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도 못할 축복을 받는 비결
출애굽기 강해 (5)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2:1-10)
모세가 출생할 즈음의 애굽의 바로는 히브리인들이 반역하여 도망할 것을 가장 염려하였다. 두 번의 강압정책을 시행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마지막 세 번째로 남자 아이가 출생하면 부모더러 나일 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틀림없이 아이를 버리지 않으면 부모도 함께 죽인다는 경고가 따랐을 것이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려면 인구 숫자나 무기에서 우월 내지 대등해져 반란하는 길 하나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의 상식과 전혀 다르다. 애굽이 두려워하는 반란의 방식은 전혀 필요 없었고 아예 고려 대상에도 들지 않았다. 순전한 믿음으로 당신께 헌신 순종하는 한 사람의 종으로 충분했다. 하나님 당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에게 조종당한 바로는 모세의 출생을 저지하려고 총력을 기울였다. 하나님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연약한 어린 소녀 한명으로 사탄을 무참히 패배시켰다는 것이 본문의 이야기다. 모세의 생명만 보존한 것이 아니라 바로의 궁정에서 대적의 심장부에서 왕자로 자라게 했다.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동일하게 임한다. 저와 여러분이 실감하든 못하든 본문 같은 절묘한 그분의 구원이 오늘날 우리도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다.
모세는 언제 잉태되었는가?
먼저 모세가 언제 수태 출생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출산은 본문대로 세 번째 명령이 내린 이후임이 분명하다. 수태는 산파더러 신생아를 죽이라고 한 둘째 명령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런 명령이 내린 후라면 아이를 가지려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모세의 부모는 이미 결혼하여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과, 둘 다 아직 어린이였을 것임, 함께 살고 있었다.
바로가 남자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두 번이나 내리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부부생활 중에 모세는 잉태되었다. 이제 세 번째 명령은 도무지 피할 길이 없다. 수시로 가가호호 수색할 것이며 아이가 자라면 아기 울음소리 때문에라도 탄로 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석 달을 숨긴 것은 대단하다.(2절)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들킬 뻔한 위기도 여러 번 있었을 것이다.
며칠 전 한국 TV에서 70이 넘은 어머니들이 40-50이 넘은 아들을 위해서라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대신 죽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몰라도 자식을 자기 몸에 직접 품었고 산고의 아픔을 겪는 어머니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바로의 둘째 명령이 실패한 결정적 원인도 그것이다. 산파들도 똑같이 엄마로서 아기를 출산 양육한 경험이 있어서 남의 아이라도 절대 죽이지 못한다.
모세의 엄마가 아기를 숨기는 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바로 군대의 감시와 수색은 한층 더 강화되어 목을 조아 오기에 결국 모세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들키면 아기는 당연히 죽고 자기들마저 죽으면 아직 어린 아론과 미리암을 돌볼 자가 없다.
그나마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석 달이나마 아기와 함께 있으며 모자간의 정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바로가 예수님 탄생 때의 헤롯대왕처럼 몇 살 미만 아이를 다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기에 아론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게 잔인하고 우둔한 바로도 히브리인의 공짜 노동력이 너무 아까워서 일시적으로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또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모세의 출생만 막겠다고 덤빈 것이다.
눈물어린 가정 예배
뜬금없이 수태시기를 따져 본 이유가 있다. 모세 임신 후에 바로의 둘째 셋째 명령이 내려졌다. 셋째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나일 강에 버리지 않고 석 달을 버티었다. 물론 모세의 가족이 끝까지 모세를 숨길 수 있다고 자신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최대한 아이를 숨기려 한 것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모성애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위해서 그들이 반드시 행해야만 했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딱 하나 있었다. 무엇이겠는가? 아주 간단하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언제 둘째와 셋째 명령이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출산 후 삼 개월을 숨겼다면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 일 년 이상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온가족이 눈물로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아직 어린 아론과 미리암도 부모의 손을 잡고 함께 여호와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기도 제목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바로의 마음이 바뀌어서 산파에게 내린 살해 명령을 취소시켜 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취소는 되었는데 곧바로 그보다 더 심한 셋째 명령이 내려졌다.
