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과 금이 없는 교회

조회 수 68 추천 수 0 2015.09.28 15:39:38

은과 금이 없는 교회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더라.”(행3:1-10)

 

심각하게 물어야 할 질문

 

엘에이 코리아타운에는 홈리스 거지들이 많고 간혹 불구자도 있다. 차가 신호에 대기하고 있으면 앞 유리창을 수건으로 한 번 쓱 닦고는 구걸한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자주 겪는 일이라 목사이면서도 짐짓 외면해버린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현찰이 있으면 동전 몇 개 주고 치운다. 반면에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제 구시 즉, 오후 3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면서 만난 나면서 앉은뱅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완벽하게 치유해주었다.

 

물론 당시는 온 천하에 복음이 빨리 전해지고 기독교를 견고하게 세워야 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어서 성령의 권능이 지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충만하게 역사했다. 그럼에도 베드로나 요한은 우리와 성정이 동일한 인간이다. 비록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였어도 우리 또한 주님의 제자다.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약속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 또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그들과 너무 차이가 나지 않는가? 그들이 믿는 주님과 우리가 믿는 주님이 다른 분은 분명 아니지 않는가?

 

유대인들에게 이름은 알다시피 그 사람의 특성과 인격과 권세 모두를 상징 대변한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여 이 땅에 계시지 않고 하늘 보좌에 좌정해 계신다. 제자들이 그 이름의 권능에만 힘입어 현대첨단의술도 고치지 못하는 불구자를 완벽하게 낫게 했다. 예수님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자 영원히 모든 생명을 통치하는 주인임을 입증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정말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물을 질문이 생겼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 볼 때에 예수 이름의 권능이 어떻게 실현될 지에 대해 충만한 기대와 설렘을 갖고 있는가? 그 이름으로 믿음의 승리를 얼마나 자주 맛보는지? 아니면 해묵은 문제와 질병 하나 해결해 달라고 그렇게나 오래 기도했어도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신가? 그래서 이젠 신앙생활이 습관적 형식적으로 변해버렸는가?

 

그렇다고 불구자 거지를 만날 때마다 베드로와 같은 말을 선포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아무 때나 그런 이적을 베풀어주지 않는다. 최소한 지금껏 해온 것처럼 아주 바쁜 일이 있는 양 황급하게 지나치거나, 아예 멀리서부터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짐짓 다른 방향으로 쳐다본 것에 대해선 심각하게 반성해볼 점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지금 저를 비롯한 우리의 양심에 반하는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려는 의도는 없다. 베드로 같은 선포를 한 번도 시도도 하지 않았거나, 그런 이적에 대한 기대도 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베드로는 어떻게 그런 강건한 믿음을 가졌는지 정확히 살펴서 나도 예수 이름의 권능을 소유하여 그를 닮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그런 상태로는 그렇게 오래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이 묵묵부답이라고 그분의 권능을 의심하고 불평할 자격조차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 마지막에 부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의식의 추임새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말이다.

 

생활에 불편이 없었던 걸인

 

당시 유대인들은 새벽, 오후, 저녁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서 기도했다. 기도에 열심이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구제도 많이 했다. 따라서 성전 미문은 당시로선 구걸하기에 최고의 명당 자리였다. 또 죄에 찌든 인간들의 모습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똑같다. 그 당시도 틀림없이 앵벌이 조직폭력배는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앉은뱅이 된 자를 매고 왔다고 한다.(2절) 세 번의 기도 시간에 맞춰서 제일 좋은 자리를 잡게 해준 것이다.

 

이 걸인의 나이는 행4:22에 따르면 40세였다. 나면서부터 불구였기에 정상사회생활은 할 수 없고 일상적 활동에도 많은 불편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40년이나 살았다면 나름 스스로 터득한 요령과 지혜로 생존에는 애로가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어쩌면 평균 이상의 수입을 얻었을 것이다.

