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적 무신론이 팽배해진 현대 교회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개구리를 나와 내 백성에게서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릴 것이니라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어느 때에 구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서 하수에만 있게 하오리이까 내게 보이소서.”(출8:8-9)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부인합니다. 신화, 우화, 가설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아예 일어나지 않은 일을 후대 저자가 지어냈다는(fiction) 뜻입니다. 혹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아득한 옛날의 전설(legend)이라고 여깁니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어도 제반 조건이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던 때 일이지 지금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한 것이 그런 비슷한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일상적 일을 크게 과장해서 설명했거나, 기묘한 자연 현상에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고 봅니다. 전자의 대표적 예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거기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도시락을 서로 나눠 먹었는데 특별히 어린아이가 자기 것을 먼저 내놓는 갸륵한 선행이 도화선이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후자의 대표적 예는 바로 출애굽 사건에서 애굽에 일어난 열 가지 재앙을 듭니다.
자연 현상과 연결해서 기적을 부인하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또 그런 신기한 자연 현상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주관하신 것이니까 혹은 미리 마련해 놓은 자연의 운행법칙 안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그분의 기적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아주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기적이란 하나님이 당신께서 제장하신 자연운행법칙을 스스로 깨트리면서까지 당신의 백성에게 놀랍고도 큰 권능으로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기적의 사전적 의미 자체가 부인됩니다. 세상 사람과는 구별해서 불러낸 당신의 자녀들에게 닥친 비상하고 위급한 경우에 아주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다는 의미가 들어설 자리가 아예 없습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고유한 관계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 그분마저 거부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 자체가 열 가지 재앙이 결코 자연 현상이 아니라고 세밀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첫째 재앙은 나일 강물이 피 빛으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상류에 홍수가 져서 갑자기 황토가 밀려 내려왔다거나, 하수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 수초나 플랑크톤이 붉게 변하는 적조(赤潮) 현상일 뿐이라고 해석합니다. “여호와께서 하수를 치신 후 칠 일이 지나”(출7:25) 하수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기록도 상류에서 차고 깨끗한 새 물이 내려와 황토든 적조든 씻어 원상회복되는 기간이 그만큼 걸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는 기록이 바로 본문입니다. 두 번째 재앙으로 개구리 떼가 온 애굽을 덮었습니다. 침상과 식탁과 그릇에까지 개구리 천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견디다 못한 바로가 먼저 모세에게 제발 너희 하나님에게 기도해서 이 개구리 떼를 없애달라고 하라고 부탁합니다.
동물은 짝 짓는 시즌이 되거나 또 파동 소리 냄새 등에 민감해 지진이나 화산 같은 재앙을 예지하면 집단으로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갑작스런 개구리 떼도 언뜻 자연 현상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짝 짓는 시즌이라면 애굽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매년 겪는 행사라 그 시기도 알고 일어나는 현상에도 익숙해져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습니다. 또 재앙을 감지했다면 개구리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이상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애굽인들 모두 개구리 떼를 너무나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여기고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제발 어서 빨리 제거해달라고 모세에게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자연현상이 아닌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 특별하게 간섭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당시 애굽의 기후, 환경, 지리적 여건에 대해 그들이 가장 잘 알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초자연적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3,500년 후인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환경학적 전문가도 아닌 신학자들은 오히려 그 애굽 사람들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습니까?
이는 본문의 개구리 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강물이 핏빛으로 변한 것이 황토나 적조 때문이라고 해도 그들로선 일상 겪는 일이지 않습니까? 만약 통상적 자연재앙이라면 그들이 놀라거나 애굽 술객들이 술법으로 비슷한 이적을 일으킬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출7:22) 7일 후에 물이 깨끗해진 것도 깨끗한 물이 들어와 정상 회복하는데 걸린 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수가 깨끗케 되었다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재앙이 일어난 지 7일 후에 개구리 재앙이 일어났다는 뜻일 뿐입니다.
