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비결
출애굽기 강해 (8)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1-5)
민수기 12장에 이런 사건이 나온다.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평소에 모세가 혼자서 이스라엘 백성을 독단적으로 통솔하는 것 같아 불만을 품고 있었다. 마침 본처 십보라가 죽고 모세가 구스 여인을 후처로 삼는 것을 계시로 삼아 자기들도 하나님이 세운 종이라고 항변했다. 말하자면 인간세계 위계질서로는 오히려 자기들이 위라는 뜻도 있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이 답변하시길 다른 이들은 꿈과 이상으로 즉, 상징적으로 당신의 뜻을 계시하지만 모세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하여 일상적 언어로 직접 대화하신다고 했다.(민12:8) 모세는 자기를 시기했던 아론과 미리암과 같이 한 부모 밑에 태어나 성정이 동일하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특별히 그가 더욱 경건하고 신령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뜻이 과연 무엇인가?
정체성마저 상실한 모세
많은 신자들이 모세의 생애에서 간과해버리는 특성이 하나 있다. 그는 평생 먹고 입을 것에서 전혀 부족이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는 것처럼 일상적 일에서의 잡다한 걱정이 없었다는 뜻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큰 고비는 두 번 있었다. 첫 번은 나일 강에 던져졌을 때인데 하나님이 예비하신 대로 곧바로 구원받았다. 난지 석 달밖에 안 되었기에 기억도 없다. 모세로선 전혀 고통이 아니었다. 둘째는 살인자로 고발되었지만 평소에 단련한 지혜와 체력과 무술로 큰 어려움 없이 도피에 성공할 수 있었다. 또 유년기에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동족들과 함께 기거했지만 틀림없이 바로의 공주가 먹을 것 입을 것을 호사스럽고도 풍성하게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럼 모세 80 평생에 가장 큰 고충이 무엇이었는가? 현실적 고난이 아니다. 외적으로는 너무 무미건조한 삶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또 그런 삶이 나아질 전망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괴로운 것은 바로 그 문제로 인한 내적 고충이었다. 길게는 80년 짧게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자기 인생에 대한 계획과 구체적 소명이 무엇인지 알고자 씨름했으나 하나님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완전히 침묵하시고 있어서 너무 괴로웠다.
자신의 이성을 최고로 동원해서 자신의 현재 삶과 하나님의 뜻을 연결해 아무리 헤아려보려 해도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간절히 기도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부정적 감정이 뒤엉켜서 작동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삐졌는가, 짜증을 내시는가, 싫어하시는가, 주무시고 계신가, 외면하고 있는가, 거부하시는가, 분노하고 계신가? 혹시라도 처음부터 나를 모르시는 것은 아닌가? 나일 강에서 기적적 은혜로 살려주었지만 살인을 범하는 바람에 당신의 종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완전히 취소하셨는가? 사형에 처해 마땅한 죄인이지만 그 인간이 불쌍해서 이 땅에서 생존만 허락했는가? 그래서 자신이 구원 밖으로 떨어져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은 아닌 지까지 하루에도 수십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이다.
모세는 지금 히브리인도, 애굽인도, 미디안인도 아닌 상태다. 어렸을 때 생모로부터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과 여호와 신앙만은 절대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받았지만 이젠 그마저 효력이 상실되었을 것이다. 도피 은둔 생활 40년이 경과함으로 자기 직계 가족 말고는 세상에서 자기를 기억해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미디안 땅은 잠시 머물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듯 나이가 80세가 되었다.
그가 지은 시편 90:10절에 우리의 년 수가 즉, 평균수명이 칠십이고 강건해야 팔십이라고 말했다. 그것도 수고와 슬픔뿐이고 신속히 날아간다고 탄식했다. 이는 분명히 자기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다.
무슨 뜻인가? 모세 스스로 이젠 죽을 때가 되어가니 자기 인생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비우는 중이다. 그런 때에 소명은 물론 정체성과 신앙조차 더 이상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인생의 소원이라고는 제발 마지막으로 동족과 가족 곁으로 가서 살다 죽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돌아가야 할 땅 애굽이나 동족 히브리인 모두 자기를 철저히 배척하고 있다.
