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도피성에 숨는 신자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찌니라.”(출 21:12-14)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후 그 구체적 적용에 관해서도 계시하셨습니다. 제 육 계명인 “살인하지 말지니라.”에 관해 고의적 살인과 우발적 살인으로 나눠 각기 처벌을 달리했습니다. 고의적 살인은 반드시 사형시켜야 하나 우발적 살인은 도피성을 두어 정당한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으로 피신했다고 무조건 살려줄 것이 아니라 전후사정을 잘 조사해 추후에라도 고의적 살인동기가 발견되면 마찬가지로 사형시키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우발적인 살인에 대해 성경 기자는 아주 흥미롭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이면”이라고 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로 살인하게끔 허락했다는(God let it happen.) 뜻입니다. 그럼 그 죽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까? 당신께서 심판할 자를 아무 영문도 모르는 한 인간을 이용해 우발적 살인으로 이끈 것입니까? 그래서 그 살인자는 아무 책임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군이 된 셈입니까?
이 모든 질문의 답은 단연코 “No"입니다. 인간만사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성경기자의 신앙 인식을 드러낸 표현일 뿐입니다. 또 성령의 영감으로 그런 기록을 성경에 남기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기록케 했다고 해서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비밀스럽고 교묘한 방법으로 살인을 시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사가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 아래에 있다고 믿었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물론 구약성경을 읽는 현대독자들의 믿음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욥기에서 보듯이 하늘 위에서 일어나는 역사의 구체적 경과를 하늘 아래 땅에 갇혀 사는 인간으로선 결코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때로 숨은 죄가 있는 어떤 이를 다른 이의 우발적 살인으로 심판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음흉하게 숨어서, 그것도 당신께서 가장 귀하게 지으신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없애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뜻을 당신의 백성이 명료하게 알 수 있도록, 최소한 그 해법의 열쇠는 계시해 주십니다. 그 계시의 절정이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와 성경 66 권입니다.
그 두 결정적 계시에 드러난 인류를 향해 품고 계시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이미 모든 인간이 원죄 하의 타락한 상태로 태어나기에, 조금 어폐가 있긴 하지만, 심판은 당신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시행하면 됩니다. 아니 원죄 하에 태어나서 타락한 상태 그대로 사는 것이 이미 심판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그분의 관심이 인류 전체로나 개인적으로나 오로지 죄에서 건져내는데 모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골고다의 십자가에 벌써 달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 하나님일 뿐 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고 유지하고 활동하게 되는 모든 힘도 그분께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보존 증식시켜주신다는 단순한 뜻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또 당신께서 주관하는 그 모든 일이 무작위적, 우발적, 순간적, 무계획적으로 향방 없이 이뤄진다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이 서로 상관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반드시 당신의 거룩하고도 영광스런 목적을 향해서만 움직여지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분의 자녀로 부름 받은 신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그 목적을 세상 앞에 증거, 실현케 하는 방식을 통해서 말입니다.
또 다시 우발적 살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 양 오해 마십시오. 그보다 도피성 제도를 통해 고의적 혹은 우발적 살인임을 엄밀히 가려서 그에 합당하게 치리하는 것이 바로 신자가 세상 앞에 드러낼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고의적 살인일 경우는 조금치의 아량과 긍휼을 보이지 말고 곧바로 처형하라고 합니다. 반면에 우발적 살인일 경우는 긍휼을 베풀어 그 실수한 자의 생명을 끝까지 지켜주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을 대행해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려야 할 소명을 부여하였기에 당신께서도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인간이 경시, 무시, 거부, 포기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 완전하게 의롭고 진실하며 아름다우신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는 모든 것은 선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귀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기에 살인 혹은 자살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중한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동일한 맥락이면서도 현대인이 보기에도 놀라운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라.”(16절) 사람을 후린다는 것은 강제로 납치(kidnap)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후에 다른 사람에게 팔면 인신매매이고, 자기 수하에 두는 것은 앵벌이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반드시, 아주 강조하면서,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이 계명은 다른 이의 생명을 중히 여기라는 간단한 뜻이 아닙니다. 인신매매나 앵벌이는 고통스럽긴 해도 죽음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니 둘 다 노예로 삼아 실컷 부려먹어야 하기에 가능한 오래 살려두는 것이 더 이익입니다. 따라서 이는 다른 이의 인격을 강제로 빼앗아 팔아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격은 마음과 영혼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은 물론 영혼도 아주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또 인간의 생명은 육과 영이 합쳐져야 온전해진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아주 귀하게 여기시기에 당신의 자녀들은 이 땅에서의 장막이 없어져도 더 좋은 천국에서 당신의 사랑으로 그 영혼을 영원히 품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인죄 저지른 자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전혀 상반되는 방식으로 취급했습니다. 고의적 살인인 경우는 그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 멸하는 벌을 내렸습니다. 반면에 우발적 실수면 영혼은 물론 육신까지도 살려주었습니다. 그것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는 것이 상식이자 관습이었던 시대에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사건과 행동의 결과로 판단하지 않고 그 내적 동기에 따라서 정죄하십니다. 모든 죄는 인간의 마음 즉, 타락한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지 외부적 환경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죄인이라서 죄를 짓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그 구원의 방도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그 사람 자체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은 용서받지 못할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으시고 부어주신 생명과 영혼을 빼앗는 벌을 주십니다. 더러운 죄에 대해선 너무나 엄격하십니다. 그와 동시에 용서 받을만한 자에게는 끝까지 긍휼을 베풀어 생명마저 되살려 주십니다. 본문처럼 실수로 범한 죄를 지은 자뿐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고 철두철미 고백하며 겸허하게 당신의 긍휼을 소망하여 엎드리는 자들을 말입니다.
언뜻 하나님은 마치 야누스처럼 한없이 두렵고, 또 한없이 자비한 두 얼굴을 가진 것 같습니다. 경우에 따라 그 양면의 가면을 번갈아 쓰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공의와 사랑이 합쳐져 당신의 완벽한 초상화 하나로 그려진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죄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너무나 엄격한 공의의 하나님이라야 죄인의 온전한 회개와 경외를 받기에 합당합니다. 그와 동시에 당신께서 그 죄의 형벌을 대신 감당하신 십자가라야 모든 죄인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됩니다. 나아가 그 십자가 앞에 온전히 엎드리어 당신의 용서를 받은 자라야 그 사랑에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자는 오히려 인간입니다. 남의 눈의 티끌은 보아도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다른 이의 죄는 과대평가하여 엄격히 심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죄는 과소평가하며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합니다. 착한 자가 천국가야 하며 자신은 얼마든지 그럴 자신이 있다고 큰 소리 치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가 살인죄를 고의적 혹은 우발적으로 짓느냐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의 육신과 영혼 모두를 멸망에서 건져주는 십자가 도피성이 나에게는 전혀 필요 없다고 큰소리치는 자와, 오직 그것만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라고 겸허하게 고백하는 자로만 나뉩니다.
거기다 참 신자와 거짓의 차이도 바로 십자가 도피성으로 나뉩니다. 쉴 새 없이 우발적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때로는 고의로도 짓는 신자에게 주님의 십자가 외에 도피할 곳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십자가만이 신자가 된 후에도 평생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은혜의 근원입니다.
6/16/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