 

정확히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미국 목사가 이때에 만약에 베드로에게 은과 금 즉, 돈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아마도 기도 시간에 쫓겨 다른 유대인들처럼 몇 푼 던져 주고 성전에 들어가기 바빴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돈이 풍부하면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궁핍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은 더 크게 드러난다고 주해했다. 분명히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새겨들어야 할 영적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 믿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본문 3,4절을 다시 보자. 걸인이 구걸하자 사도들이 주머니를 뒤져서 돈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그럼 다른 것이라도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걸인이 구걸하자마자 곧바로 그를 주목하고는 우리를 보라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돈이 한 푼도 없었을 가능성은 적다. 사도들이 다 가난한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나 요한 모두 중산층 이상이었다. 또 성전에 나오면 헌금을 준비하고 나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상식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가능성은 둘뿐이다. 평소에 걸인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가 오늘은 기도해주고 전도해야지 작정했거나, 바로 그 때에 성령의 강력한 간섭이 임하여 그렇게 선포하고 싶은 생각을 심어준 것이다. 아니면 그 둘 다일 수 있다.

 

어느 경우든 베드로는 걸인의 현재 상태를 유심히 살핀 것이다. 아니 구태여 관찰할 필요도 없이 보기만 해도 지금 그 걸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그것부터 주려고 한 것이다. 정말 구제할 작정이었는데 돈이 없었다면 “마침 오늘 돈이 없으니 미안하다. 다음에 줄께”라고 했을 것이다. 사도들은 그냥 곧바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다. 그 걸인에게 은과 금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고 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불구만 고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평생소원인 불구치료만 해준 것이 아니다. 나면서 불구자는 당시 유대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여호와의 거룩한 공동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현실적으로 말해 성전에서 예배는 평생 드릴 수 없었다.

 

모세의 율법(레21:16-24)에 따르면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에 한해 불구자를 세워선 안 되었다. 하나님이 불구자를 차별대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2에 보면 제자들마저 나면서 소경인 자를 아비와 그 본인 누구의 죄 때문에 저렇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불구자를 죄인 내지 부정한 자로 취급한 것을 반증한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았는데 경건한 사람들이 종교의 너울을 씌워서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걸인에겐 호의호식하는 것이 절대 평생소원이 아니었다. 오직 일어나 걷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정상 직장을 갖고 생활에 불편을 없애려는 뜻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 공동체에 단 한 번이라도 참여하여서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나이 40이면 당시 수명이 짧았던 점을 감안하면 살만큼 살았다. 또 40이라는 성경이 말하는 완전 숫자의 개념을 적용하면 인생에 대해 어지간히 달관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 동안에 전혀 풀지 못한 숙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하나님께 왜 나는(Why me?) 당신의 자녀가 될 수 없는지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날 나면서부터 외면 저주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지 그걸 알고 싶어서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을 것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시원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자신이 하나님의 눈 밖에 난 이유조차 모르고 죽어야 하는 것이 그로선 가장 억울한 일이었다.

 

이 걸인이 치유받자마자 한 일이 무엇인가? 사도들을 집으로 모시고 감사의 잔치를 벌이지 않았다. 사도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했다.(8절) 할렐루야 큰 소리로 외쳤다. 사십 평생을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것이 뻥 뚫린 것이다. 인생살이가 고달파서 힘들고 눌린 것이 아니다. 소망이라곤 0%였었는데 순간적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100%가 된 것이다.

 

나면서 앉은뱅이가 치유된다는 것은 지금도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다. 그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경배했는지는 몰라도 함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평생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아예 포기하고 있었다. 인간 사회에서 인간 취급 못 받는 것은 사실은 이미 이력이 나있었을 것이다. 경건한 유대인들도 뒤로 호박씨 까기는 마찬가지며 그 인간됨이 자기보다 나을 것 하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속죄제를 통해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성도들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자기는 인간 사회는 물론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이 완전히 닫힌 상태였다. 완전한 절망 중에 있었다. 바로 죽은 상태였다. 육신적으로 죽지 못해 연명하는 것에 불과했다. 생존만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드리지 못하고 생존만 한다면 인간의 탈을 쓴 짐승에 불과함을 이 걸인만큼 절감하는 자는 없었다.

