSV 등)은 실제로 ‘evil’(악)로 번역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악을 도모했다고까지 성경이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선(善)이시라 악(惡)과는 아예 공존(共存)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참으로 곤혹스러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인 성경

 

이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몇 가지 사전 지식이 있어야 하며 또 그런 맥락에서만 접근하셔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실체는 어떤 인간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과 행사는 너무나 광대하십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라고 해야 드넓은 해변의 헤아릴 수 없는 모래알들 중에서 겨우 하나 집어든 정도 밖에 안 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그 한 알을 인간으로 들게 허락해주어야만 볼 수 있습니다. 자주 비유하지만 어린애는 아빠가 주먹을 쥐고 있으면 그 안에 동전 구슬 혹은 또 다른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빠의 주먹을 절대 펼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힘을 빼고 손바닥을 열어보여 주어야만 비로소 아이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신학적 용어로 계시(啓示, Revelation)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무리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도 자신의 노력, 탐구, 깨우침, 직관, 지식, 지혜, 능력 등으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당신을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만큼 밖에, 그것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고는, 인간은 그분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계시가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인간에게 알게 해주려고 성경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서만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 또한 그분의 전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성경에 기록된 정도로만 계시하실 것이며 그럼에도 그것만으로 인간의 하나님 이해 적용 순종에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은 성경이 말하는 범위 내에서만 그분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경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당신을 계시했다는 전제를 놓치면 안 됩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실체를 본 자는 예외 없이 모두 죽는다고 선언합니다. 당신을 보여주기 싫은 독선적 폭군이라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절대로 더럽고 추한 것과는 공존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찌든 인간은 그분 앞에 서자마자 순간적으로 타서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대면하여 교제하고(민12:8) 거룩한 율법을 수여 받은 모세마저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 보고 싶어 했으나 직접보지 못하고 겨우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출33:18-23).

 

인간으로선 하나님이 계시해주는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고 또 성경은 그분의 절대적 계시이므로 성경독자는 반드시 그 기록대로 수용하여 온전히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만약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분에 대한 모래알 하나 정도의 지식마저도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아빠 손아귀를 열려고 젖 먹던 힘까지 끙끙 동원했던 아들이 막상 아빠가 손바닥을 열어주었는데도 그 손을 열었다는 사실에만 취해서 아빠가 쥐고 있던 내용물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꼴이 됩니다.

 

질문자의 신앙 수준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원리를 다시 말씀드리는 까닭이 있습니다. 성경이 후회하여 돌이키고 계획을 바꾸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 당신께서 성경독자로 하여금 당신에 대해 알게 하고 싶은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모세가 하나님의 실체적 영광은 못보고 뒤의 등만 겨우 보았어도 그분으로선 당신의 영광의 한 자락은 명확히 보여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모세가 본 것은 그분의 영광의 전부도 실체도 아니었습니다. 영광은 앞으로 비취고 아마도 등은 그 영광의 그림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것이라도 보여주었다면 그 자체가 바로 그분의 온전한 영광이었습니다. 우리와 비교할 바 못되는 모세 같은 믿음의 영웅도 그 정도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그분의 차고 넘치는 영광입니다. 인간 중에는 그 정도의 영광이라도 본 자는 구약에는 모세 밖에 없으며 신약에서도 변화산에서의 예수님 영광을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만 볼 수 있었습니다.

 

신인동형론(神人同型論)적인 표현

 

성경(사실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후회하고, 변개하고, 돌이키는 존재라고 신자에게 계시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건에서 보듯이 마찬가지로 그 계시는 하나님의 실체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런 계시만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간에게 보여주심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니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서 당신을 계시해야만 하기에 그렇게 밖에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이를 두고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c)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행위, 생각, 감정 등을 인간의 그것들에 비추어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런 표현이 다른 종교의 그것 혹은 그와 유사한 요소와는 분명한 구분이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우선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인간과 동일하게 남신 여신이 있어서 서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또 간음하고, 폭행하고, 질투하고, 위계와 모략으로 권력 다툼을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들 신의 본성이자 실체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상상으로 고안해낸 가상의 신들로 실체가 없기에 아무리 사악하게 표현해도 문제 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반면에 성경이 하나님을 인간과 유사한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은 순전히 인간이 그분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창1:28) 범위 내로 한정지어야만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과 완전한 진선미의 일부를 부여 받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지 그분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간단한 예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신다.”고 말하면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도 육안과 지성과 영성이 있어서 사물과 그 배후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뜻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의 할 것은 그분에게도 인간 같은 생물학적 구조를 갖춘 두 눈이 있다고 해석 해선 안 됩니다. 그분의 능력, 속성을 인간에게 견준 것뿐입니다.

