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는 딱 한 가지

조회 수 419 추천 수 0 2017.03.03 07:46:11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는 딱 한 가지

출애굽기 강해 (7)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2:16-25)

 

예수가 배척당한 또 다른 중요 이유

 

많은 신자들이 모세를 자기 신앙여정과는 무관한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적 믿음의 영웅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가 행한 일이 너무 엄청났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의 애굽을 상대로 군대는커녕 무기 하나 없이 혼자 상대해서 10전10승을 했고 마지막에는 치명타도 날렸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인도할 때에 반석에서 생수를 내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전수 받아 이스라엘의 국가체계를 정비했다.

 

거기다 성경이 한 인물을 대상을 네 권의 책으로 설명하는 경우는 예수님 외에는 모세가 유일하다. 신명기 18:18에선 모세 같은 선지자가 메시아로 올 것이라고 거의 예수님과 대등한 위치로 둘 정도다.

 

그러나 모세가 이룬 업적에 스스로가 행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전부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고 그는 하나님의 대행자 역할만 충실히 수행했다. 모세가 예수님을 가장 잘 예표는 할지언정 예수님과 비교될 인물은 아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표적을 베풀었는데도 모세 같은 선지자 즉,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제외하고는 모든 기적의 수혜 대상이 한 개인이었다. 반면에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혜택을 누리는 기적만 일으켰다.

 

실제로 그래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유대인들이 왕으로 삼으려 시도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요구를 거절하자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전체를 회복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미처 몰랐거나 알았어도 인정해주기 싫었던 사항이 하나 있다. 예수님이 베푼 표적은 물론 당신의 인생 자체를 당신이 계획하여 당신이 주도했고 당신의 능력으로 열매 맺었다는 사실이다. 인류 역사상 자기 뜻에 100% 충족하게 인생을 살았던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님이 전무후무 유일하다.

 

반면에 모세는 자기 소망과 계획을 이루려고 자기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으나 정반대로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만큼 굴곡진 인생을 산 자도 드물다. 간단하게 말해 예수님은 스스로 자존하는 하나님이었다. 모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와 성정이 동일하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오늘의 본문이 그 사실을 가장 여실히 증명해준다.

 

모세 인생의 세 시기

 

모세 인생은 알다시피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40년은 바로의 왕자로서 평안하고 호사스런 가운데 최고의 학문과 무예를 닦으며 걱정이라곤 전무했던 시기다. 둘째 40년은 살인죄를 범한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미디안 광야에서 아무 소망 없이 지냈다. 셋째이자 마지막 40년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믿음의 영웅으로 살았다.

 

모세가 우리와 멀리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인생에서 모세의 첫째와 셋째시기에 해당되는 측면이 전혀 없이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볼 꿈도 꾸지 못한다. 따라서 그가 보통 사람으로 평범하게 살았던 둘째시기를 설명하고 있는 오늘의 본문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처음 40년 동안은 동족을 위해 큰일을 하려는 사명감에 불타 삶의 의욕이 충만했을 것이다. 그러려고 성실히 준비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첫째 시도가 무참히 실패하자 기약 없는 도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의 인생은 한 순간에 최고 높은 자리에서 최고 낮은 데로 곤두박질 쳤다. 틀림없이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으로 지샜을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해고, 이혼, 부도, 심지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는 일들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럴 때마다 가만히 눌러 앉아있지 않는다. 단단히 마음을 고쳐먹고 지난 잘못을 회개하여 고치며 각고의 노력 끝에 재기를 한다. 그러는 가운데 인격과 성품도 자란다. 모든 이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갖는 본성적 힘은 그 자리에 눌러앉아 있게 하지 않고 항상 성장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세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비유를 하자면 911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라덴의 처지와 흡사하다. 평생을 도망자로 살아야 하고 미국이 멸망하지 않는 한 재기가 불가능하다. 실제로 그는 10년을 넘게 피신 은둔생활을 했으나 미국이 끝까지 추적해서 응징했다.

 

모세도 애굽이 멸망하지 않는 한 재기는 꿈도 꾸지 못한다. 숨소리도 죽여 가며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 거기다 오사마 빈라덴보다 상황은 더 안 좋다. 그는 피신 중에 이슬람 동지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모세 주변에는 가족들뿐이었다.

