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관대? (출3:6-12)
출애굽기 강해 (10)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3:6-12)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은 80년의 침묵을 깨고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나무 자체는 타지 않는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났다. 살인을 했고 하나님을 의심 불평했으며 알게 모르게 지은 모세의 모든 죄를 태우되 모세 본인은 살려준다는 의미였다. 떨기나무는 예수님의 십자가였고 모세는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그럼 모세의 남은 생애의 할 일을, 정확히 말해 출생 전부터 모세에게 작정한 출애굽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계시해줄 차례다.
모세의 경우에 보듯이 기독교의 구원은 소명 구원이다. 천국보장보험에 가입시켜서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 주는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현재 한국교회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가 소명 구원을 강조하지 않거나 아예 가르치지 않은 탓이 제일 크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구원의 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의도는 그것을 넘어선다.
루터는 만인(萬人) 즉, 일반신자들도 제사장 직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칼빈은 더 나아가 모든 직업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신성하다고 했다. 하나님이 주셨다면 그 직업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높이라는 뜻이다. 불신자들처럼 직업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십자가 복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독단적인 사상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의 첫째 모토인 “성경으로 돌아가자”대로 성경을 자세히 연구했더니 성경 안에 이미 하나님이 다 계시해 놓은 내용이었다. 그들은 그 진리를 다시 정확하게 풀어 설명한 것 뿐이었다.
우리도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처음 믿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제부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지,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고 싶다,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 복음을 확장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 그렇게 결단하지 않는가? 구원을 받았을 때에 이미 자신이 소명자가 되었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소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그 실천이 더뎌진다. 많은 신자들은 교회 다닌 지 수십 년이 되어가도 아직도 구체적으로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지도 몰라 곤혹스러워한다.
오늘의 본문부터 출애굽기 4:26까지는 하나님이 우리처럼 소명의식이 거의 사그라진 모세를 다시 당신의 종으로 일으켜 세우는 내용이다. 면밀히 살펴서 우리 각자의 소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를 배워야 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먼저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6절) 히브리인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5장에서 그의 후손이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지만 4대 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해서 그 땅을 기업으로 소유케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삭과 야곱은 물론 모세가 구출해야 할 대상인 히브리인들 모두를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과 권능으로 지금도 붙들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또 정복할 대상인 가나안 족속의 이름을 열거했다.(8절) 그들과 대조하여 구원할 대상인 히브리인의 위치와 신분을 잘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히브리인을 편애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모르는 이방 족속은 무조건 심판하겠다는 뜻도 전혀 없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할 때부터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차지 않는 한에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면 히브리 민족 전체의 소명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방족속에게 베풀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의 희생양이 되어서 평생을 노예로 고생하다가 죽어야 하는 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예언한 그대로 기다려주었는데도 가나안 족속이 회개할 가능성이 제로였다. 그 땅에는 오로지 죄악으로만 가득 차고 선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들렸다고 해서(9절)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잊고 있다가 기도 소리에 놀라 다시 기억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약속을 실현할 때가 도달했기에 당신의 방식대로 실현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세더러 바로 그 일의 대행자가 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이스라엘을 대대로 잊은 적이 없다는 뜻이다. 또 그래서 내가 내려가서 너희를 애굽의 손에서 건져서 가나안으로 인도하겠다고 했다.(8절) 결국 히브리 선조와 모세 개인과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은 물론이고 애굽과 가나안 족속들 모두에게 그 동안에 발생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완벽한 주권과 섭리에 의해서 그분의 정확한 일정대로 일어난 것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하나님이 특정 인종을 말살을 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이 땅의 죄악을 말살하려는 것이다. 그 곳에 당신의 백성들로 제사장 나라를 건설해서 그들을 통해 모든 민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이상한 모세의 첫 반응
지금 히브리 민족의 숙원이자 모세 개인적으로는 일생의 소망인 일을 시작하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모세의 첫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내가 누구관대 그런 큰일을 맡기느냐고 거부 내지 주저하는 뜻을 드러냈다.
자나 깨나 동족을 염려하고 부모의 생사를 걱정했던 터라 “하나님 이 순간이 오길 40년이나 기다렸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라고 해야 정상이 아닌가? 하나님이 지난 40년간이나 침묵했고 동족을 위한 일을 처음 시도할 때는 도와주지도 않고 이제야 나타났기에 삐지고 불만을 품었는가?