그 칠일 동안에 그들은 하수 물은 마실 수 없었지만 “하숫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할 수 있었으므로”(출7:24) 바로가 “그 일에 관념치 않았습니다.”(7:23) 하나님이 그들로 물을 따로 구해야 하는 고통을 7일 간 허락한 것입니다. 일곱은 완전 숫자로써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여유를 충분히 주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인내의 한계가 차도록 회개치 않자 하나님은 둘째 재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 같은 성경 기록의 정미함은 이 두 기적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열 재앙 모두 다 그러합니다. 앞뒤 문구와 당시 상황 등을 연결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도무지 부인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예컨대 여덟 번째 메뚜기 재앙의 경우 지금도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므로 기적을 부인하는 가장 좋은 먹이 감으로 꼽히지만 출애굽 시의 메뚜기 떼는 그런 자연 현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애굽은 예로부터 곡창 지대인데다 건조한 사막이 곁에 있어서 자주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떼가 대충 언제 어떻게 닥칠지 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메뚜기 떼를 몰고 온 바람과 물러가게 만든 바람이 그런 일상적인 방향과 정반대였습니다. 애굽으로 몰려올 때는 동풍(출10:13)이었고, 또 물러갈 때는 서풍(19절)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특별히 “강렬한 서풍이 불게 하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 넣으시니”(19절)라고 선언합니다. 메뚜기가 집단으로 바다에 자살한 꼴입니다. 동물은 집단으로 자살하지 않습니다. 최근의 환경오염으로 떼죽음을 당하는 경우는 있지만 스스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메뚜기는 바다 쪽에서 몰려와 바다로 물러갔습니다. 내륙에서 왔다가 내륙으로 돌아가는 통상적 자연 현상이 아니라 전능자의 힘에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열 재앙 모두가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땅의 티끌을 모세가 지팡이로 치자 이로 변한 셋째 재앙입니다. 애굽 술객들도 흉내를 내려했지만 실패한 까닭을 성경은 “이는 사람과 생축에게 있는지라”(출8:18b)라고 설명합니다. 이가 비록 사람과 생축에 기생하는 미물이라도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객들이 먼저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19절)라고 바로에게 실토합니다. 비록 악한 영에 사로잡히긴 했지만 그래도 초자연적인 일에 대한 분별력은 술객이 일반인보다 뛰어났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귀신들린 자가 가장 먼저 알아봤듯이 말입니다.(막1:24) 사건 현장에 있던 영적으로 예민한 자들이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분명히 인정했으며, 아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신학자는 지식을, 그것도 너무나 부족한, 앞세워서 기적을 부인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으려면 열 가지 재앙을 다 거짓으로 지어내었어야 합니다. 열 재앙 기사를 만들려면 열 번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의 거짓말도 정밀하게 따지고 들면 반드시 탄로가 나게 마련인데 열 거짓말을 어떻게 지어낸다는 말입니까? 그런 열 거짓말은 수사 전문가가 아니라 누구라도 알아채거나 최소한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는 챕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기후 지리 관측이 세밀해진 현대인들은 객관적 지성적으로 반발할 근거가 많습니다. 그 모든 비평 항목들에 대해 일일이 반증(反證)이 가능한 거짓말은 더더욱, 아니 도무지 지어낼 수 없습니다. 애굽 현지 사정에 익숙하지 않는 외국인인 유대인이, 그것도 모세보다 훨씬 후대에 지어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출애굽의 열 재앙과 홍해 사건은 현장에서 직접 목도하고 체험한 자가 아니고선 절대로 기록할 수 없는 기사입니다.
이와 동일한 경우가 바로 성경의 예수님의 부활기사입니다. “누가 돌을 옮겼는가?(Who moved the stone?)”라는 책을 지은 Frank Morrison이라는 영국 저널리스트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물론 성경의 부활기사는 후대인들이 지어낸 이야기인데도 사람들이 속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사실성과 역사성을 부인하려고 정밀하게 추적했습니다.