 

들려오는 이상한 소문

 

대제사장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여호와께 가장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모세 오경을 순종하고 수백 가지 장로의 유전도 성실히 준행하여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고 칭찬 받는 자들이었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 천국 문에 가장 가까이 서있다고 인정받는 자들이었다. 정말로 그들은 동전은 잘 던져 주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걸인의 심령 속에 있는 절망에 관해 묻지 않았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신기하고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나사렛에서 난 한 젊은 랍비가 이적과 섬김을 베풀었지만 대제사장과 로마 당국의 미움을 사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지 삼일 만에 부활했다는 것이다. 또 그의 제자들이 생명의 부활의 도를 전파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않고 꿈도 꾸지 않았는데 바로 그 랍비의 제자들이 떡하니 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또 바로 그 랍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자기를 향해 선포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다리에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았다. 막혔던 혈관이 시원하게 관통되었고 굽어져 있던 뼈들이 우두둑 소리 내면 제 자리를 찾아가며 시원하게 내뻗었다.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솟구쳤고 한순간에 아무 지체나 절뚝거림 없이 저절로 일어서게 되었다. 나아가 뛸 수도 있었다.(8절) 너무나 완벽하게 치유된 것이다.

 

당연히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아니 생각할 순간도 없이 지체 없이 “할렐루야 나사렛 예수여!”라고 소리치며 찬양 감사 경배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어 내 기도를 들었구나. 이젠 막연하다 못해 포기했고 심지어 완전히 잊다시피 한 소망을 그분은 알고 계셨네. 불가능이라고 완전히 단념 했었는데... 이 구석에서 이 보잘 것 없는 모양으로, 유대사회에서 최고로 비천한 자리에 떨어진 나를 하나님은 알고 계셨고, 하늘에서 관념하셨으며, 찾아오셨고, 고쳐 주셨네. 내가 하나님과 가장 먼 곳 아니 반대편에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하나님의 시선에선 가장 가까이 있었네. 그분이 사십 평생을 두고 내 곁을 떠난 적은 단 한 시도 없었네.”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이 절대 픽션이 아니요 사실이요 진리임을 알게 되었다. 그분이 바로 생명의 창조주요 주관자임을 부인하려야 할 수 없었다. 그 이름의 권능을 마음껏 찬미했다. 성경 기록에는 없어도 그 이후의 그 걸인의 삶에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이며 오직 그분을 위해 살고 죽었을 것은 틀림없다.

 

본문에서 기억할 사항은 이것이다. 베드로가 은과 금이 없어서 대신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해 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은과 금이 풍부하게 있었어도 그들은 구제보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의 권능을 선포했을 것이 틀림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부활생명의 주되심만을 증거했을 것이다.

 

은과 금이 많고 적음이 인간의 행불행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타 종교에서도 다 가르친다. 아니 상식과 이성과 기본 양심만 있어도, 실제로 우리 모두 체험으로 익히 아는 인생의 기초적 원리다. 그런 원리를 잘 알고도 돈의 노예가 되어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 문제다. 또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은 더 큰 불행이다. 아주 드물게 그마저도 깨달아도 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안은 전혀 알지 못한다.

 

너무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돈의 노예가 된 가장 대표적인 자들이 바로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다. 하나님을 알고 열심히 따르는데도 그랬다. 하나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고 입술로만 주여, 주여 했다. 그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져 믿음의 참 승리를 체험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통곡한 진짜 이유

 

그럼 베드로는 과연 어떻게 해서 이런 예수님의 권능을 지니게 되었는가? 그는 중상류 수준이었기에 돈과 행복이 무관함을 벌써 알고 있었다. 대신에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 유다가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하며 해방되는 것을 꿈꿨다. 과감하게 처자식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기대를 완전히 무산시켰다. 로마에 항거는커녕 말 한마디 못하고 무력하게 잡혀서 온갖 능욕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 스승이 너무 싫어졌다. 모든 것 버리고 삼년을 따랐지 않는가? 거기다 혹시 자신도 그와 같은 신세가 될 것 같아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 순간 스승이 예언한 대로 새벽닭이 울었고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했다. 그가 통곡한 이유가 스승을 배반한 잘못을 회개했기 때문인가? 물론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 잘 생각해보라. 도덕적 잘못 한 두 개 범했다고 즉, 지금처럼 다른 사람에게 한 약속이나 맹세를 어겼다고 통곡해본 적이 있는가? 미안해하고 사죄를 해도 통곡까지 하지 않는다. 저를 비롯한 모든 인간은 절대 그렇게 의롭지도 선하지도 않다.