그의 이런 반응을 두고 믿음이나 소명 의식이 약해졌다고 연결 지을 필요는 없다. 현실적으로 객관적 합리적인 판단을 한 것뿐이다. 비유를 하자면 파키스탄에 은둔해 있는 오사마 빈라덴에게 어느 날 알라신이 나타나 미국으로 돌아가 백악관의 미국 대통령 앞에 서라고 명한 셈이다. 전혀 주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예스라고 답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모세의 반문(11절)을 다시 자세히 보라. 먼저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는가라고 했다. 가장 큰 걱정이다. 돌아가는 즉시 체포되어 사형 당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인도해 낼 수 있느냐고 했다. 히브리인들이 저를 아주 미워하는 것도 하나님 잘 아시지 않느냐는 것이다. 모세도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인지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대신에 모세의 반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어떤 면에선 더 이상하다. 당신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12절 전반부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후반부에 너희가 나중에 이 산에서 나를 섬기게 되는 것이 바로 출애굽의 증거라고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과연 증거로써 효력이 성립되는가? 가뜩이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40년을 침묵했다. 혈기왕성해서 하나님의 일을 한창 신나게 할 수 있을 때는 함께 하지 않았다. 뒤늦게 나타나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또 다시 말로 약속만 했다. 자칫 모세에게 립 서비스로 들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 단계의 모세에겐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지 않는가?
확답을 끝까지 미루는 하나님
우리도 하나님 이 고난에서 언제 구출해주실 것입니까 간절히 오래 기도해도 하나님은 묵묵부답이다. 우리가 받은 증거도 성경에 문자로 기록된 당신의 약속뿐이다. 당신의 외아들까지 주신 이가 모든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실에선 도무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또 결국에는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으로 바꿔주신다고 약속했는데 도대체 그 결국은 언제라는 말인가? 솔직히 하나님께 불만이 많다. 그러다보니 내 코가 석자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점점 뒷전으로 밀린다.
모세에게 말씀으로 증거가 되려면 애굽으로 돌아가더라도 공소시효 만기가 지났으니 사형은커녕 체포도 되지 않는다고 확답해주셔야 했다. 또 네가 미디안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동족들이 다 듣고는 너에 대한 미움이 다 사그라졌다. 다들 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셔야 했다.
이왕이면 말씀으로 증거 하기보다는 최소한 하늘에서 레이저 광선 같은 불이 내려와서 시내 산의 큰 바위라도 순식간에 산산조각 깨트려야 했다. 그럼 그나마 안심을 할 텐데 지금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임재 해 있는가? 땔감으로 밖에 쓰지 못하는 떨기나무에 오셔서 그것도 화끈하게 태우지 않고 겉에 불만 붙은 초라한 모습이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이 모세의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그 뱀을 지팡이로 바꾸는 이적은 보여주었으나 모세와 한참 대화를 나눈 후인 출애굽기 4장에나 나온다. 모세의 가장 큰 근심이었던 애굽에서 체포당할 것에 대해선 놀랍게도 모세와 다섯 번의 질의응답을 다 끝내고 애굽으로 출발하려는 즈음에서야 말씀하셨다. 네 생명을 찾던 자들이 다 죽었다(출4:19)고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가? 기적은 전혀 베풀지 않는다. 가시적으로도 임재 하지 않는다. 직통 계시도 주시지 않는다. 예스 혹은 노 둘 중 하나의 대답이라도 시원하게 해주면 좋을 텐데 그러지도 않는다.
문제와 고난이 다 해결된 후에야 겨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실은 그러기만 해도 다행이고 대부분의 경우는 그마저 모르고 지나친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고난을 해결하고 일용할 양식을 채우는 씨름에 거의 다 소진하고 만다.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증거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세상에 없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해보겠다. 대기업에 입사시험을 친 청년이 다른 수험생과 비교해보니 필기와 면접시험 둘 다 아주 잘 본 것 같아 합격할 것 같았다. 마침 먼저 입사한 대학 선배를 찾아가 문의했더니 그 정도면 충분히 걸릴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잠시 기분이 좋아지고 안도되는 것뿐 금방 또 걱정이 앞을 가린다.