산파가 아이를 죽이려면 부모도 모르게 사산(死産)으로 위장하면 된다. 부모도 그럴 수 있다고 속아 넘어갈 수 있다. 이번에는 부모더러 자기 자식을 수장(水葬)시키라고 한다. 한국의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듯이 도무지 못할 짓이다. 부모의 가슴이 찢어지고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부모가 자기 목숨을 대신 강에 던질 수 있다. 그럼 그 동안의 눈물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는가? 정반대의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지 않는가?
어차피 모세는 죽을 운명이었다. 최대한 아기와 함께 있으려 했지만 도무지 다른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처럼 이 아이가 이 세상에서 누릴 복이 여기까지인가보다 체념하면서 야속한 하나님을 원망하며 아이를 하수에 버렸는가? 모세의 가족은 그러지 않았다. 석 달간 아이를 필사적으로 숨기는 그 사이에라도 바로가 명령을 취소해달라고 뜨겁게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은 버리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번에도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지 않은 것인가? 모든 상황은 단 하나 변한 것이 없다. 아침저녁으로 일 년 간 하루도 빠짐없이 드렸던 가정예배가 허사로 끝난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응답하신 내용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대하는 것은 모든 부정적인 여건이 단번에 호전되고 기도한 그대로 실현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은 모세 가족의 기도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법이 결코 없었다. 당신의 방식대로 응답했다. 아주 가느다란 실 날 같은 소망을 갖게 해주었다. 성사 가능성이 희박한 최후의 방안 한 가지에 대한 지혜를 심어주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본문의 4절과 5절을 연결해서 읽고 이해해야 한다.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담은 갈대상자를 강에 뛰어놓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았다. 아무리 역청과 나무진을 발라 방수처리한 상자이지만 급류를 만나면 금방 뒤집히고 아기 냄새를 맡은 악어들이 몰려들 것이다. 아직 어린이에 불과한 미리암이 남동생이 그렇게 되는 처참한 광경을 보려고 남아있었을 리는 없다.
평소에 바로의 공주가 동정심이 많은 아주 인자한 사람인데다 히브리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잘 대해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쩜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목욕을 하러 오는 줄도 알았다. 공주가 목욕하는 장소라면 급류나 악어가 없는 안전한 곳이다.
모세 가족은 마지막으로 바로의 공주에게 아기를 보여 보라는 지혜를 하나님에게서 응답으로 받은 것이다. 미리암은 하나님이 가르쳐준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상자를 띄워놓고 공부의 처분을 기다렸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지켜보고 있었다.
요즘도 미혼모나 가난한 부부가 갓난아이를 도무지 양육할 수 없으면 불임 부부의 집 앞에 살짝 갖다 놓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런 것과도 함부로 비교할 수 없다. 여전히 성공의 확률은 생각보다 훨씬 낮았다. 고대에는 아무리 인자한 공주라도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면 자기 목숨을 걸어야 했다.
사무엘상 14장에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투하는 병사들더러 하루 종일 금식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맹세했다. 아들 요나단이 그런 명령이 내린 줄 모르고 야생 꿀을 따먹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이 아들이라도 죽여야한다고 선포했지만 부하들의 간곡히 만류해 취소했다. 또 에스더서에 따르면 왕비 와스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알현 허락을 받지 않고 나아갔다가 왕비에서 쫓겨 나갔다. 바로의 궁주가 사형을 당하지 않는다 해도 공주 신분이 박탈될 수 있다.
모세 부모가 얻은 기도의 응답은 비유컨대 마치 자기들이 물에 빠져 익사직전에서 허우적거리는데 겨우 지푸라기 하나 붙든 정도였다. 몇 달을 그렇게 순전한 믿음으로 기도했다. 개인적 욕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개입되지 않고 드렸던 가정예배의 결말이 엄청난 기적이 아니었다. 사방은 여전히 캄캄한 절망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와중에 바늘구멍 같은 작은 틈새로 가느다란 한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정도였다.
하나님을 추궁하는 기도
그러나 그것 외에 다른 방안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라는 확신이 생겼어도 여전히 연약한 인간이라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또 다시 가족 모두가 합심해서 기도했다. 바로의 공주가 모세의 준수함을 보고 제발 바로 신고하지 말고 대신 맡아 길러주고 또 바로의 허락이 떨어지도록 기도했다.
