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11 3:13-18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조회 수 973 추천 수 0 2017.03.25 14:21:37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출애굽기 강해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출 3:13-18)

 

 

모세 질문의 의도

 

팔십년의 침묵을 깨고 나타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애굽의 소명을 주셨다. 그리고 출애굽한 후에 시내 산에서 당신을 예배드리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제시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에게 동족이 나에게 너를 보낸 신이 누구인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언뜻 보면 불신앙 같으나 그렇지 않다.

 

모세가 출애굽 소명을 듣고서 염려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애굽으로 돌아가면 즉시 체포되어 사형당하리라 생각했다. 이는 하나님이 정녕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나중에 시내 산에서 예배드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둘째 동족이 나를 미워할 것이라는 불안에 대해서 하나님은 확답을 하지 않았다. 모세로선 다시 구체적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이 그 질문에 답한 것이 본문이다.

 

그런데 본문에 따르면 마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물론 애굽에 있는 그 후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모세에게 네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이 뭔지 말해보라고 묻고 모세가 여호와라고 대답하면 목사고시에 합격한 것처럼 지도자로 인정해 준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 또한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힌 것은 모세가 처음이자 유일하다. 만약 히브리인들이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면 모세의 생모가 안 가르쳐주었을 리가 없다. 또 아무리 8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동족을 위해서 살인까지 했고 지난 40년간 하나님과 씨름했던 그가 그 이름을 잊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 아는 것으로 지도자로 모신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모세는 바로의 왕자로 40년, 미디안 제사장의 맏사위로 40년을 살았다. 히브리인들로선 그가 알게 모르게 우상숭배에 참여 내지 오염되었을 가능성을 반드시 따질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평생을 고생다운 고생을 겪지 않았다. 먹고 입는 것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그가 과연 애굽을 탈출하여 언약의 땅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과 의지가 자기들만큼 절박한지 궁금할 것이다.

 

모세로선 동족들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 언약을 실천할 의지도 충분하다는 것을 소명할 필요가 있다. 어렸을 때 생모에게 교육을 받긴 했지만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지접 확인하고픈 것이다.

 

모세의 질문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하나님은 그에 초점을 맞추어 자세히 언약을 풀어 설명해주었다.(15-17절) 이어지는 18절 서두가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모세는 하나님에게 “나를 미워하는 동족을 어떻게 하면 설득시킬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고 하나님은 그에 대한 답을 해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없다.

 

그럼 왜 성경은 창세기에 이미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매 그를 의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성경은 창세기 2:4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고 여호와를 최초로 언급하고 있다. 에덴동산의 아담도 그 이름을 알았다는 뜻이다. 그럼 모세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알았다면 이상하지 않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창세기도 모세가 기록했기 때문이다. 모세가 본문에서 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그대로 모든 경우에 다 사용한 것이다. 아담이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아서 아벨, 셋, 에녹, 노아, 아브라함에게 전해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는 몰랐다.

 

본문에서 어떻게 된 경위인지 살펴보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하나님에겐 이름이 없다. 이름이 있을 리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인간이 함부로 그분께 이름을 붙이려 시도해서도 안 된다.

 

인간의 언어로 아무리 고상하고 신령하고 거룩하게 표현을 한들 그분을 완전히 묘사하기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의도하지 않았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럼 결과적으로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르쳐준 이름인 “스스로 있는 자”(14절)는 영어와 한글 성경의 번역일 뿐이다. 히브리 원어의 뜻은 조금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모세가 지금 “하나님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럼 “내 이름은 여호와다.”라고 답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영어로 치면 그냥 “I am.”이었다. 히브리 원문으로 일인칭 주어와 be 동사로만 대답했고 그것을 그대로 발음하면 ‘야훼’가 된다. 그것을 영어로는 ‘Jehovah’로, 우리말로는 ‘여호와’로 음역(音譯)한 것이다.