 

미디안 족속은 창세기 37:36에서 요셉을 애굽에 노예를 팔아넘긴 사건에서 보듯이 애굽을 왕래하며 장사하는 대상들이다. 모세로선 그 일을 할 수는 없다. 또 장인이 미디안 제사장이고 딸만 일곱 있는 집안의 맏사위 즉, 장남 역할을 했지만 가업을 물러 받을 수는 없다. 아무리 여호와께 불만이 있어도 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할 수는 없다.

 

장인 르우엘의 이름이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이라고 해서 여호와 신앙을 가졌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중근동 셈 어(語)로 ‘엘’은 하나님 내지 신이라는 뜻이다. 당시 우상 신이든 다신교든 모든 신을 엘로 불렀기에 그는 미디안 신들의 제사장이었을 뿐이다.

 

수족이 꽁꽁 묶인 모세

 

모세는 나이가 80이 되도록 들판에서 양만 치고 있었다. 당시에는 기업형 목장도 아니라 정말로 간단한 일을 매일 지루하게 반복했다. 아마도 갑갑해 미쳤을 것이다. 모세가 출생할 때는 하나님의 기적적 은혜와 권능을 체험했다. 바로의 왕자로 40년간을 지낼 때는 동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뭔가 시킬 일이 있음을 확신했다. 지금은 완전히 손발이 꽁꽁 묶인 채 40년을 허송세월하고 있다.

 

애굽에서 도망친 직후에는 본문 16-21절에서 보듯이 혈기가 왕성하고 생의 의지도 펄펄 살아있었다. 양을 치는 일은 힘들고 비천해서 여자들이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이 없다보니 어쩔 수 없이 딸들이 그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남자 목자들이 여자라고 깔보았다. 먼저 우물에서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는데도 쫓아내고 자기들이 물을 독차지했다.

 

그 모습을 도피 중인 모세가 보고는 일어나 다 물리쳤다.(17절) 신분이 탄로 나서 애굽에 밀고 당할 위험이 있는데도 그랬다. 모세는 나쁘게 말하면 성격이 급했고 좋게 말하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인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은 그때까지 뿐이었다. 그가 80년을 살아가는 동안에 동족을 위해 애굽 관원을 죽인 일과 지금 이일 딱 두 번이었다. 그 이후로는 철저하게 은둔을 넘어 고립된 생활을 했다. 아마 초기에는 애굽 관원을 죽였을 때에 조금만 더 세심하게 주위를 살펴서 들키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신세가 안 되었을 것이라고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자신의 급한 성격 때문에 실패했다는 점을 자기도 알기에 미디안 족속과도 혹시라도 충돌이 생길까 염려하여 더더욱 혼자서 지냈을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나님과 씨름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식물인간과 방불했다. 인생에 큰 꿈을 도무지 꿀 수도 없고 심지어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단 하나 없었다.

 

“하나님 이럴 거면 바로의 왕자가 될 때 막아주셨어야지요? 나일 강에 던져질 때에 건져주지 마시고 차라리 악어 밥이 되도록 놓아두시지요?” 욥처럼 “아예 태어나지 말게 해주셨어야지요?”라는 원망까지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분명히 저를 소명자로 세웠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작부터 좌절시킨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라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차츰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도 의심이 들고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대체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각오로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또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일방적인 짝사랑의 외침이었지만 하나님은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이었나? 무려 40년이었다. 아마 처음 몇 년은 열심히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그마저 포기하고 체념했을지 모른다.

 

오죽하면 모세는 자기가 지은 시편 90편에서 인생이 하나님의 분노 중에 날아간다고 말했을까?(9/10절) 또 그래서 인생을 계수할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다.(12절) 나아가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13절)라고 구구절절 자신의 심정을 담아 탄식했다. 그럼 하나님이 모세를 양치는 소년이 아닌 노인으로 내몰고는 40년을 침묵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이 침묵하신 이유

 

