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 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딤전5:16)
많은 신자들이 주위에 어려운 사람이나 선교사를 직접 도우려니 섬기는 교회와 목사는 등한히 하고 교회 밖의 사람을 우선적으로 섬기는 잘못을 범하거나, 심지어 현재 교회를 속이는 것 같은 가책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섬기는 교회에 드릴 헌금이나 헌물이 그만큼 줄 것을 염려하는 충성스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직접 도우면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닌지?”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섬기는 교회에 지정헌금 방식으로 해서 교회명의로 도우라는 것이 저의 원론적인 답변입니다. 바울사도는 본문에서 그런 경우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 지지 말게 하라”고 명합니다. 언뜻 제가 드리는 답변과 상충되는 것 같습니다.
사도의 의도는 자기가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는데도 자기는 손도 깜짝 않고 즉, 교회에 헌금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교회에만 맡겨서 교회 재정과 인력을 축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참 과부는 본인이든 교회든 누구라도 도와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본문의 기본적인 뜻입니다. (과외의 주제이지만 성경이 과부의 구제를 최고로 강조하는데 고대에는 과부만큼 생활대책이 전혀 없는 부류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또 그런 관점에서 구약의 형수와의 계대결혼법이나, 모세의 이혼증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구제나 선교 헌금을 교회를 통해 혹은 직접 본인이 하는 방식 각기 장단점이 있습니다. 먼저 교회를 통해서 하려면 헌금을 받는 자에겐 누가 했는지 모르도록 반드시 익명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차피 지정헌금이라 직접 도와주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직접 도와주었을 때는 아무래도 나중에 보답, 최소한 칭찬, 감사인사라도 은근히 바라는 잘못된 마음을 제거하려는 뜻입니다. 또 교회가 정말로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좋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나아가 특정교회를 섬기는 신자로서 앞에서 말씀드린 그런 신앙양심상의 가책도 없앨 수 있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구제와 선교의 동기를 부여하고 적극 참여 실현하는 효과도 불러일으킵니다.
반면에 교회를 통해 돕게 되면 불신자일 경우에 한해 자칫 교회가 영혼구원이 아닌 구제전문기관으로 오해할 우려는 있습니다. 차후에 도움이 끊기면 역으로 섭섭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직접 돕게 되면 한 개인에 대한 감사와 칭찬이 어쩔 수 없이 따르겠지만 조직체인 교회보다는 적시에 적절한 도움을 손쉽게 줄 수 있습니다. 체계적 전문적으로 구제사역을 하지 않는 교회로선 자칫 그 상대에게 일시적 과시성 도움이라는 잘못된 인식마저 심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바 중심이 직접 혹은 간접의 구제방식에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구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참 과부라면 본인이든 교회든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거하는 전이 된 성도는 혼자라도 교회입니다. 성도가 행해야 하는 일이라면 바로 교회가 행해야 할 일입니다.
바꿔 말해 교회가 행하는 일이 바로 참 과부를 돕는 구제라는 것입니다. 그럼 헌금하는 목적도 바로 그것입니다. 구약의 화목제물이나 십일조의 뜻이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신자가 직접 선교사나 불우이웃을 도움으로써 섬기는 교회에 헌금이 줄 것을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 염려는 오히려 이런 성경진리를 잘못 알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신자나 교회가 정작 신경 써야 할 것은 다른 쪽입니다. 말 그대로 참 과부를 참 된 방식으로 구제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은 동일합니다. 거짓 과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위장하거나 잘못된 의도나 편법으로 구제를 악용하려는 자가 반드시 나옵니다. 정말로 꼭 도움이 필요한지, 도와주지 않으면 도무지 안 될지 정확히 판단해야 합니다. 그 사정은 가까운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주님이 이웃 사랑을 그토록 강조한 까닭입니다.
또 참된 방식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단순히 익명으로 보답을 바라지 않고 도우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교회에 나올 것 같은 자, 기독교에 호감을 보이는 자, 자기와 가까운 자만 도와선 안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당장 도움이 필요한 자라면 그 자격, 신분, 위치, 소속, 어느 것에도 차별을 두어선 안 됩니다. 어려운 자는 누구라도 즉시로 모든 것을 동원해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합니다.
무엇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도와야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생색내지 않는 것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도와주었으니 일단 교회에 한 번이라도 나와 보라는 식의 권면조차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른손이 행한 것을 왼손이 모를 리 없습니다. 둘 다 자기 몸에 붙었는데 오른손으로 글을 쓰고 왼손으로 책장을 넘기는데 본인이 모른다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럼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아주 많습니다. 매일 행하고 있는데도 모를 정도입니다. 예컨대 밥을 먹을 때 오른손이 무슨 반찬을 먹었고 그 때 왼손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일상적 다반사처럼 하는, 몸에 붙은 생활습관처럼 하는,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실 정도이지만 일단 행하기만 하면 편안해지는, 밥 먹는 일처럼 너무 일상적이고 평안해서 하고나선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기억할 필요도 이유도 없고 실제로 조금만 지나면 전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일단 구제하면 모든 것을 잊어야 하고 교회에서도 투명하게만 이뤄졌으면 더 이상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이지만 가장 중요한 방식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힌 일로 당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그럼에도 옹호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예수님을 다시 열심히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막상 옥 안에 갇힌 바울은 전하는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즉, 자기를 비방하는 쪽이라도 열심히 예수를 증거하고 있으니 그로써 하나님에게 기쁜 일이 되고 자기도 기뻐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제도 직접 혹은 간접 어느 방식이 되었든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구제하면서 전도하라든지, 앞에서 말한 대로 그것을 빌미로 교회 나오라고 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모든 과정에 예수님의 사랑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 복음전파보다 신자나 교회가 예수님의 사람과 나라로 이미 바뀌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 받는 자는 물론 제 삼의 누구라도 주님의 빛과 향기를 보고 맡을 수 있는 신자와 교회가 또 그런 모습으로 구제해야만 합니다.
10/16/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