 

한국어로 원문대로 정확히 번역하면 “내다”가 된다. 영어성경에 “I am who I am.”이라고 번역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본래 의도를 살리면서 문법적으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who I am”이라는 보어절을 추가한 것이다. 한글성경은 영어성경을 기본으로 번역했기에 그 의미를 살려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름이란 원래 고유명사다. 하나님의 경우도 죄송하지만 “박 누구누구”라고 말했다면 모세가 본문을 비롯해 모세오경 전체에 그대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당신의 속성을 설명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왜 구태여 ‘내다(I am)’라고 대답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통성명(通姓名)할 수 없는 관계

 

전래동화에 비유해보겠다. 엄마가 읍내에 볼일을 보러 외출하면서 아이들에게 문 잠그고 집안에만 있고 누가 문 두드리더라도 절대 열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어린아이들만 집에 있는 것을 눈치 챈 늑대가 문을 두들겼고 아이들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엄마다’라고 했다. 목소리가 너무 굵어서 엄마가 아니니 문을 열어 줄 수 없다고 아이들이 답했다.

 

다시 늑대가 문을 두드린 후에 가느다란 목소리로 바꿔 ‘엄마다’라고 답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아이들이 작은 문틈으로 팔을 넣어보라고 했더니 털이 복슬복슬해서 열어주지 않았다. 정체가 탄로 난 늑대는 더 이상 문을 두드리지 않고 밖에서 계속 으르렁거렸다. 공포에 질린 남매는 손을 잡고 어서 빨리 엄마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밤이 깊어지자 늑대도 잠을 자는지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그쳤다. 엄마가 한 밤 중에 돌아와 문을 두드렸다. 아이들이 누구냐 묻자 엄마는 어떻게 대답했겠는가? “엄마다!”라고도 하지 않는다. 대체로 그냥 “내다.”라고 답한다.

 

설령 ‘엄마다’라고 대답했어도 거기에 대놓고 엄마인지 아닌지 도저히 믿을 수 없으니 이름을 대라고는 하는 아이는 없다. 음색, 억양, 말투만으로도 단번에 엄마인줄 안다. 엄마로부터 ‘내다’라는 대답을 들은 아이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그들이 느낀 안도와 기쁨은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이름이 필요 없다. 구태여 이름을 알 필요가 없는 유일한 인간관계다. 한국에선 부모의 성함을 입에 담지도 않지 않는가? 제가 자랄 때만 해도 한창동안 부모님의 이름을 몰랐다. 한글을 깨우쳐도 안 가르쳐 주었다. 초등학교 입학하여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할 때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았다.

 

그 때까지 부모님 이름을 몰라도 저에게 그 두 분은 세상에서 유일하고 최고이며 저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항상 ‘내다’라고 하며 다가오는 아빠 엄마였다. 자식이 부모의 이름을 안다고 그 관계가 더 풍요해지고 모른다고 더 부족해지지 않는다. 이름과는 전혀 상관없는 관계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내다!’라고 대답하신 문맥상의 이유도 지금 설명 드린 것과 같은 의미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출애굽의 소명을 계시해주었다. 비록 그에게 순종할 소망은 있었어도 당장 자기 목숨이 걸린 문제라 “내가 누구관대 그 큰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제 사정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다.

 

하나님은 그래서 정녕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나중에 시내 산에서 예배드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대답은 바로 모세가 말한 그대로를 받아서 “내가 누구관대 네가 의심 주저하느냐?”의 뜻이었다. 지금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 의미를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내다. 내라니까!(I am who I am.) 네가 내 이름을 알고자 하는데 그 이름을 아는 것과 출애굽 소명을 실현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너와 통성명을 꼭 해야 하는 사이냐? 네 부모하고도 통성명하지 않지 않느냐? 네가 40년간 실망과 의심과 불만을 잔뜩 품고 양을 치며 다니던 길목에서 떨기나무로 서서 항상 지켜보던 바로 내다.”

 

모세로선 애굽에서 비참하게 노예생활을 하는 동족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당장 출발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굽으로 돌아가는 일은 아이가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밖으로 문 열고 나가는 것과 같다. 그의 불안과 염려를 아시는 하나님이 지금 ‘내다’라고 바로 그 어머니처럼 답을 하고 나타나신 것이다. “애굽의 늑대를 보지 말라. 그 늑대를 보면 염려가 생긴다. 내다. 나를 보라. 내가 그 늑대보다 적느냐?”하면서 말이다.