자기 부모들이 살아 있는지 생사여부도 모른다. 이방의 객이 된 정도가 아니라 이방에 뼈를 묻어야만 할 판국이다. 하나님과 사십년간을 씨름해도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니 하나님마저 나를 완전히 버렸나보다 거의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말문이 터진 하나님
지난 80 년간의 출생에서 지금까지 모세의 일생은 완전히 잃어버린 세월 아닌가? 완전히 100% 허송세월한 것 아닌가? 지금 자신의 실존조차 공중에 붕 떠서 실체가 없는 것처럼 되었다. 문자 그대로 금방 있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라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런데 죽지 못해 그저 목숨만 연명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 쪽에서 갑자기 먼저 나타나셨다. 모세가 느낄 때는 마치 하나님이 80년간 벙어리였다가 말문이 터진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실제로 본문 출애굽기 3장에서부터 신명기 마지막 부분 가나안 땅에 입경을 하지 못하고 느보 산에서 멀리 그 땅을 바라보며 운명했던 40년간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은 수다쟁이처럼 모세에게 말씀을 쏟아 부었다. 성경이 네 권이나 동원해 기록해야 할 만큼 말이다.
본문 4절부터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시작된다. 모세가 아무리 애굽에서 최고 학문을 배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성격까지 급했다. 거기다 모세가 앞으로 맡아야 할 일들의 특성이 어떠했는가?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고 홍해의 물을 갈라야 한다. 당신 세계 최강국 애굽을 굴복시켜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차질이 있으면 모세의 생명부터 바로 날아갈 판이다. 먹을 양식과 마실 물도 없는 광야로 이백만이 넘는 이스라엘을 인솔하며 그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 반석에서 생수를 내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야 하는데 잘못하면 백성 전부가 아사(餓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무엇보다도 시내 산에서 율법을 전수 받아야 한다. 그 내용에 오류가 생기면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설립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이단 광신자 집단이 세워진다. 말하자면 하나님 쪽에서 더 정확하고도 차근차근히 설명해주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하나님이 더 직통 계시할 할 필요가 있었다.
모세에게 소명자 의식은 사실상 없어졌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언약 백성 히브리인이라는 인식마저 희미해져 간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도 아무 할 말이 없다고 거의 체념하고 있는 단계다. 그에게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그 동안 참 갑갑했지? 온 사방이 완전히 깜깜하게 다 막힌 것 같은 완전한 절망 가운데도 중도에 다른 마음먹지 않고 묵묵히 참고 살아준 것만도 고맙다. 지금부터 서로 마음 놓고 대화하자. 네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무엇이든 다 해라. 네 기도도 어떤 것이든 즉시즉시 응답해줄게. 무엇보다도 내가 말하는 대로 그대로 순종해라. 그럼 나머지 모든 것은 내가 다 알아서 책임져 줄께!”
모세 본인조차 거의 잊어버렸던 기도의 제목들을 하나님은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수십 수백 배 응답하신 것이다. 지난 40년간 당신과 씨름했던 세월도 결코 허송한 것이 아니었다.
모세 팔십 인생의 결론
우리가 모세를 바라볼 때에 그가 행한 업적은 도무지 흉내도 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직통계시를 받는 모습만은 너무 부럽다. 모세처럼 40년간의 계시는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 정말로 위급한 고난 중에나 인생의 명운이 걸린 중대사를 선택할 때에 평생 두세 번, 아니 한 번만이라도 분명하게 말씀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 모세의 경우에 비추어보면 너무 어리석은 생각이다. 하나님과 신앙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모세는 길게는 80년 짧게는 40년을 하나님과 계속해서 씨름했으나 하나님이 침묵했던 인고의 기간을 거쳤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으려고 갈망했다.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끝까지 노력했다. 인생 80년의 계수할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고 어느 때까지 숨으시나이까 하며 울부짖었다. 무엇보다 먹고 입을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데도 그랬다.
자기는 세상에서 완전히 잊히어진 존재가 되었다. 정작 자기와 관계를 맺어야 할 사람들은 모두 원수가 된 상태다. 하나님에게 의심과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접지는 않았다. 실 날 같은 소망을 붙들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는 내 욕심을 채우려는 문제나 먹고 입는 것에 부족한 일상적 고난 한두 개를 가지고 조금 기도하다가 별다른 진전이 없으면 하나님 뜻이 아닌가보다 지레짐작해버린다. 마치 그러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인 양 착각하면서 기도가 나태해지고 얼마 안가 그마저 포기해버린다.
그러면서 직통 계시를 바라는 것은 너무 염치가 없는 것 아닌가? 모세처럼 한 가지 일을 두고, 그것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족을 사랑하는 일을 두고 길게 80년 짧게 40년 전 인생을 걸고 하나님과 씨름한다면 하나님이 응답 안 해주실 리가 없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직무 유기이다.
