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대출해서 헌금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한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모 교회는 대출해서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헌금을 내라며 은행의 대출을 알선하는데, 그 은행이 사실상 교회에서 관리하는 협동조합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율은 약 9% 정도라 고리는 아니지만 분명한 점은 교회가 대출을 알선하고 있고, 그 자금은 교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교회를 건축하는데 있어 대출을 받아도 걱정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 경제적 여건을 돌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게 당연하다며 대출을 받아 헌금하지 못하는 건 믿음이 부족한 것이라고 질책하기도 합니다.

 

- 하나님께서 대출해서 헌금해도 학개서의 말씀처럼 그들을 돌봐주실까요?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학개 1:6)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학개1:9)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그 때는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학개 1:9-15)

 

모 교회는 학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교회당의 건축에 힘쓰지 않고, 자신의 가정의 경제적 형편 때문에 헌금하기를 두려워하고, 대출해서 헌금하는 건 도저히 자신이 없다고 말하면 학개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 재산을 불어버리시고 날려 버리시는 징계를 하시지만 건축에 동참하면 그 가정을 돌보신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과연 성경적인 내용인지요? 신자가 대출을 받아 헌금하는 것이 성경으로 볼 때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인지, 그리고 교회가 이런 일을 추진하고 권장하는 게 바람직 한 일인지.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이런 은행이 설립되고 대출하고 이자를 받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지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답변]

 

이 질문을 처음 대하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너무나 갑갑해졌습니다. 아직도 이런 교회들이 있으니, 말씀하신 이단뿐 아니라 솔직히 정통복음주의 교계 안에도, 참으로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답변을 드리기 전에 이 주제와 견주어 참고가 될 만한 미국의 사례 둘만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의 사례 둘.

 

첫째는 한 개인의 빚이 아무리 많아도 세금과 연방정부학자금대출 체납 외에는 집이 한 채인 경우 그 집을 압류 경매하지 못합니다. 자동차 한 대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집은 30년 상환대출, 자동차는 5년 할부로 구입하는 것이 통상적이라 법적소유주가 개인이 아니라 금융기관인 탓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출금을 다 상환하고 개인소유라도 그러합니다.

 

기본적으로 집은 눈비를 피하는 장막의 개념이 있고, 미국에선 자동차가 없으면 아예 일상생활조차 영위할 수 없음을 감안한 것입니다. 국가가 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는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바꿔 말해 미국에선 집을 담보삼아 대출받아 헌금하라고 권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으며 그런 발상 자체는 비성경적인 차원을 넘어서 아예 몰상식한 일로 치부된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이곳 LA의 한인2세 영어교회의 실제 사례입니다. 초등학교 강당을 주일만 빌려 예배를 보고 상가에 작은 사무실 하나를 빌려 교회사무실로 사용했습니다. 미국에선 부부가 거의 다 직장생활을 하므로 새벽기도나 주중 집회는 사실상 할 이유도 없고 실제로 모일 사람도 거의 없기에 그 정도로도 충분히 교회는 유지됩니다. 그러다 차츰 교회가 부흥되어서 사역의 종류도 늘어나고 주중에도 모여야 할 필요성도 늘고 주일에도 한식으로 식사교제도 하고 싶은 즉, 자체 예배당을 가져야만 할 단계가 되었습니다.

 

처음 그런 계획을 발표했을 때는 교인들의 반응이 소극적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아직은 교회 헌금사정이 자체 건물을 구입해서 대출금을 갚아나가기에는 조금 부담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담임목사도 믿음으로 작정헌금하자고 독려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았습니다. 몇 년을 더 기다렸고 교회는 더욱 부흥되었습니다. 드디어 교회형편에 충분히 여유가 있다고 여겨지자, 그것도 교회외부의 컨설팅회사에 타당성 조사를 시키고 차후 모기지 상환계획까지 마련해서 전교인 앞에 프레젠테이션을 시켰습니다. 당연히 상당액수의 컨설팅피도 지불했습니다.

 

현재의 재정 상태와 차후 성장까지 예측하여 대출금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건물을 구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담임목사나 교회지도부의 사적 욕심이 아니며 절대 무리한 계획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시킨 것입니다. 전교인들은 자연스레 기꺼이 참여했고 예상했던 예산보다 더 많은 건축헌금을 하였고 큰 창고건물을 구입하여 교회로 개축허가 받았습니다. 자연히 교인들의 교회 지도부에 대한 신뢰와 자체건물에 대한 자부심은 고취되었습니다. 더 큰 열성으로 모이기에 힘쓰고 언제든 원하는 방식대로 집회와 사역을 할 수 있어 계속 부흥되고 있으며 가장 성공한 2세 교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일용할 양식.