 

아담도 하나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서두에서 히브리 선조들과 노아나 아담이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가르쳐 준 적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실은 잘못된 설명이다. 여호와라니까 혼동될 수 있다. 본문처럼 ‘내다’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 모세에게 하듯 직접 대화로는 아니었지만 아담 이래 당신께서 택하신 모든 믿음의 자녀에게 당신의 이름을 ‘내다’로 알려주었다.

 

로마서 1:19,20이 어떻게 선언하는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사람의 속에 보여서 알고 또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과 능력이 그 만드신 만물 가운데 보여서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 수 있기에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한다고 했다. 대자연의 기묘함, 정밀함, 장엄함, 아름다움, 엄청남, 신비함을 바라보면 그 배경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바로 ‘내다’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핑계치 못한다고 했다. 자연을 보고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인간도 아니라는 뜻이다. 또 그럼 하나님과 아무 관련이 없기에 그분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 다윗은 시편에서 어떻게 고백했는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른다고 했지 않는가?(시19:1-4)

 

나아가 누구라도 죄를 지으면 피해본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고 전부 다 보상했음에도 스스로 자신이 너무 부끄럽게 여겨진다. 또 절대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공통적 현상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닮게 인간을 창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모세처럼 구태여 ‘내다’라고 직접 말씀하지 않았어도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이름 야훼 즉, “내다”라는 이름으로 인식되어졌다. 마치 부모의 이름을 알고 모르고 전혀 상관없이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부모 또한 자식을 사랑하며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주는 것과 같이 말이다.

 

거기다 모세가 오경을 기록하기 전의 모든 인물들에게 하나님은 직통 계시를 하셨다. 노아가 사람들의 멸시와 핍박을 받으며 묵묵히 100년 간 방주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듣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또 하나님이 직접 대화하는 인간 상대에게 구태여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줄 필요도 없다.

 

히브리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칭호를 중히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아에게 직접 말씀하신 하나님이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타락한 악의 도성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동일한 음성으로 불러내셨던 하나님과 같다 뜻이다. 그분이 또 요셉까지 네 족장의 인생 전반을 출생에서 죽음까지 직접 개입주도하셨고 그분의 보호 인도가 없었다면 한 시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고백이다. 그분과의 동행하는 삶의 은혜로운 체험이 너무나 놀랍고도 감사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초라하고 연약한 가문에서 출발했다. 신명기 7:7이 선언하듯이 가장 적은 종족이라 선택되었다. 그런 그들을 복의 근원으로 삼았고 그 후손을 하늘의 뭇 별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비록 지금 노예생활을 하지만 이백만이 넘게 창성했다. 그 약속의 일부가 이뤄졌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반드시 기업으로 소유케 될 소망도 끝까지 놓지 않고 있다는 뜻이 그 이름 안에 포함되어 있다. 바로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히브리어의 뜻도 부부가 성적교섭을 통해 상대를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실제 체험을 통해 정확히 안다는 것이지 않는가?

 

세상에 없는 따뜻한 음성

 

모세는 팔십 평생에 하나님의 살아있는 은혜와 권능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다. 나일 강에서 건짐을 받았지만 신생아 때였다. 기억이 전혀 없어 자신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없다. 팔십 년이 지나 드디어 하나님이 모세에게 임재 했지만 떨기나무 불꽃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정확히 말해 그러니까 더더욱 그에게 “내다.”라고 직접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어떤 존재나 힘이 절대로 부인, 감소, 수정,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 안으로 그를 품어준 것이다. “나는 네 아버지가 될 것이며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가 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바로 ‘내다’인 것이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그 동안 계속 침묵하셨다. 그에게 세상을 방임하고 멀리 초월해 손을 놓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를 살인죄로 심판하는 두려운 하나님으로만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반대였다. 늑대가 으르렁거리니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아이들에게 ‘내다’라고 하신 엄마처럼 너무나 따뜻한 음성으로 모세를 만나주셨다.

