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정말로 두려워하는가?

출애굽기 강해 (4)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출1:15-22)

 

 

하나님이 시킨(?) 거짓말

 

본문을 다시 보는 이유는 신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윤리적 과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앞뒤 정황을 아무리 살펴봐도 두 산파는 바로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하고 치울 문제가 아니다.

 

거기다 많은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그만큼 중대한 일도 아니고 구태여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일에도 심심찮게 거짓말을 하고는 예사로 여긴다. 따라서 신자가 어느 정도까지 거짓말을 해도 되는지 아니면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해선 안 되는지 성경이 말하는 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산파가 임기웅변 식의 기지를 발휘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고(17절) 하나님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20절)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심어준 생각이다. 자기들 생각이었어도 하나님이 잘했다고 상을 준 셈이다. 그래서 선한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여긴다면 성경을 문자적 표피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간혹 이렇게 말하는 신자들이 있다. 예수님이 분명히 포도주를 마셨고, 첫 기적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성경은 술에 취하지 말라고만 했지 마시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믿음 생활과 술은 전혀 상관없다고 해석 적용하는 신자가 꽤 많다. 본문을 보고 거짓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성경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은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인간이 감히 흉내 내려 해선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흉내를 내려면 정말로 제대로 내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하셨기에 나도 해도 된다는 논리라면 예수님이 진물과 고름이 흐르는 문둥병자의 얼굴에 손을 얹고 기도한 것은 왜 따라 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또 열 명의 문둥병자를 한 번에 치유했다. 우리에게 그런 치유의 능력은 없다. 그러나 나환자촌에 들어가 전도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지금 하고 있다면 술을 마셔도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창녀 세리 죄인 불구자 등등 유대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자들과 교제, 상담, 치유, 전도했다. 그들은 히브리 예배공동체에서 추방된 자들이었고 당시에는 그들과 교제는 물론 함께 있는 것만으로 부정하고 율법을 어긴 죄인 취급을 당했다. 함께 추방될 위험마저 있었다. 예수님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과 교제했으며 아예 일상의 삶이었다.

 

술 마시는 것이 죄는 아니다.

 

술 마시는 것 자체는 구원과 무관하며 죄라고 말할 수 없다. 술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가 발생할 때에 비로소 죄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지금껏 교회에서 술 담배를 비롯한 세속적 오락을 신자가 해선 안 되는 절대 금기사항으로 강조한 것은 과도한 조치였다.

 

성경은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신앙의 첫째 중요한 요소가 성령에 취함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체질은 여전히 연약하며 죄의 본성이 살아있고 세상과 자기를 중심에 두는 옛 습성도 남아 있다.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둘째는 술 취함과 성령 취함을 대조했기에 술에 취함이 성령 취함에 방해가 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술을 적게 마시거나 통제할 자신이 있어도 일단 알코올이 몸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데 방해가 된다. 쉽게 말해 기도와 말씀으로 그분을 묵상하는데 지장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음 날 아침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면 벌써 하나님이 주시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육신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보존하지 못하는 죄를 범한 것이다. 반면에 그런 숙취가 전혀 없고 아주 개운한데다 전날 저녁의 술을 마시며 가졌던 모임이 아주 유쾌하며 선한 것이었다면, 예컨대 그 동안 원수처럼 지내던 자와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과 화해했다면 예수님처럼 술을 마신 것이다.

 

가나의 첫 기적이나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술을 마셔도 된다고 주장하는 신자는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그 핑계를 찾은 것이거나 평소에 습관적으로 술을 마신 것의 자기합리화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일반은총만으로는 안 된다.

 

술을 잘 절제하면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인생살이의 상처와 고통을 잠시 잊게 만드는 유익은 분명히 있다. 건강에도 부분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친다. 또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이 믿음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베푸시는 일반적인 은총이다.

 

신자는 일반은총 즉,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세상에서 최고 좋은 것으로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어도 인생의 행복 만족 기쁨을 절대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자다. 심지어 상처와 고통을 경감 혹은 망각도 시키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술이 깨면 오히려 더 괴롭기만 하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교제 동행함으로써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에게만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이 필수이자 우선임을 절감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따라가는 자다. 때로 일반 은총이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는 일에 불편하거나 방해를 야기함을 체험한다. 이런 맥락과 관점에서 술 담배를 비롯한 세속의 오락을 접근하고 적용해야 한다.