 

따라서 인간처럼 묘사된 그분의 모든 행위 생각 감정 등은 절대로 그분의 원래 형상 즉, 단 한 치의 하자나 오류가 없다는 차원에서만 파악하고 이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에 그렇게 기술된 것 자체로 그분의 완전하심을 드러내는 것이지 부족이나 불완전을 드러내려는 의도나 목적은 성경저자(성령)에게 전혀 없습니다.

 

그분이 극도로 진노하고, 당장에 진멸할 것이며, 질투하고 시샘한다는 식의 성경 표현 안에는 인간이 갖는 일시적, 상대적, 이기적, 이해 타산적, 불완전함, 지혜부족, 죄에 오염됨 등의 감정적 이성적 측면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다른 우상에게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당신의 소원과 뜻을 그렇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생각의 변경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

 

궁금해 하신 후회한다, 뉘우친다, 돌이킨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잘못된 계획이나 뜻을 세웠거나, 혹은 실패나 허물이나 죄를 범했기에 유감스럽게 여기고 반성하며 고치려 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의 뜻과 계획은 완벽합니다. 후회나 변개가 절대 없습니다. 생각이나 감정에 불완전한 측면도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행할 해(evil)을 돌이켰다는 것도 당신께서 악한 것을 도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심판을 내리면 이스라엘에게 결과적으로 나쁜 일이 된다는 뜻일 뿐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의 의미를 하나님의 속성을 벗어나서 해석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이 뉘우치고 돌이킨 것은 당신의 불완전한 감정이나 뜻과 계획이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께서 개입해서 일으키는 사건의 흐름이 그렇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당신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관계를 지속 확장 시키는 차원에서만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뉘우침이나 계획 변경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로 자신들의 잘못을 심정적으로 반성하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그 언약관계로 되돌아가게 하려는(히브리어 회개 - ‘슈브’) 경우에 국한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재확인하고서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께 되돌아가면 하나님도 돌이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슈브’해야만 하나님도 ‘나함’하십니다.

 

그렇다고 누차 강조하지만 절대로 그분이 뜻을 돌이키거나 감정적으로 후회한 것은 아닙니다. 아주 쉬운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공부를 독려하려고 주중에는 친구들과 놀지 말고 매일 저녁 식사 후에 밤 열한 시까지 꼭 책상 앞에 있으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한 번이라도 어기면 당장 주말에 완전 외출 금지시킬 것이라는 벌칙을 정합니다. 대신에 그대로 따르면 신형 스마트 폰을 사주기로 아들에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그 약속을 어기고 주중에 친구들 만나러 몇 번 외출하다가 아빠에게 들켰습니다. 아들이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고 주중에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럼 아빠는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줄 테니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말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처음 계획대로 하면 분명히 벌을 내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기에 아빠가 뜻을 돌이킨 셈입니다.

 

그러나 아빠는 처음부터 아들이 몇 번은 어길 줄 알고 세 번 정도까지는 못 이긴 척 용서해주리라 작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아들이 보기에 아빠가 뉘우치고 돌이킨 것처럼 이해될 뿐입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이 필요하고 또 하나님의 뜻도 이런 맥락으로 올바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다신 아빠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맹세를 하니까 아빠가 벌칙을 취소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돌아오니까 하나님이 뉘우친 것입니다. 만약 아들이 아빠 말을 따르기 싫어서 나가서 놀 것이라고 끝까지 고집 부렸다면 아빠도 용서하지 않고 그 약속도 완전히 파기했을 것입니다.

 

인간 부모도 아들을 용서해주고 벌칙을 취소하려고 사전에 계획하듯이,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는 사건의 흐름의 변경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이미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에게 뜻, 감정, 생각, 계획의 뉘우침은 절대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의 관점에서 그것도 그분의 심정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만 변경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해되어졌다는 뜻이며 당연히 후대의 성경 독자도 그렇게 해석해야만 합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그런 뉘우침이 그분의 성품, 속성, 능력, 주권 등에서 단 한 치의 부족함, 불완전함 등으로 이해되어선 결코 안 됩니다. 성경을 앞뒤로 잘 읽어보시면 오히려 그분의 더 큰 은혜와 권능을 반드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7/10/2015

 

* 루이스 벌콥(Rouis Berkhof; 1873-1957); 화란 출신의 개혁주의 미국 신학자, 칼빈 대학교 학장을 역임하고 대표저서로 “조직신학”이 있음

 

** 하나님의 사전 작정에 관해서 본 답변에선 지면 관계로 상세히 다룰 수 없었습니다. 조만간 “예정론을 쉽게 이해하려면?”(가칭)이라는 시리즈 글을 쓰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차후에 그 글들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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