 

서두에 제가 “내다. 내라니까”라고 설명 드린 것은 영어성경 번역의 의미를 살려서 강조하려는 표현이었을 뿐이다. 사실은 잘못된 설명이다. 히브리 원어에는 아예 뒷부분 ‘내라니까’는 없고 오직 ‘내다’ 뿐이었다. 모세를 향한 그 말씀 안에 짜증, 미움, 분노, 어떤 부정적 감정이나 의미라고는 추호도 내포되지 않았다.

 

대신에 모세가 팔십 평생 지니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불신 불만 원망 의심 모든 것을 한순간에 녹아내리게 만드는 사랑이 충만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이제부턴 정말 동족을 위해 목숨 걸고 완전히 헌신하겠다고 결심케 만드는 성령의 권능만 넘쳤다. 당신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당신의 발걸음이 굽어 구원이 지체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모세도 남은 40년의 여생 동안에 자기를 위하거나 높이고 증명하는 일은 단 하나 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

 

예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먼저 육신의 아비 요셉이 천사의 계시를 받아 붙인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여호수아’라는 고유명사 이름이 있다.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사역할 동안에 인간 사회에서 통하는 이름이었다. 하나님으로서의 이름이 아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제자들을 배에 태워 호수 저편으로 먼저 보내고 당신은 혼자 따로 기도하러 갔다. 한 밤중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멀리서 사람의 형체를 한 물체가 제자들을 향해 바다 위롤 걸어왔다. 먼저 간 배를 따라잡아야 하니까 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제자들은 귀신인가보다 여기고 공포에 질렸다. 그 때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요6:20)고 했다. 이때 주님은 당시 아람어로 말했지만 분명히 일인칭 주어와 Be 동사로만 즉, 본문처럼 ‘내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선포했다.(요5:25) 이는 마지막 심판 때의 성도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지금 모세는 죽은 자와 다름없었다. 사십년의 침묵을 깨고 떨기나무 십자가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내다’라고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감당하시고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바로 그 부활의 영광에 모세를 동참 연합시킨 것이다. 모세로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게 한 것이다.

 

요한복음 10:3에선 주님은 양들은 참 목자이신 당신이 문을 열면 그 음성을 들어서 인도함을 받는다고 했다. 반면에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한다고 했다. 양은 목자 이름을 알 수도 없고 알아야 아무 의미가 없다. 양들은 목자 이름은커녕 음성만으로 아니 기침이나 어떤 신호만 들어도 목자인지 알 수 있다.

 

자식들도 부모의 이름과 음성은 물론 기침 소리만 들어도 알듯이 말이다. 반면에 부모는 자식이 여럿이니까 이름을 각기 불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과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넘치는 사랑과 권능으로 보호 인도해주어야 한다. 각자 이름을 알고 부르듯이 모든 자식을 오직 하나 있는 자식처럼 일대일로 동일한 사랑으로 대한다. 자식 사이에 더 편애하거나 덜 사랑하는 법이 없다.

 

예수님은 정확히 모세야, 모세야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다. 모세는 고유명사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듣지 못했고 들을 필요도 없었다. 단지 ‘내다’라는 한 가지 단어로만 즉, 그분의 음성만으로 충분했다. 모세로선 40년이나 생이별한 부모를 다시 만나는 것 이상의 기쁨과 감격이 넘쳤을 것이다. 우리말 호칭이자 본문의 번역인 ‘하나님’에는 참으로 중요한 뜻이 많다. 언젠가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나 가장 기본적인 뜻 중의 하나는 세상에서 이름이 있을 필요가 전혀 없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모세도 드디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무슨 의미인지 하나님과의 일대일 대면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살아있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으로 역사하는 분임을 깨달았다. 네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이 항상 함께 했던 하나님이었다. 바로의 궁정에서 이상야릇한 신분인 왕자로 40년 지냈고, 미디안에서 보잘 것 없는 양치기로 40년 지내면서 정체성마저 상실했던 그였다.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서 앞으로는 안심하라 절대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본문에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답하신 뜻이다.

