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건강하신지요...^^
오랜만에 질문드릴게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불신자들이 얽히고 섥히며 살아가는데요
저마다 다양한 성격, 능력, 기질, 직업, 취향 등등을 가지고 있고 그런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데 하나님께서 미래에 구원을 예정하신 불신자가 아닌 관심이 별로 없으신 불신자의 경우 물론 하나님께서 이루신
자연피조물 세계에서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걸 떠나서 직접적으로 그들의 삶에 개입을 하시는지
어느정도 어떤 영역들에 개입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갑자기 이게 왜 의문점이 들었냐면 전세계적으로 정말 수도없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 수 있으려면 분명 절대
자이시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아무리 불신자이지만 삶에 개입을 아예 안하신다면 이 세상이 과연 이정도로 유지
될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기도 해서요.. 그리고 참새한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떨어지는 법이 없다라는 내용의
성경구절도 생각이 나네요...
원칙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격 기질 능력 등이 타고난 운, 랜덤(우연)이라는 표현은 부족합니다. 선천적으로 부모에게 물려 받은 것과 후천적으로 환경에 영향을 받고 또 자신이 노력한 것의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일반은총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궁국적이고 광대한 주권과 섭리하에서 이뤄집니다. 말하자면 불신자의 삶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개입 없이 전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이뤄지지만 하나님이 인류 전체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데에 그들의 삶과 인생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는서로 상충되지 않으며 신자의 인생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원리에만 초점을 맞추시면 됩니다.
신자와 불신자를 정확하게, 기계적으로 가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교회 다니고, 입으로 믿음을 고백한다고 해서 다 신자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과 끝을 모두 아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유일하신 분만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실 뿐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자기 자신의 믿음조차도 함부로 확신하면 안됩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며, 우리는 다만 악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신자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를 그 대상으로 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도 그렇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누구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뿐, 육신의 본성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기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졸리면 자야 하고, 배고프면 먹어야 합니다. 육신의 본성이 악하다는 이유로 자지 않고 먹지 않으면 누구라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한없이 어리석고, 또 한없이 탐욕스러우며, 한없이 이기적이라는 사실도 잘 아십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도,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미함으로 각 사람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모든 이에게 죄를 깨닫고 악에서 벗어날 길을 주시지만 완악한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거부할 뿐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믿음과 고백은 우리의 신념이나 동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참으로 알게 된 자의 자기부인이 전제되지 않은 믿음과 고백은 이사야서에 기록된 바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신자의 삶에도 신자의 삶과 마찬가지로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방언을 하게 하거나, 병을 고쳐주거나, 세상일을 형통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깨닫고, 스스로가 악이라는 진리를 참으로 알게 하기 위해 그 삶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점점 완악해진 애굽의 바로처럼, 사십년 광야생활을 하면서도 끝내 돌아서지 않은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외면하고 피하고 모욕합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다르지 않습니다. 육신의 소욕이 채워질 때면 만족하고 감사하며, 그 반대일 때는 절망하고 저주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법에 사로잡혀갈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예수 믿고 교회 다녀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아무리 잘 믿고 열심히 다녀도 소용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자신을 사망에 매인 비참한 존재라고 한탄했고,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거듭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를 자의적으로 나누다보면 이방인과 자신들을 철저히 구별하며 스스로 의로워졌던 유대인들의 치명적인 잘못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기에 죄로부터의 구원자는 필요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신자인 우리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되어 환란과 핍박에 처해 있어야 마땅한 성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원하고 나아가 세상의 형통을 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자와 같은, 아니 불신자보다 더한 악한 행위입니다.
신자와 불신자, 거듭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에 매여 있고, 다른 사람은 커녕 자기 자신의 중심조차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인생은 주님것님께 성령의 인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샬롬!
신학적으로 논의하자면 복잡하고 끝이 없는 예정과 섭리에 관한 질문입니다.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기에 궁금해 하시는 내용을 몇 가지로 구분해 간단하게 알기 쉽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는 법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비유이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됩니다. 참새 한 마리마다 죽을 때까지 일일이 모든 것을 계획 주관한다는 것이 아니라 참새가 생육 번성할 만한 모든 여건을 마련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새보다 더 귀한 제자들을 앞으로 핍박이 닥칠지라도 당신의 뜻 안에서 믿음으로 이겨나가도록 힘주시고 또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십니다. 설령 순교를 당해도 순교를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그러니까 전혀 두려워말라는 뜻으로 그 비유를 말한 것뿐입니다. 마10:24-33의 전체문맥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맞추어 해석해야 하며 비유로 사용된 말씀에 주목할 필요는 없습니다.
- 불신자에게도 하나님은 “이루신 자연피조물 세계에서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게”(일반은총) 해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겐 아담의 타락으로 원죄 하에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타락으로 불완전하고 상대적이 되었지만 윤리적 양심과 뛰어난 지성으로 인간사회에 통용되고 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진리를 깨우쳐서 훌륭한 업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이는 영혼이 죄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과는 무관하며 인간 공동체의 물리적 정서적 발전에만 기여할 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에 전혀 개입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이 정도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이성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이나 간섭과 상관없이 본인의 분별 선택 판단 결정 시행에 맡겨져 있습니다. 구원의 예정 밖에 있는 불신자의 인생에 하나님은 일반 은총 외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기 뜻과 계획대로 살다가 그 생을 마칠 뿐입니다.
- 구원으로 예정된 신자도 인간 쪽에서 보면 자기 의지와 이성으로 모든 일을 자기가 판단하고 결정 시행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완벽하고 광대하신 주권과 섭리로 가장 먼저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 일로 인도하고 구원 후에는 당신의 종으로 충성하도록 모든 일에 개입 간섭 인도하십니다. 신자는 자기가 가는 길을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 줄을 확신하고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면서 시행하면 됩니다. “알기 쉬운 예정론”의 글들에서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는 절대 상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