 

나아가 신자는 불신자들에게 일반은총만으로 절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자신이 특별은총을 누리며 사는 모습이 얼마나 즐겁고 자유로운지 증명해야 한다. 세상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가 인생의 첫째 목표에서 완전히 빠진 것이 신자다. 그것들은 더 중요한 첫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심지어 그런 것들이 많이 부족함으로 인해 문제와 고난이 닥쳐도 종교적 위선과 가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환난 중에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범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합력해서 선으로 바꾸시고 당신의 궁극적인 영광을 드러낼 것을 확신하기에 최소한 평강을 유지하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야 한다. 그래서 당신들이 믿는 예수가 도대체 어떤 분인지 자기들도 알고 싶고 믿고 싶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명하고 있다. 식사 교제를 포함 모든 모임에 반드시 기도나 예배 같은 종교적 의식을 행하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방인과 죄인과의 식사교제를 엄격히 금지시켰음에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니기에 당신께서 그들을 찾아가 교제 했다. 또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은 누구라도 환영하며 식사 교제를 했다.

 

오늘날 상황에 대입하면 동성애자가 교회에 출석하면 천하의 죄인처럼 취급하지 말고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창녀촌에 들어가 라면을 함께 끓여서 나눠 먹고 기도해주며 전도하고 어려운 일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며 그분 앞에 나와 그분의 은혜를 받아 누림에 세상적인 어떤 것으로도 제한 받지 않는 분임을 신자가 실제 삶에서 실천해 보여야 한다. 바로 그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두 산파가 거짓말한 의미

 

본문의 두 산파가 갓 태어난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말한 것을 너무 당연하게 치부하면 안 된다. 단순히 윤리적 차원 즉, 일반은총의 맥락에서 접근할 수 없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길 가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위독한 사람을 911에 신고하여 병원으로 데려가 살리고 때로 치료비까지 대신 내주는 일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지금 산파는 만약 자기들 거짓말이 들통 나면 자기부터 죽어야 한다. 한두 번은 속일 수 있겠지만 매번 그러다간 쉽게 발각된다. 제가 본문의 산파 입장이었다면 솔직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신이 전혀 없다. 이차대전 나치 독일 치하에서 유대인이나, 한국전쟁 때에 인민군 혹은 연합군 패잔병에게 한두 끼 밥을 대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집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겨서 먹여주고 재워 주는 일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기에 누구나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유지 보존하려는 본성이 있다. 그러나 내가 죽더라도 남을 살리는 일은 도덕에서 신앙 차원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본문의 산파들에 대해서 17절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20절에선 또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었어도 현실적으로 형통한 것은 단 하나 없음에 주지해야 한다. 오히려 역으로 바로가 남자 아이 한 명 죽이는데 얼마씩 주겠다고 약속했을 것이다. 나중에 바로를 등에 업고 큰 권세도 부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기 목숨을 걸고 아이를 살렸다. 아이들 부모가 고맙다고 인사할 처지도 아니다. 다들 노예 신세라 돈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었다고 말하는 뜻은 무엇인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이 바로가 잔인하긴 해도 우둔해서 거짓말에 쉽게 넘어가도록 해주신 것이다. 그 배경에는 눈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이 역사했던 것이다. 그 전에 산파들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주고 그 생각을 담대히 실현할 용기와 담력을 주신 것이다.

 

본문 20절을 다시 자세히 보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산파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고 강해졌다. 이어지는 21절에서 산파의 집이 흥왕해졌다고 하지만 집은 가문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산파 본인이 아니라 그 후손들이 번성해지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불신자도 자기 생명을 버리며 남을 살리는 일이 종종 있다. 너무나 훌륭하신 분으로 존경 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니 그렇게 의로운 분일수록 더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 까닭은 평소에 하나님의 오묘하고 풍성하고 거룩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그분의 실존하심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에 하나님이 엄청난 큰 그림을 마련해서 미래에 완벽하게 실현시킬 수 있음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 영원한 천국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음은 꿈도 꾸지 못한다. 물론 그 사람의 이름은 세상은 기억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불쌍하고 애처로울 뿐이다.

 

거짓말을 계속하는 좋은 믿음

 

본문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들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모세를 출생케 하여 출애굽을 통해 가나안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 사탄은 그 계획을 눈치 채고 잔인한 바로를 동원해 방해를 하려 했지만 두 산파의 기지로 그 계획이 무산되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그 전에 이미 바로에게 그런 우둔한 기질을 함께 생성시켰다. 어지간한 상식이 있다면, 특별히 바로가 되는 교육을 받았다면 산파의 거듭되는 거짓말에 계속 속아 넘어갈 리가 없지 않는가?

 

두 산파의 믿음 또한 단순히 내가 죽고 남을 살리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어쩌다 처음 발각나면 바로가 “이번 한번만 용서해준다. 너희 동족의 아이니까 동정심에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번 다시는 그러지 말라. 다음에 남자 아이 한 명이라도 태어나면 바로 즉결 처형이다.”고 엄포를 놓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산파는 그래도 계속 아이를 살리고 거짓말도 계속 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용기가 솟아서 어쩌다 한 번 정도는 목숨을 걸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산파는 언제든 남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순히 윤리적 차원으로 접근하면 거짓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두고 성경은 오히려 신앙의 참 모습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믿음의 이런 차원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참 뜻이 무엇인가?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그분만이 주관하니까 인간이 죽여선 안 된다. 피 값은 반드시 피로 갚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마련이라는 두려움은 우리도 갖는다.