 

여호와 이름의 놀라운 신비

 

그런데 이 여호와(내다)라는 이름의 신비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여호와라는 문자를 벗어나 ‘내다’를 염두에 두고 접근해보자.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이방인들에겐 여호와는 이미 고유명사적 의미로 고착되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그 깊은 의미도 오늘의 본문을 배워야 겨우 안다. 교리로 이미 배워 알고 있는 자도 평소에는 잘 잊는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볼 때는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그 수많은 야훼라는 이름이 다 ‘내다’라는 의미로 보이고 들리지 않겠는가? 얼마나 엄청난 은혜로 다가오겠는가? 거기다 출애굽을 통해 그분의 너무나 큰 은혜와 권능을 생생히 체험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택한 백성이라는 인식이 철저하고도 견고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사기부터 말라기까지는 그들을 심판하고 징계할 때마다 ‘내다’, ‘내다’라는 음성을 들을 수밖에 없다. 이젠 도리어 너무나 두렵고 떨렸지 않겠는가? 그래서 심판과 징계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율법주의적인 신앙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그러니 ‘야훼’라는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아도나이’로 바꿔서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의도는 본문에서 모세야, 모세야 이름을 두 번 부르며 거의 죽었던 그에게 참 생명을 주시고 당신의 소유된 백성이자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는 너무나 따뜻하고 인자한 ‘내다’였다. 예수님이 수제자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했음에도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야라고 이름을 부르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었던 바로 그 사랑의 음성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럼에도 그 사랑을 너무나 완악하게 거부 외면했다. 이스라엘은 도덕적인 죄로 심판 징계 받은 것이 아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이 무엇인가?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계명을 두 자로 줄이면 무엇이 되는가? 바로 ‘내다’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신만 두지 않으면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제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는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을 알라는 것이다. 이 또한 두 자로 줄이면 ‘내다’이다. 이는 선악과에서부터 시작해서 계시록 마지막까지 삼위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다. 유대인들은 끝까지 신약의 예수님을 이 모세 떨기나무에 대입 비교해보지 못한 탓에 멸망당한 것이다.

 

결국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모세야, 모세야 이름을 부르며 ‘내다’라고 하며 찾아오시는 그분의 음성을 분별해내는 실력이다. 그 실제적 의미는 아주 간단하다. 현재 겪는 문제와 고난을 제발 네 믿음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자기 믿음으로 문제와 고난을 이겨낼 만큼 믿음이 좋은 자는 솔직히 없다. 문제와 고난은 우리 믿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비교해야 한다. ‘내다’라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분과 말이다.

 

대신에 믿음을 키울 수 있는 절묘한 비결 하나를 가르쳐주겠다. 지금껏 없었던 방안이다. 오늘부터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태도를 바꾸면 된다. 하나님, 예수님,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내다’로 대체해서 읽어보라. 하나님 그분이 직접 나에게 일대일로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듣고 받아들여 보라.

 

그럼 그 인생이 안 뒤집어질 수가 없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런 삶을 살아갈수록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일에서나 “오직 예수 뿐!”이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본문에서 모세처럼 우리에게도 ‘내다’라고 하시며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이다.

 

3/1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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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출#6 2:9-15 핑계 없는 무덤도 있다. master 2017-02-20 45
52 출#5 2:1-10 상상도 못할 축복을 받는 비결 master 2017-02-10 139
51 출#4 1:15-22 하나님을 정말로 두려워하는가? master 2017-02-01 254
50 출#3 1:15-22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다. master 2017-01-24 232
49 출#2 1:8-14 새해에 세계가 흘러가는 방향은? master 2017-01-17 95
48 출#1 1:1-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master 2017-01-17 250
47 출20:6에 관한 의문 master 2016-10-22 254
46 출18장 - 모세 장인 이드로는 여호와 신앙을 가졌는가? master 2016-05-12 632
45 출17:1-7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다. master 2016-04-26 456
44 출애굽기의 몇몇 의문점들 master 2015-12-19 240
43 출8:8-9 실제적 무신론이 팽배해진 현대 교회 운영자 2014-07-07 147
42 출16:33-35 혈색(血色)보다는 화색(和色) 운영자 2012-08-21 212
41 출21:12-14 매일 도피성에 숨는 신자들 운영자 2012-07-04 454
40 출20:20-23 흑암 중에 숨은(?) 하나님 운영자 2012-07-04 627
39 출1:10,22 모세 출생의 비화 운영자 2012-04-17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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