그러나 연구하면 할수록 지금껏 제기되어온 모든 반박을 성경 기록이 아주 합리적으로 변호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거꾸로 그 모든 반발들에 논리적 모순이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부활 기사는 사실이 아니고는 현재 기록된 방식과 내용으로 절대로 기록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역사적 사실이요 영원한 진리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성경은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아니 단순히 정말 진지하고도 열린 마음으로만 읽어도 예수님은 구세주 하나님이라는 결론 밖에 내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서 진정으로 믿어보고 싶다는 소원의 마음이 아니어도 됩니다. 단순히 객관적 합리적으로 그 사실성 여부만 따져 보겠다는 생각으로 연구해도 결론은 동일합니다. 그럼 모리슨이 그랬던 것처럼, 또 살펴본 대로 출애굽 열 재앙은 역사적 사실이요 진리라고 마땅히 아니 자연스레 수긍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해보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들은 성경을 반발하기 위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더 단어 하나하나까지 분리해서 이모저모 따져봤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동일한 기록을 두고 정반대 해석이 나옵니까? 하나님의 기적이 없다고 미리 결론 내린 후에 그 결론을 입증하기에 합당해 보이는 구절들만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구절들이 오히려 모리슨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기적임을 입증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다 못해 우습기까지 합니다.
그들이 미리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 선입관, 편견, 지성에만 의존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에 합당한 경우만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성령의 깨우침에 따르겠다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이 풀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풀어야 성경이 풀린다는 말씀(벧후1:20,21)조차, 틀림없이 자기들도 진리라고 인정하는, 따르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지식만 자랑하려 든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처음부터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서 순전하게 따르겠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마저 인간의 사고의 틀 안에 끼어 맞추려는 시도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런 열 재앙 정도는 정말로 식은 죽 먹기이지 않습니까? 아예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창조는 믿되 지금 인간사에선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하나님만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안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배도가 자유주의 신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니까 더 큰 문제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적을 부인하거나, 열 재앙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은 형식적 의무적으로 제시만 하고 치웁니다. 교인들이 단순히 천국 가는 보험에 든 것 정도로만 인식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오직 신자가 행할 일만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려는 목적뿐입니다. 그분을 깊이 알아가려는 시도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믿을 수 있습니다. 또 믿는 만큼만 행동으로 전환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인을 구원하시고 천국의 영광으로 이끄시는 섭리와 주권은 너무나 오묘하고 신비합니다. 그분의 은혜와 권능은 광대하시고 풍성하며 아름다우며 거룩합니다. 도무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그분은 무한하십니다. 성경에 계시된 진리는 그분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대변합니다. 그조차 너무나 심오하며 경이롭기에 살피고 또 살피며 연구하면 매번 새로운 은혜의 보석을 캐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이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신자에게 온전하고도 정학하게 가르쳐서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그분의 은혜의 늪에 교인들로 풍덩 빠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에 완전히 잠기게 해야 합니다. 그럼 교인들은 당연히 아니 자연스레 주님을 닮아가려 노력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려 합니다.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역사하는데 어찌 거룩과 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성경을 인간적 시각으로 보는 것 아닙니까? 부활을, 기적을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오히려 더 사실이 되었듯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능력은 절대 부인되지 않습니다. 정말 온전하게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절대자 하나님과 그분의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 현대 교회들이 너무 게을러졌습니다. 아니 등한시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목사의 직분이 변질된 것입니다. 교회와 목사에 충성하는 사람들로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 안에 모아서 종교 놀음을 하기에 신이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알면 좁고 협착하여 머리 둘 곳도 없으며 오히려 세상에서 손해보고 핍박 받을 것을 미리 다 알고도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누가 말려도, 집안 식구와 원수가 되더라도, 사회에서 모든 것을 잃고도 예수 한 분만을 붙들고 만족하며 기뻐하며 그분 가신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요컨대 기적과 부활을 말로만 인정하고 그 실제적 권능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배경에는 하나님이 아닌 조물주만 믿는 신앙, 사실상의 무신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5/22/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