오늘날의 신자는 성경을 통해 모세 자신보다 더 그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그래서 첫 40년은 나중에 출애굽 때에 바로와 일대일로 상대를 해야 하기에 애굽의 전문가로 양성시킨 것이다. 본문의 둘째 40년은 출애굽 후에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솔해야 하므로 광야의 전문가로 훈련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과를 다 알고 나서 해석한 것이다. 실제로 모세 본인이 도피 생활 중에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출애굽 같은 엄청난 일의 주역이 될 수 없다. 민족의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 모세를 우리 신앙여정의 동반자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첫째 뜻은 아주 간단하다. 아무리 애굽 관원이 잘못했어도 생명은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 인간이 인간을 정죄해서도 안 되고 살인도 절대 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할 그분의 종이라면 더더욱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모세가 그 자리에서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은 것만도 감사해야 한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은 본문에 그 답이 나온다. 장남을 낳자 이방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으로 게르솜이라고 이름 지었다.(22절) 너무나 처량한 자기 신세에 빗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어지는 23절에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고난으로 탄식하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어디서 고통을 겪고 있는가? 가나안 땅이 아닌 애굽 땅 즉, 타국에서 나그네를 넘어 노예로 신음하고 있다. 모세는 동족의 눈물겨운 참상을 보고 도우려고 나름대로 시도했다. 그러나 그 일은 기껏해야 부자가 자기 쓰고 남는 돈으로 거지에게 적선한 정도밖에 안 되었다. 히브리인들의 한숨과 눈물과 고통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그들이야말로 수족이 묶인 정도를 넘어 완전히 다 잘려나갔다. 아무 소망도 없이 매일 기계처럼 단순 노동으로 지샜다. 모세의 부모 형제 친척들 모두가 식물인간의 상태였다. 그들에게 육신적인 피로는 사실 문제가 아니었다. 소망이 전혀 없는 것, 죽지 못해 겨우 생존만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고 안타까운 일인지 모세더러 조금이라도 맛을 보게 하려는 뜻이었다.

 

동족들은 나면서 죽을 때까지 인생의 전부 100%를 그렇게 지내야 하지만 모세는 겨우 인생의 1/3만 그런 삶이었다. 그것도 노예가 아니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으면서 지내게 했다. 모세는 감히 하나님께 불평, 원망, 불신앙의 자리에 떨어질 자격도 없었다. 간단히 말해 모세더러 동족이 왜 자기를 배척했는지, 왜 살인자로 고발했는지 그 이유만이라도 철저히 깨닫게 해주려는 뜻이었다.

 

하나님은 침묵한 것이 아니다.

 

그럼 하나님이 지금 모세의 기도에 40년간 침묵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모세에게 인생을 계수하는 지혜를 심어주고 있는 중이다.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 당신만의 방법으로 응답한 것이다. 모세가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 행동으로 역사했다. 모세를 계속해서 절망의 코너로 몰아넣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손발을 묶는 것을 넘어 아예 잘라버렸다.

 

그래서 모세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자신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대한 뜻과 계획이 혹시라도 남아 있다면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나를 들어 쓰시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하나님은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모세의 자존심과 세상에서 최고라는 교만을 깨트리는데 40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의 완악한 고집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인생을 그만큼 낭비한 것이었다.

 

지금 애굽에 있는 동족의 영적 상황은 어떠한가? 노예 살이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 후손이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여보내려는 실 날 같은 소망 하나만 붙들고 있다. “그 소망을 하나님의 때와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조건 다 알아서 해주실 줄 믿습니다.”라는 고백 외에는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바로 그런 자리에까지 낮아지도록 깎고 또 깎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40년간을 침묵하지 않았음을 본문 24, 25절이 증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듣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했다고 한다.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가 너무 크고 기도가 너무 간절해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이 났다는 뜻이 아니다.

 

원어의 뜻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출애굽을 시행할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모세를 동족 히브리 노예와 현실적 면을 비롯해 정서적 영적 차원 모든 면에서 완전히 동격화시켰다는 것이다. 그가 동족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순전한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태세가 된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경배하는 모습을 본 모세가 예의 급한 성격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돌 판을 깨트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기가 죽어서 지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제발 동족을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눈물로 매달렸다. 모세로 바로 그런 참 목자로 변화 성장시킨 후에 이제는 출애굽의 역사를 시작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했다는 의미다.