 

그 산파들이 가진 두려움은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힌 온전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려면 앞으로도 아직 80년가량 더 남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시고야 말 것이라는 소망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자기들이 혹시 거짓말을 해도 하나님이 보호해주리라 믿었다. 나중에 발각되어 죽게 될지라도 그 때까지 최대한 많이 아니 단 한명의 아이라도 더 살리는 것이 자기들 소명임을 확신하고 실행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질 위기에서도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하나님이 그 극렬한 불 속에서도 우릴 지켜주시겠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상에 절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누구 앞에서 선언했는가? 세계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당당하게 선포했다.

 

이 세 친구들과 본문의 두 산파의 두려움은 하나님이 징벌하실까 무서워하는 공포감이 아니었다. 그분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경외감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당신께서 반드시 지키시고 말 것이며 자기들은 어떻게 되든 하나님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날 것이므로 기꺼이 자기 목숨을 던져 동참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들에게 거짓말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술을 마셔도 되는지 안 되는지 같은 윤리적 질문이나 의아심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으로도 떠오르지 않았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에 붙잡혀 하나님 앞에 그분의 동역자로 선 것이다.

 

그 결과 다니엘의 세 친구는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았고 두 산파의 거짓말도 끝까지 통했다. 우둔한 바로인지라 금방 자기 정책을 바꾸고 아이들을 하수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이 잔인하고 우둔한 바로는 자식이 없었던 공주의 설득에 넘어갔던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던지 유아살해 정책은 곧 취소되었을 것이다.

 

윤리가 아니라 믿음이다.

 

본문을 포함하여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는 인간 사회에서 한 인간을 높이는 의로운 윤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소망하며 그분의 열매 맺는 일에 동참 아니 동역하는 믿음이다. 믿음이 도덕적 종교적 지식과 관습을 늘리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자기 삶에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의 출생을 완벽하게 보호하셨다. 곧 출애굽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당신께서 건설하려는 중이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 죄에서 구원 받는 제 2의, 아니 진정한 출애굽의 체험을 했다. 남은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다. 그 일을 잘하게 하려고 두 산파와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임했던 불신자들이 누리지도 알지도 못하는 너무나 큰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 우리를 붙들고 있다.

 

당장에 우리더러 목숨을 걸고 남을 살리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죄송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도무지 그런 그릇이 되지 못함을 잘 알고 계신다. 정확히 말해 애당초 우리를 그런 그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두 산파 곁에 잔인하고 우둔한 바로와 동정심 많은 공주를 함께 두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한 치의 차질 없이 진행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현재 이곳에서, 이런 여건 아래에, 바로 이런 모습으로 우릴 두시고 우리 주변에도 아주 힘든 사람과 힘든 고난들을 함께 두셨다.

 

그런데 산파의 때와 딱 하나 다른 것은 있다. 바로 신앙의 자유와 전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말하자면 구태여 거짓말 할 필요가 전혀 없는 환경에 우릴 두셨다. 무슨 뜻인가? 얼마든지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성령의 인도에 힘입어 내 쪽에서 어떤 손해 희생 상처 없이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가능하다. 거기다 너무 좋은 성도들을 만나게 하고 함께 공동체로 묶어주셨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처럼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아무 상관없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자에게 찾아가 우리가 받은 사랑을 나눠주지 못하는가? 아니 찾아오는 자라도 차별 없이 만나주지 못하는가? 멀리 갈 것이 없다. 바로 자기 가정 안에서부터 부부사이에 부모자식 간에도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 지금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자식이 과연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며 상저 받고 있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당장에 저부터도 이런 잘못을 철저히 점검하고 회개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크게 어렵지 않다. 가장 근본적으로 도덕적 종교적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잘못은 크게 보고 내 잘못은 적게 보는 잘못부터 고쳐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바로 하나님은 그러지 않음을 제발 알라는 뜻이지 않는가?

 

신자는 예수님의 참 사랑을 나누는 그분의 나라를 만들라고 세상에서 따로 불려나온 자다.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는커녕 그분의 은혜도 절대 받아 누릴 수 없다. 무슨 일을 하던 참 기쁨이 없고 아주 메마른 도덕과 종교의 빈 껍데기만 남는다.

 

하나님 그분을 깊이 알아나가야 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한 본문의 산파처럼 자기는 죽더라도 이웃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주변에 적극적으로 나눠야 한다. 그럼 상상치도 못하는 큰 승리와 행복과 만족을 맛볼 수 있고 그분의 영광도 반드시 보게 된다.

 

1/29/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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