그런데 선배를 만나고 나오는데 우연히 면접시험에 참석했던 그 회사사장을 만났다. 사장이 “OOO 학생!”이라고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서 부르면서 “이번 4월 달에 있을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나자. 그 때도 최고 성적을 내줄 것을 기대해!”라는 말을 들어다 치자. 이만큼 확실한 합격에 대한 증거는 없다.
약속을 믿느냐 못 믿느냐는 그 내용의 객관적 타당성에 달려 있지 않다. 실현될 현실적 확률의 게임도 전혀 아니다. 약속에 참여해서 수행해야 할 당사자인 나의 능력 의미 심지어 믿음과도 상관없다. 주변 사람의 격려 도움도 소용없다. 심지어 그들의 기도마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직 약속한 그 사람의 능력, 성품, 의지, 신실성에 달렸다.
인간 사장은 마음이 바뀔 수 있다. 불경기가 되면 채용계획을 취소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모세더러 나중에 시내 산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모세야 모세야라고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서 두 번이나 불렀다. 그분 하나님이 그 약속을 펑크 낼 리는 절대로 없다.
하나님이 당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전제하신 뜻이 무엇인가? “모세 너는 기껏 40년간 내가 침묵했다고 나에 대해 의심 불평하는데, 너희 선조는 평생에 가시적 증거도 없이 말로만 된 약속을 붙들고 살다가 죽었다. 그들에게 내가 시내 산에서 만나자고 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하늘의 생명책에 이미 이름을 올려놓았다.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낼 때부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하늘의 영원한 시민권을 이미 부여했다. 영생을 보장해주었다. 그들은 지금 나와 함께 천국에 있다.”
예수님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자는 죽어도 영원히 산다. 천국에 살아 있는 성도들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모르는 영적으로 죽은 자는 육신적으로 살아 있어도 그들의 하나님이 될 수는 절대 없다.
믿음에 관한 성경의 첫째가는 표준이자 기준인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바가 전부 바로 이것이지 않는가? 구약성경의 믿음의 선진들 모두가 하늘의 약속은 받았지만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라고 말이다.
본문 6-12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내가’라는 일인칭 주격이다. 내가 내려가겠다.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낸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정녕’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계명에서 사용한 단어와 같다. 영원한 구원과 심판을 단칼에 나누는 용어다.
정녕이라는 단어가 효력을 발휘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진실로, 진짜로, 절대로, 정말로 등의 단어는 하나님 외에는 사용해선 안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신자더러 맹세를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이다. 대신에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만 말하라고 했다.
그런데도 도리어 신자들이 하나님께 자꾸만 예 아니오 둘 중 하나의 답만 해달라고 졸라댄다. 하나님은 “그것은 내가 대답할 단어가 아니다. 내가 말로만 약속했다 하더라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나의 말이 절대적 진리이니 인간인 너희가 예 아니오 하나로 답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겐 그 모든 진리의 약속들이 오직 예만 된다.”고 하나님이 정녕 약속하지 않았는가?
모세는 하나님에게 내가 누구관대 그 일을 하느냐고 따졌다.(11절) 그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했는가?(12절) 거꾸로 모세에게 내가 누구관대 네가 걱정 의심 주저하느냐고 했다. 이 얼마나 강력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증거인가?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은혜요 권능인지 실감할 수 있는가?
신앙생활이 고달픈 첫째 이유
우리의 신앙생활이 왜 고달픈지 그 이유를 아는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믿음만 너무 강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만 자꾸 되새긴다. 모세가 말한 대로 “내가 누구관대?”의 뜻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이 간단한 문제 하나 아직도 해결해 주지 않습니까? 혹시 응답이 지체된다면 가시적 증거 하나라도 내놓으세요.”라고 떼만 쓴다.
“하나님이 누구관대”에 대해선 관심이 전혀 없다. 아니면 완전히 잊고 있다. 현실적으로 나아질 기미가 없으면 믿음도 떨어지고 기도할 힘도 없어진다. 대신에 내 감정에 휘둘려서 사탄에게 빌미만 제공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모세가 애굽으로 출발할 때에야 비로소 확답을 주신 하나님이다.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기 전에는 아무 증거를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신자를 괴롭히려는 뜻이 아니다. 좋게 말해서 연단을 시켜서 성숙시키려는 것이다.