 

도무지 자격 없는 모세

 

개인적 성품과 자격으로 따지면 모세는 도무지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살인자였다. 애굽 왕자로 살았기에 어쩔 수 없이 애굽 우상 신전의 예배에 형식적으로라도 참석했을 것이다. 미디안 제사장의 데릴 사위였기에 마누라 체면 때문에라도 미디안 우상 숭배 자리 곁에 서있기라도 했을 것이다. 우상 숭배하는 이방 족속의 여인과 결혼했다.

 

율법으로 따지면 세 번 이상의 사형을 당해 마땅한 죄인이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율법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가르칠 책임을 맡겼다. 그가 살인했을 때 죽어 마땅했음에도 살려주었다. 살인죄도 용서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그도 이미 들어온 것이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믿는 자를 죽이려고 설쳤고 스데반의 처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살인자였다. 그런 바울을 하나님은 율법과 대조되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가르칠 책임을 맡겼다.

 

하나님은 바울도 그 인생의 전반 약 2/3의 기간 동안에 복음에 대칭되는 율법의 전문가로 양성시켰다. 그러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그 비참한 고통 속에서도 얼굴에 기쁨으로 충만한 모습을 보고 그 동안 영적으로 자기가 최고라는 그의 자부심을 한순간에 하나님이 무너뜨리셨다.

 

결정적으로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3일간 봉사로 만드셨다. 바울의 수족을 다 잘라버린 것이다. 그로 하여금 “이제부턴 무조건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는 고백을 하게 했다. 그를 예수 믿는 신자와 동일한 영적인 위치까지 하나님이 끌어내린 것이다.

 

모세와 바울 둘 다 살인자였으나 하나님은 그들로 있는 모습 그대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변화시켰다. 본인들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연약한 인간임을 철두철미 깨닫게 한 후에 당신의 일에 들어 사용했다. 모세는 예수님과 비교될 것이 아니라 바울과 평행되는 인물이었다.

 

그 둘은 각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신구약 시대의 대표적 종이 되었다. 그러나 둘 다 한창 혈기 왕성하여 인생의 황금 같은 시기에 하나님은 침묵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이었을 뿐이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력하게 역사했었다. 둘 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었던 종이었다.

 

이웃과 동격화 하라.

 

지금까지 모세의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다. 우리 모두는 이방 땅 즉, 불신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다. 미국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현실적으로도 실감할 수 있다. 예수 믿는 신자의 영원한 시민권은 천국에 속한다.

 

그러나 천국 갈 동안의 이 땅의 삶에선 고난이 그치지 않는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침묵을 넘어 부재하는 것 같은 경우가 종종 있다. 특별히 이민 초기에는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더 잘 나갈 수 있었을 텐데라는 후회를 많이 한다. 하나님이 왜 이런 막다른 골목 같은 곳에 밀어 넣으셨는지 의심되고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갈등이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자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미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제약이 있다. 내 인생에 큰 성취를 하려고 해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함을 알기에 미리 힘이 빠지는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대체 무엇인지 다시 새롭게 혹은 계속해서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러시는 뜻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모세처럼 우리의 수족도 꽁꽁 묶어서 식물인간으로 만드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문자 그대로 타국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원하는 것은 딱하나 뿐이다. 많은 신자들이 흔히들 하나님 왜 저를 아직도 이 모양 이 꼴로 두느냐는 불만을 갖는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 모양 그 꼴로 두는 것이고 또 그런 것을 신자더러 알게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신자를 일부러 어렵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좌절시키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기 잘난 것, 의로운 것, 힘 있는 것 모두 철저히 다 부수어서 하나님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저를 들어 사용해달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고백이 있고난 후에 비로소 당신의 일에 들어 사용하신다. 바로 그것 즉, 손발이 꽁꽁 묶여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신자가 누리는 그분의 참 은혜요 권능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히브리 동족의 비천한 자리까지 동격화 시키신 것처럼, 또 그러기 위해서 모세가 느끼기에는 침묵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똑 같이 그렇게 하신다. 우리더러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 불신자 직장동료 교회성도들 최소한 자기 남편 아내 자식들보다 자신을 완전히 더 낮추는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하시고 또 그 때까지는 겉으로는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가서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고백하는 순간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위로와 능력으로 채워주시고 모세 같이 당신의 일을 충실히 대행케 해주신다. 그 길 외에는 신자가 아니 모든 인간이 인생에서 승리하는 길은 결코 없다.

 

2/1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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