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1] 헌금 봉헌 기도에 관해
어제 저녁 어머니와 저는 헌금대표기도에서 “하나님께 물질을 드렸으니, 물질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옳지 않다고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돈을 바라는 기도는 옳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삶이 어렵고 매우 가난한 사람이 몇 푼 모아 헌금을 드렸지만 더 이상의 삶이 힘들어져서 하나님께 물질을 구하는 것은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답변 1]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더 이상의 삶이 힘들어져서 하나님께 물질을 구하는 기도를 해도 되고 또 옳다”는 어머님의 말씀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해 가르치면서 “일용할 양식”은 구하라고 했습니다.(마6:11) 기본적인 의식주가 부족하다면 당연히 또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신자가 굶거나 헐벗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오히려 더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데스바네야에서 당신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방황토록하고 약속의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는 벌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40년 동안이나 즉, 그들이 죽을 때까지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생수로 먹이시며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릍지 않게”(신8:4) 보호 인도해 주었습니다.
주님은 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마6:25-34)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했으니 물질의 부족에 대해서 구해선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대신에 돈과 하나님 중에 한 주인만 섬겨야지 겸하여 섬기지는 말라고 했습니다.(마6:24) 자기 삶의 안전, 기쁨, 행복, 만족은 돈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시고 책임지심을 온전히 믿으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이지 돈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억만 장자가 되겠다는 탐욕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하나님 대신에 혹은 더 큰 힘을 발휘해 삶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믿는 것이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돈을 인생의 주인으로 혹은 하나님보다 우위에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 세상의 형통과 출세와 안락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라고 믿고 인생의 가치와 의미도 현실의 외적 성취로만 찾는 불신앙이 돈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에게 정말로 수입이 없어서 기본적 의식주마저 위협을 받는다면, 예컨대 실업 상태에서 직장을 구해야 한다면, 월세를 못 내어 셋집에서 쫓겨나갈 형편이라면, 생업으로 하는 가게가 너무 안 되어 문을 닫을 지경이라면 간절히 기도드려야 합니다. 기도의 근본적 의미는 일단 자기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일예배의 헌금봉헌 대표기도에서 “물질을 드렸으니 물질로 채워달라.”고 하는 간구는 문제가 다분이 있습니다. 질문자님의 염려대로 자칫 물질을 바치면 하나님이 물질로 보상해준다든지, 아니면 보상을 바라고 물질을 바쳐도 된다는 잘못된 믿음을 교인들에게 심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해를 막기 위해서 “정말로 물질에 너무 궁핍하여 일상적 삶마저 힘들어서 믿음이 떨어지고 시험에 빠질만한 교우들이 있다면 새롭게 그 영혼에 위로와 힘을 주시고 현실적으로도 주님만의 때와 방식으로 도와 달라”고 그 기도의 내용과 표현을 바꿔야 합니다.
[질문 2] 교회의 비전에 관해
저희 교회 비전은 333비전입니다. 300명의 사역자, 3000평의 성별된 거룩한 땅, 30000명 이상의 성도가 모인 교회여서 333비전으로 부릅니다. 저는 333비전이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숫자로만 성도의 수와 땅의 평수를 생각하는 것은 성도 그 자체의 믿음과 성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교회 비전에다가 333비전이라고 적어놨다고 해서, 그 333비전을 이루기 위해 성도들에게 강압하는 것도 아니고, 성도들의 믿음의 성숙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답변 2]
교회의 비전을 수치로 정하는 것은 성도 개인의 믿음과 성숙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질문자님의 생각은 아주 예리하고도 정확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에 찌들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게 변화시켜서 십자가 복음의 일군으로 세우는 일에 매진하면 됩니다. 교회를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여 그 집단 전체의 외적인 성장만을 목표로 내세우는 그런 지표에는 이런 맥락에서 하자가 있습니다.
거기다 어떤 맹세라도 하지 말라고 명한 예수님의 말씀에도 위배됩니다. 맹세를 하지 말라는 근본 이유는 인간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장래 일을 통제는커녕 예측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지나치는 것은 악이라고 지적했습니다.(마6:33-37)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죄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수치화시켰다는 것은 일종의 장래 일에 대한 맹세이므로 원칙적으로는 주님의 뜻과 상충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 전체의 비전은 맹세라기보다 담임 목사의 목회철학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목표 내지 계획입니다. 신자에게 피부로 실감나는 동기부여를 시키고 함께 힘을 모아서 주님의 일을 달성하자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 영적 공동체로 세속 집단들과는 구분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연약하고 나태하며 죄의 본성이 살아 있는 인간들이 모인 곳입니다. 지도자가 교회의 근본 소명을 구체적으로 현실에 접목시킬 목표와 그 실천 방안을 마련해서 독려할 필요도 분명 있습니다.
나아가 교회가 처한 지역사회와 시대와 문화에 맞추어 하나님이 그 교회에만 맡기는 특별한 소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담임목사는 자기 교회 특유의 소명을 잘 분별하여 교인들에게 구체적으로 주지시키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예컨대 탈북자들이 한둘씩 모이기 시작하면 북한선교를, 대학교 근처에 위치해 있다면 캠퍼스 선교를 소명으로 받아 그 구체적인 목표와 시행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 그런 경우 공동체 전체의 목표를 내세우되 간략하게 그 내용을 대변할 수 있는 구호, 모토, 슬로건으로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교인들이 외우기 쉽고 기도할 때마다 기억나게 하며 그럴 때마다 헌신의 결단과 열정을 살릴 수 있는 표현이어야 합니다. 예의 333은 외우기 쉽다는 장점에 초점을 맞춘 구호인 셈입니다.
따라서 어머님 말씀대로 교회가 그 비전을 지나치게 강요하지 않고 신자 개인의 영성도 잘 보살피고 신앙 교육에 전념한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교회가 공동체 전체의 어떤 목표를 내건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며 때로는 그래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단 그 모든 목표와 구체적 실현방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분의 영광이 높여지는데 모든 초점이 모이고 그렇게 되도록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질문자님 염려대로 그런 구호나 구체화된 목표를 아예 내세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의 333비전은 목사님의 의도나 교회의 형편을 자세히 모르는 입장에서 언급할 입장은 아니지만 몇 가지 염려스러운 측면은 있습니다. 우선 교회 전체의 외적성장만을 목표로 삼은 듯하며, 구체적 수치로 확정함으로써 교인들에게 강압적인 부담감이 자연히 생기게 되며, 교회에 왜 꼭 3천 평의 땅이 필요한지(교회건축용이겠지만 이 또한 외적성장만 목표이기에) 의문입니다. 교회의 외적성장이 반드시 십자가 복음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복음으로 부흥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외적인 성장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자 하나님의 뜻입니다.
11/10/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