지금까지 기도해왔던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뜨겁게 죽기 살기로 매달렸을 것이다. 미리암도 강변 갈대숲에 숨어서 어떻게 되나 지켜보는 내내 속으로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다면 제발 우리 남동생 살려달라고 수백 수천 번 울부짖었을 것이다.
모세 가족이 예배드리는 내내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도 눈물이 앞을 가렸을 것이다. 나중에는 너무 메말라 흘릴 눈물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기도를 할 힘도 없었고 기도해도 살려달라는 것 외에 딱히 할 말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속으로 “주님!, 주님!”이라고 무한 반복했을 것이다.
그들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동안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모세 본인도 80년 간 하나님에게 원망하며 씨름했다. 출애굽의 엄청난 기적의 주역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들의 기도에 종교적 수사가 전혀 필요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 하나님이 책임져 달라는 한마디뿐이었다.
지금 하나님은 삼백 년이 넘도록 당신의 백성을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족속의 노예가 되도록 방임한 채 계속 침묵하고 있다. 우리 같으면 예배는커녕 하나님을 원망 거역하며 모세의 팔자가 그런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며 지레 포기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세의 부모는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제로와 다름없고 얼통당토 않는 기적을 바라며 기도한 이유는 무엇인가? 모세 가족의 믿음이 월등했다고 단순히 해석해선 안 된다.
그들은 아론과 미리암과 이 아이만은 압제와 핍박이 없는 하나님이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마음껏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 기도, 예배드릴 수 있게 해달라는 한 가지 소망만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이다. 언제 실현될지 모르고 이들이 아니라면 이들의 후손이라도 그렇게 해달라고 간구했고, 또 그렇게만 된다면 자기들은 어떻게 되든지 괜찮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눈앞에 닥친 가장 절실한 소원 하나만을 붙들고 기도했다. 기도가 반드시 이뤄져야만 하는 당위성을 찾아내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분명한 선이라고 확신했다. 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따져도 될 만한 기도 제목이었다.
하나님 계신 곳은 항상 한낮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생각과 길이 우리와 달리 얼마나 오묘하고 풍성하고 완벽한지 모른다. 인간의 눈에는 사방이 막힌 것 같아도 하나님 안에서는 사방이 활짝 다 열려 있다. 막힌 곳이 하나도 없다. 최소한 인간의 눈에도 하늘로 향한 문,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울부짖을 수 있는 통로는 항상 열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실력과 지식으로는 심지어 믿음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제로로 보여도 하나님의 지혜와 비책은 우리의 상상마저 초월한다. 우리 눈에는 지푸라기 같은 방안이라도 하나님의 지혜가 확실하다면 노아의 방주보다 더 튼튼하다.
모세 가정의 예배는 현실적으로 아무 소망이 없는 가운데 항상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마쳤다. 그런데 한줄기 실 날 같은 빛을 하나님이 비춰주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모세의 가족과 그 장막에 이미 실현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온갖 멸시와 핍박을 받으며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기는커녕 개나 돼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고센 땅 위에도 하늘로부터 찬란한 빛이 내려와 감싸고 있었다. 반면에 나일 강변 애굽의 장엄하고 화려한 궁정과 성읍은 암흑 천지였다.
예수님은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매도당했다. 온갖 멸시 핍박 수치를 받으면서도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얼마나 무력해보였으면 삼 년간 동고동락한 수제자마저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 외면했다. 그러나 사실은 하늘로부터 오는 참 생명은 십자가에서 육신으로는 이미 죽으신 예수님 혼자만이 소지하고 있었다.
주님이 운명하자 온 사방이 컴컴해졌다. 로마군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성령이 역사하여 그의 영적인 눈을 열어서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로 하늘로부터 한줄기 빛이 내려쬐이는 것을 보게 한 것이다.
야곱이 혈혈단신으로 아무 소망 없이 도피할 때에 베델에서 꿈에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고 그 위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 것과 동일한 체험을 한 셈이다. 본문의 모세의 가족도 일 년에 걸친 가정 예배를 통해 하늘에서 빛이 아기 모세의 갈대 상자와, 자기들의 장막과, 바로의 공주 위에 비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어디까지 응답했는가?
