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어느 여름날,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떤 ‘날날이 학생’(^_^;;)이
세계의 도시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원대한 꿈을 안고 상경한 것도 아니요,
비상한 성공 아이디어가 있어 ‘열심히 살아보자’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내가 놀던 Iowa 시골 땅은 너무 좁아서, 아니 더 놀게 없어서
‘한번 제대로 놀아보겠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린 자식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신학 공부 한다 하면 보내주겠다’는
엉뚱한 제안을 하셨고,
그 제안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네!!’ 했던 그 못난 자식은
그 후 10년 넘게 신학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몰래 조종(?)해 오신 하나님을 천천히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 못난 자식이 깨달은 하나님은 이러했습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못난 자식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그것이 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좋은 것을 가장 싫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은 대놓고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아주 삐뚤어졌을 테니깐요.!! ㅋㅋ
그래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못난 자식의 삶을 천천히 움직이셨습니다.
때로는 못난 자식이 느끼도록, 때로는 못 느끼도록...
때로는 못난 자식이 멍청하게 좋아하며 따라오도록,
또 때로는 죽으라 싫어해도 강제로 밀면서...
그렇게 천천히 그 놈을 인도하신 결과,
그 못난 자식은 이제 ‘주님 없인 살 수 없는 못난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못난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못난 자식은 그 예수님을 싫어했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못난 자식을 너무 사랑해서 ‘예수님’을 안 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은 그 못난이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예수님이 내게 가장 소중한 분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궁금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받기 싫다고 떼를 쓰고, 욕을 하고, 일부러 딴 짓을 했는데도,
하나님은 왜 나를 버려두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주신 것일까?
답은 단 하나, 바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오늘도 이 못난이는 하나님께 100%의 영광을 돌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이 못난이에게 예수님을 사랑하고픈 마음이 0.0001%라도 있었다면
못난이는 100%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못난이 스스로가 예수님을 믿는데 적어도 0.0001%의 수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못난이에게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100%의 영광과 찬양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
예정론이 맞는지 예지 예정론이 맞는지는 지식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얼마만큼의 영광을 돌리느냐’가 주된 문제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느냐 아니면,
나의 구원에 있어 나의 어떤 행위나 공로가 0.00000001%라도 인정되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0.000000000001%의 가능성은 곧 하나님께 그만큼 부족한 영광을 드리게 된다는 것이며,
부족한 것만큼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게 영광을 돌리는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돌리느냐 돌리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되고,
또 그 믿음이 신자의 어떤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면,
필연적으로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한 어떤 사람들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성경적 사실입니다.
‘그럼 아무 짓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
글쎄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해 할지.. 사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고백은....
그 사람들의 억울함 때문에 하나님을 비난할 순 없습니다.
그 사람들 편 들어줘야겠다고 100%인 하나님의 영광을 반쪽짜리로 만들 순 없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나를 위해 고생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을 반쪽짜리 사랑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설령 그렇게 억울하시다면 차라리 저를 욕하세요.
저는 욕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저를 욕하셔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반쪽으로 나눌 순 없습니다.
이것이 부족한 못난이의 주관적 고백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정론’을 소중하게 아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