모세의 개인적 자질과 성품을 보면 우리보다 나은 것도 있고 못한 점도 분명히 있다. 그가 기도를 열정을 갖고 할 때도, 나태해질 때도 있었다. 의심과 불만을 잔뜩 품고 형식적으로 기도했을 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사십 년간 순전한 마음과 굳건한 믿음을 유지한 것도 아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지만 고립되고 은둔하는 삶이었다. 구조적으로 인생에서 참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씨름하는 힘으로 지난 40년을 버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본문의 단계에서 그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어떤 인생도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이 없이는 자기가 세운 어떤 거룩하고 의미 있는 계획이라도 달성될 수 없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의 의로워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 모세로 인간 세상의 최고 높은 자리에서 순간적으로 최고 낮은 자리로 수직으로 낙하시키는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다. 사람들 사이에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재물, 권력, 지성, 무술 등 모세가 지녔던 모든 것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라와 민족마저 잃게 만들었고 체력도 바닥이 났다.
팔십 인생을 마감하는 이 시점에 모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다. 자기 자아가 온전히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 하나다. 정체성마저 상실한 판국에 자존심은 벌써 버렸다. 실 날 같은 소망이라고는 “이런 나라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한 번만 더 보람 찬 일을 할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는데. 어쩜 하나님과 대면하여 그 동안 팔십 년이나 침묵했던 이유라도 알고 죽었으면...” 하는 소원 하나만 남았을 것이다. “하나님 어느 때까지 숨으시나이까? 속히 돌아오소서!”라는 탄식 하나가 팔십 인생의 결론 아닌 결론이었다.
팔십 년 만의 하나님의 대답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야!, 모세야!” 직접 음성으로 두 번 연달아 부르셨다. 하나님 쪽에서 간절하고 애끓는 사랑으로 먼저 찾아오셨다. 아마도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 그 동안 가졌던 모든 실망, 의심, 불만, 원망, 불신앙 등이 한순간에 눈 녹듯이 사라지게 만들만큼의 사랑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모세로선 그 자리에서 심령이 무너져 내리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대답에는 온갖 의미가 다 포함되었을 것이다. 하나님 그 동안 어디 계시다 이제야 오셨는가라는 원망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구원 밖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안도의 한숨, 너무너무 반갑고 기쁜 흥분이 담겼을 것이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아직도 나와 해결할 용무가 남았나보다, 동족을 위해서 시킬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대마저 생겼을 것이다.
나아가 완전히 소진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중인데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그 생명과 소망의 불씨가 다시 되살아남도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 쪽에선 모세가 그 지루하고 아무 의미 없었던 시기를 참아준 것만도 고마웠다면, 이제 모세 쪽에선 하나님이 자기를 잊지 않고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신 것을 비롯해서 본문에는 중요한 의미가 많지만 다음 주에 구체적으로 따져보기로 하자. 그 전에 본문에서 하나님과 모세의 대면이 참으로 흥미롭지 않는가? 모세는 자기 고백대로 강건해야 80년 인생이 수고와 슬픔만으로 순식간에 날아간다고 탄식하고 있는 중이다. 그에 반해 하나님은 지금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 인생은 지금부터야!”라고 선포하면서 나타난 셈 아닌가?
네 슬픔을 희락(喜樂)으로, 네 한숨을 감사의 찬양으로, 네 절대적 절망을 무한한 소망으로 바꿔주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마지막 40년을 모세 인생의 최고 황금기로 바꿔주었다. 매일 활력이 넘치다 못해 젊을 때처럼 성급한 실수를 하나님 앞에서 저질렀다. 다 타고 남은 찌꺼기 재 같았던 모세를 혈기왕성한 청년 모세로 되돌려 놓으시는 하나님이다.
그 전에 첫째 둘째 40년 각각이 모세의 눈에는 실패요 허송한 것처럼 보였어도 하나님의 치밀하고도 완전한 계획이었다. 모세가 성격이 급한데다 자기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했음에도 그마저 하나님의 완벽한 주권과 섭리 아래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의 120년 인생에 대한 일정과 계획을 완벽하게 세운 후에 차질 없이 주도했다. 평생 120년 전체를 주도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관심이 모세 그 본인에게 있었다는 뜻이다. 모세라는 한 인격체를 귀중하게 보시고 일대일로 상대해 주신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당장 한두 가지 문제와 고난을 갖고, 그것도 보이는 측면에만 국한해서 하나님의 특성 그중에서도 능력만으로 그분을 섣불리 판단 의심 반응한다. 하나님 그분과 일대일로 개인적으로 교제할 꿈을 꾸지 않는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내 방식과 내 때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봉사하고 헌금 많이 하니까 나 혼자만 손해 본 것 같고 그래서 하나님을 짝사랑 한다고 착각한다. 모세의 120년 일생을 붙들어 주었듯이 하나님은 우리 인생 80년도 365일 24시간 모든 순간을 붙들고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40 년간의 연단 끝에 자기가 가진 것은 하나 없게 되었고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도 없었다. 그 씨름한 결론이 하나님 당신을 한 번이라도 대면해봤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상태까지 되었다. 그 소원에 응답하여 하나님은 민수기 12:8의 표현대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기로 한 것이다.