그보다 더 간단한 뜻이 있다. 하나님 당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자만이 당신께 순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분을 제대로 안다면 순종 아니 할 수는 결코 없다. 또 그러지 않으면 그분은 당신의 일을 맡기지도 않으신다.
바울 사도는 군사로 부름 받은 자가 자기 생활을 돌보지 않고 군사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산다고 했다.(딤후2:4) 내 인생에 성취할 목표가 확고하게 서있다면 불신자도 그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건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소명을 받은 자라면 자기 형편이 궁핍하든 부요하든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럴 시간과 여유도 없다. 오직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 앞만 보고 갈 뿐이다. 예수님도 내가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에 혼자 두지 않고 함께 하신다고 말했다.(요8:29)
문제와 고난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서 구원 받는 신앙도 아주 귀하다. 불신자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선 인생을 수동적으로 그저 당하기만 하고 살고 있다는 뜻이다. 천국을 침노해서 차지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실현한 적이 없다.
모세는 하나님께 분명한 소명을 받았지만 그 일에 자기 생명이 걸린 너무나 큰 위험이 눈에 빤히 보이기에 주저할 수 있었다. 우린 그런 적도 없으면서 그저 내가 누구관대 타령만 하면서 스스로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무사무탈 하게만 해 달라고 조른다. 엄격히 말해 한 달란트 받고도 땅에 묻어두는 신앙이다.
소명자의 삶이란?
누차 강조하지만 모세 같이 큰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을 물려준 디모데의 엄마처럼 자녀들을 영적으로 너무나 혼탁한 이 세대에서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 다비다처럼 옷을 지어서 주위에 힘든 같은 과부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
노예 오네시모처럼 주인의 돈을 훔쳐 도망쳤지만 예수를 믿어 진심으로 회개하고 다시 돌아가 주인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길 수 있다. 마게도니야 교회들의 이름 없는 교인들이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힘에 지나치게 헌금을 보내 도울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한 일들은 주변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 아주 사소한 모습으로 얼마든지 많다. 직통계시를 안 받아도 된다. 종교적 색채가 드러날 필요도 없다. 심지어 남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일이라도 된다.
내 가정을 정말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으로 바꿀 수 있다. 주님의 사랑이 넘치고 가족 간에 따뜻한 격려와 위로와 사랑의 말과 섬김으로 채울 수 있다. 아니 가족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의 공동체인 부부사이만이라도 정말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해보라. 서로 부끄러워서 숨길 것 하나 없게 만들어 보라.
정말로 사랑다운 사랑을 해보라. 날이 갈수록 애정이 더욱 깊어지게 해보라. 그래서 불신자들로부터 “예수 믿는 분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시네요. 당신들이 믿는 예수를 우리도 믿고 싶어요.”라는 말을 듣게 해보라. 바로 그것이 땅 끝까지 선교하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전도이다.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가 계시하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 순수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마음과 열정을 회복하라. 그럼 자기 인생 전부를 바칠 만한 구체적 소명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최소한 칼빈이 말한 대로 현재의 위치와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맘껏 할 수 있다.
믿음의 씨름이란 그래서 아주 간단하다. 주변 상황과 여건을 겉으로만 보고서 자꾸만 내가 누구관대라는 생각이 들 때에, 하나님이 비록 문자로 기록된 약속만 주셨더라도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나가는 싸움이다. 그분이 바로 내 이름을 기억해서 불러내어서 당신께서 “내가 누구관대”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바꿔서 듣는 실력이 믿음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일관되게, 가능한 빨리 내가 누구관대라는 나의 생각에서부터 믿음의 무게 추를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내가 누구관대로 옮겨 놓아야 한다.
모세의 예수님을 만나기 전 80년의 인생은 후회와 탄식뿐이었다. 예수님을 만난 후 40년의 인생은 정말로 의미와 가치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소명의 삶이 종교적 의무가 아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위한 일도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인생을, 그것도 짧고 한 번뿐인 인생을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범사를 주관하시는 유일한 분에게서 받은 거룩한 소명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정녕 없다.
3/12/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