 

거기다 삼십대 이후의 장년 남자들은 통곡하지 않는다. 인생에 한두 번뿐이다. 언제인가? 바로 부모가 돌아갔을 때다. 자기 실존의 뿌리가 잘려나간 것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이 땅을 딛고 있는 바닥이 무너진 것이다. 부모는 자기가 이 땅에 존재케 된 시발이자 근거였지 않는가? 베드로의 통곡도 바로 자신의 실존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의리, 도덕성, 인간성, 믿음, 담력으로 따지면 제자들 중에 최고였고 세상을 개혁함에 부족함이 없다고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자기의 목숨과 맞바꾸어야 할 순간이 막상 닥치자 완전히 휴지조각임을 깨달은 것이다. 목숨을 바쳐 주를 지키겠노라 방금 전까지 큰 소리쳤지 않는가?

 

세 번의 잘못된 행동이 통곡의 시발점이 된 것 분명하지만 그의 통곡의 내용은 달랐다. 나라는 존재가 겨우 이 모양 이 꼴밖에 되지 않는가? 자신의 존재 전부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완전히 발가벗겨 내던지는 울음이었다. 그의 통곡은 그때까지 세상의 교육 훈련 도덕 종교로 쌓고 치장해 놓은 자기 자아가 철두철미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다. 자기 속에 예수님의 사랑과 참 생명이 없다면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따르며 사랑한다 해도 아무 의미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너무나 은혜롭고 신비하게도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그 속에 임재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의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해주셨다. 하나님이 심어준 새로운 자아를 발견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의 권능으로 충족하게 된 것도 알게 된 것이다.

 

성령의 사람이란?

 

서두에 사도들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구제 대신에 치유의 선포를 할 수 있었다고 말씀드렸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베드로는 이미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에 일어났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시지 않고 제자들만 이룬 첫 이적이었다. 무슨 뜻인가? 성령의 역사가 특별한 시대 여건에서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사역을 하도록 일시적으로 강림한 구약 시대와 달라졌던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 이후로 성령과 은혜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주님 말씀대로 침례 요한의 때 이후로 천국이 이 땅에 강력하게 임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주인으로 영접한 우리 같은 신자들 모두에게도 성령이 영원히 내주하는 성령의 사람으로 바뀐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처음 택하여 불러낼 때에 약속대로 성령의 사람인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이다.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응답이 되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본문의 베드로처럼 어떤 사람이라도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즉, 권력 지성 재력 외모 등으로 구별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오직 그 사람 속에 예수의 참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로만 판단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최고로 형통해도 그 속에 예수가 없으면 최고의 실패자로 보는 것이다. 반면에 세상에서 아무리 가난하고 비천하여 손가락질을 당해도, 본문의 거지처럼 완전히 왕따가 되었어도 예수의 생명이 부어지면 함께 주님을 찬미하고 교제하고 힘을 합쳐 이미 도래한 천국을 강력히 침노하여 확장하는 것이다.

 

이 교회가 오늘 새로운 목사님을 모시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함께 돌리고 진심으로 축하한다. 젊으신 목사님이라 새로운 사역과 프로그램들을 시행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듯이 아주 중요하다. 여러분 모두 기꺼이 순종하시기 바란다.

 

그러나 자칫 그런 것들에 치중하다 보면 은과 금을 교회 안에 쌓아놓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 교회와 새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께 갖고 있는 뜻과 계획은 오직 하나다. 예수님만이 머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입술로 그분을 그리스도로 시인케 하는 것이다. 예수 부활 생명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은과 금이 없어도, 아니 있든 없던 예수님의 권능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사람 즉,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 모두가 이미 예수 인해 완전히 인생이 뒤집어졌고 그분의 참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세상 어떤 것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다.

 

믿음이 좋다는 증거는 오직 하나다. 눈물이 많아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아직도 모르는 자를 만나면 절로 안타깝고 가슴이 쓰려야 한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종교적 지식과 실력에 불과하다. 교인의 수자와 상관없이 단 한 명이라도 예수님의 사람으로 바꾸어야 한다. 혹시라도 통곡하기 전의 베드로의 잘못된 자신감처럼 세상의 것들을 세상에서 쌓은 것으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진심으로 통곡하며 철두철미 부셔버려야 한다. 대신에 예수 안에서 새롭게 얻게 된 자신감으로 충만해져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능에 힘입어 세상의 죄악과 흑암과 사망의 세력 앞에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기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다.

 

8/9/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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