신자 인생의 두 가지 큰 은혜
인생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짧고 한번 뿐이다. 저는 뒤늦게야 철이 들어서 갈수록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모자라게 여겨진다. 결코 제 자랑이나 교만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물론 그런 인식이 생기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여러분더러 저 같은 목회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제가 그나마 인생선배로서 여러분에게 감히 드릴 말씀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몇 번 말씀드린 대로 저는 많은 고난과 문제를 겪었고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고난이 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그전보다 더 큰 고난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의심과 불만을 갖고 몇 년씩이나 기도했어도 하나님이 침묵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보면 응답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기도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은 내 때와 방식보다 더 오묘한 방식으로 절묘한 타이밍에 응답하셨다. 혹시 잘못된 기도를 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무엇이 잘못인지 정확히 깨닫게 해주는 방식으로라도 응답하셨다.
때로는 그 베푸신 은혜가 너무 풍성하고 완벽해서 본문의 모세처럼 그 동안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모든 부정적 인식과 감정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게 되고 눈물 콧물 흘리면 하나님께 감사 찬양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나님께 헌신 순종하겠다고 다시 결단케 해주셨다.
둘째는 제가 겪은 문제와 고난을 하나님만의 선한 방식으로 해결 구출 해줄 때마다 제가 한 단계 성장해졌다는 것이다. 특별히 예수를 믿은 후에, 또 목회자가 된 후에는 그 성장의 의미와 차원도 달라졌다. 단순히 실력 성품 기질의 성장뿐이 아니다. 영혼의 충만과 하나님과의 교제 동행이 깊어진 것도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내 인생 전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를 철저하고도 겸허하게 인정하게 되었다. 인생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열려졌다. 가장 중요하게는 그 동안 자랑하고 의지했던 내 속의 모든 것들이 완전히 깨트려졌다. 그래서 하나님 뜻이면 저를 언제든 마음껏 사용하여 달라는 고백 하나만 남게 된 것이다.
다시 인생을 살 수 있다 해도
만약 다시 인생을 살 수 있으되 문제와 고난이 전혀 없이 형통하는 인생을 살 것인지, 아니면 수많은 고난이 있더라도 지금 같은 인생을 살 것인가 물어온다 치자. 저는 주저 없이 고난이 많았던 지금 같은 인생을 살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다 지나고 나서니까 쉽게 할 수 있는 빈말이 결코 아니다. 그런 고난과 문제가 없었다면 도무지 얻을 수 없는 은혜가 그때, 그때마다 있었다. 모세의 표현법을 빌리자면 인생을 계수할 수 있는 지혜가 풍성해졌다.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와 동행이 가능해졌고 갈수록 소명의식이 견고해져 정말로 시간이 너무나 아까운 것이 사실이다. 지금 이곳에서 여러분에게 이런 설교를 하며 목회를 할 수 있는 지금이 제 인생의 최고 황금기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
모세의 첫 번째 40년은 세상에서 최고의 실력자요 의인이었다. 둘째 40년은 두 날개가 잘리고 하나님에게도 잊히어진 그래서 거의 포기한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구약시대 통 털어 최고의 권능으로 붙들고 계셨다. 바닥에 안전히 엎질러진 물 같았던 인생이었으나 나일 강을 핏빛으로 바꾸고 홍해의 그 많은 물을 가르는 자로 바꿔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다.
그런 광대하신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때로 욕심과 오류와 어리석음이 잔뜩 포함된 기도일지라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웃지도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다 들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선하게 응답하신다. 그 때까지 하나님이 절대 부재는커녕 침묵하신 것이 아니다.
거기다 그분은 우리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완벽한 계획을 갖고서 한 치의 차질 없이 주도하고 계신다. 당장 한두 개의 문제와 고난을 갖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해선 안 된다. 가뜩이나 백세 인생 시대가 되었지 않는가? 여러분께 남은 60년 70년의 기간을 지금까지처럼 한두 개 기독제목이 내 뜻과 방식대로 응답되는지 안 되는지에 따라 요요처럼 up & down 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없지 않는가? 얼마나 시간의 낭비이며 또 예수 믿는 것이 초라하고 가난한 모습인가?
모세처럼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과 일대일 맞장을 떠서 뿌리를 뽑아야 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모른다면 앞으로 30년 40년 뒤의 소망을 붙들고라도 기도해야 한다. 그마저 아직 없다면 지금 당장 겪는 문제와 고난을 해결될 때까지 죽기 살기로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럼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부르며 먼저 찾아와 주셔서 당신의 큰일을 맡겨 주실 것이다.
2/26/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