모세의 부모와 어린 형과 누나가 갓 태어난 모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간절히 기도하는 일이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부모님이나 자식을 위해 돈이 억만금이 들여도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고, 내가 대신 죽어 그들이 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죽겠는데,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고 기도 말고는 도무지 할 일이 없는 그런 위급한 경우를 몇 번씩은 다 겪는다.
모세 가족은 무조건 모세를 살려달라고만 기도했다. 그런 기도에 심오한 교리나, 신학 지식은 물론, 성경 말씀을 인용할 필요도 없다. 무모하고 때로 무식하기까지 기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어디까지 응답하셨는가?
바로의 공주가 히브리 아이인줄 알고도 살려줄 마음이 생겼다. 그것을 눈치 챈 미리암이 히브리 여인 중에 유모를 붙여줄까 담대하게 물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그 전에 공주가 너는 누구냐고 물었을 것이고, 미리암은 아이의 누나라고 대답했을 것인데 그것이 또 공주의 마음에 더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미리암에게 담력과 총명을, 공주에게는 인자 위에 인자를 더하는 역사를 이뤄나가고 있다.
미리암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세의 생모로 젖 먹이게 하자는 기지까지 발휘했다. 아예 모세의 집에서 키우도록 허락 받았다.(9/10절) 어린 미리암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모세의 생모는 아들과 겨우 몇 시간만 이별하고 아들과 다시 상봉할 수 있었다. 아이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그 꼴을 엄마로서 차마 볼 수 없어서 장녀 미리암을 어리지만 대신 보냈다. 그 사이 몇 시간이 천년 같이 길었을 것이고 정말 피눈물 나는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단지 몇 시간 만에 아들은 살아 돌아 왔고 장래까지 보장되었다. 완전히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한순간에 완전히 천국으로 변모했다.
어린 미리암이 어떻게 이런 지혜와 담력이 생겼겠는가? 그 당시에는 물론 성령이 간섭하여 하나님이 심어준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몇 달간의 가정예배를 통해 미리암은 어느 새 믿음의 여종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믿음의 근본을 뜯어 고쳐라.
여러분은 혹시라도 지금 사방이 완전히 막혀 있는가? 아무리 오래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는 기도 제목이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치도 못하는 당신만의 방식과 때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단 주지해야 할 사항은 “도깨비 방망이 뚝딱” 식의 응답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지혜를 주시는 것이 대부분이다. 흑암 속에서 내리쬐는 한 줄기 가느다란 빛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또 그 지혜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담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전에 하나님의 응답은 사실은 당신에 대한 소망을 더 강하게, 정확하게는 놓치지 않도록 해주는 방식이다. 사실상 다시 믿음을 추슬러주는 것이 응답의 대부분이다. 실제로 저나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너무나 힘든 고난과 문제에서 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도 화끈하게 해결되거나 구체적 방안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다시 힘을 내자, 다시 기도를 열심히 하자고 결심하면서 일어나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 기도 응답이자 믿음의 실체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또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믿음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보라. 어차피 그분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과 너무 다르기에 우매한 저나 여러분은 잘 모른다. 그분의 응답은 환경과 여건을 통해 역사하고 실제로 다 해결되고 난 한참 후에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모하고 무식하기까지 뭔가 확실한 결판이 날 때까지 기도하는 것뿐이지 않는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무조건 옳고 우리 생각과 비교가 안 되는 그분만의 선하심이 있다는 확신이다. 그렇다면 그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중에 근본적인 기독교 신앙자체를 포기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미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온 그 신분과 위치는 물론 기독교 진리에 대한 믿음은 포기할 수도 없다. 대신에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기도 제목에서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발견했다면, 최소한 그분이 기뻐할만한 선이 포함되어 있다고 확신한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그 응답에 몇 년 아니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매일 모세 가족처럼 눈물로 기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모세의 부모처럼 나는 이국땅에서 노예로 삶을 마감할지라도 내 아이들만은 맘껏 하나님을 경배 찬양 기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그런 선한 동기가 우리 기도에 충분히 포함되어 있다면, 우리 또한 본문의 모세 가족처럼 하나님의 엄청난 승리와 은혜를 얼마든지 맛볼 수 있다.
2/5/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