 

이 두 가지 예에서 본 받아야 할 점은, 사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원리임, 무엇입니까? 우선 하나님도 모든 인간이 기본적 의식주를 갖추는 것을 마땅히 바라시고 또 그렇게 마련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절히 내리시며 특별히 하나님을 순전히 따르는 당신의 백성에게는 더 그러합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하지 않게 하시고 평안한 잠을 주십니다. 즉 모든 이에게 적절한 장막은 필수적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했음에도 아담과 이브에게 손수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주님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라고 했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는 믿음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 미국의 세속정부도 국민 각자의 하나 있는 장막만은 보호해주려는데,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실현할 교회가 그 하나 있는 장막마저 날아갈 수 있는 위험을 감당하라고 부추기고 그러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미국은 처음부터 청교도 정신에 입각하여 건국했기에 모든 법규, 제도, 관습에서 성경적 원리가 많이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학개서에서 말하는 내용도 흔히 목사들이 교회건축 헌금에 금과옥조처럼 휘두르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솔직히 미국에서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헌금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말했다간 당장에 교회 안팎에서 상식도 없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비난이 빗발칠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둘째로 교회는 건물도 사역프로그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의 2세 교회는 교회건물을 마련하는 것을 사역의 첫째 내지 중요 목표로 삼지 않았습니다. 예배드리고 말씀 공부하는 것에만 전념하다가 건물의 필요성이 시급하고 불가피해지자, 모든 교인들이 자체 건물이 있어야만 되겠다고 절감하게 된 후에, 비로소 건축계획을 마련한 것입니다. 부흥이 먼저이고 건물은 뒤였습니다. 건물이 먼저이거나 부흥시키기 위해선 건물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완전히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따로 구별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건물이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따르는 자는 세상에서 환난을 받으며,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야 하므로 머리 둘 곳도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때는 숨어서 가정집은 물론 지하공동묘지에서 모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기독교가 가장 부흥했었고 무엇보다 가장 순전한 기독교였을 때는 건물 없이 숨어서 모였을 바로 그 때였습니다.

 

물론 이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그때와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교회 건물이 있을 이유와 필요는 많습니다. 가능한 자체 건물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 자체가 첫째 내지 중요사역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것 외에 다른 사역프로그램 등은 교회 본연의 소명이라기보다는 부차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에, 특별히 교회건축에 교인들의 정력과 여유와 재정이 소진 될 때에는 교회 본연의 임무를 태만하게 되고 나아가 교인들 개인의 믿음도 바로 세우지 못합니다. 실제로 교회건축 때에 신자들이 가장 많이 시험에 들고 심지어 그나마 있던 믿음마저 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교회는 물론 교인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교인 각자가 영적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게 되는 것 하나입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사역은 오직 이 목표를 충족시키는 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교회의 예배, 기도모임, 성경공부, 교제, 전도, 구제, 모든 사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은혜만 증거 되고 실현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거룩한 이름만 높아져야 합니다. 혹시라도 이 목표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그런 사역들은, 교회 건축은 사역이 아니라 오히려 일임, 당장 그만두어야 합니다. 지하 공동묘지에서 기독교가 가장 부흥했고 성령의 역사 또한 가장 충만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발적 헌금

 

마지막으로 교회의 헌금은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 원칙입니다. 자발적으로 기꺼이 하려면 신자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현실적으로는 자기 기본적인 의식주에 지장을 주지 않아야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이 집 팔아서라도 무리하게 헌금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회는 여러 사역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땅 끝까지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세상 죄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오직 거룩하게 구별된 자들이 주님께 경배하며 성경의 진리를 배우는 모임일 뿐입니다. 이 일이 가능하도록 모이기만 하면 어디든지 교회이며 만약 그 일에 방해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소속 교인들의 자발적이고도 기꺼운 참여가 불가능한 일이나, 심지어 사역이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기 2세 교회의 목사님은 헌금을 절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이 교회가 협소함에 불편을 스스로 느꼈고, 반면에 더 자주 자체 건물에서 모이고 싶다는 소망이 저절로 생겼고, 또 충분히 그럴 여유가 있다고 교인들 모두가 확인할 수 있을 때에 건물구입 계획을 세우고 발표했습니다. 교회재정은 물론 교인들의 기본적 의식주에 무리가 가지 않고도 대출금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때에 실행했습니다. 목사님의 개인적 야망이 아님도 일정액의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외부의 공신력 있는 기관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산안 보다 더 많은 헌금이 모였습니다.

 

주님은 자기 생활비 전부를 바친 과부를 칭찬했습니다.(눅21:4) 바울 사도도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가운데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했다고 칭찬했습니다.(고후8:2,3) 그리고 그렇게 헌금한 자들에게 분명히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며,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신다”고 격려했습니다.(고후9:6,8)

 

그러나 기억할 것은 가난한 과부도, 마게도냐 교인들도 자원해서 기쁨으로 헌금한 것입니다. 결코 당회장이나 사도나 장로가 강요 심지어 권면해서 한 것도 아닙니다. 우선 힘에 자니긴 하지만 “자원하여 참여했다”(고후8:2,3)고 분명하게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고 헌금의 원칙을 바울은 명확히 밝혀 놓았습니다.

 

반면에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고 한탄했습니다. 급기야 말라기 선지자는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고 선포했습니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해도 자발적으로 기쁨과 감사와 온전한 경배함으로 하지 않으면 더러운 헌금이 됩니다. 교회건축에 헌금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고 기대하는 것은 이미 더러운 헌금이 됩니다. 생활비 전부를 다 헌금한 과부가 수십 배 뻥튀기한 보상을 받으리라고 기대했다면 모든 이의 심령을 꿰뚫어 아시는 예수님이 절대로 칭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녀는 당장 내일 굶는 한이 있더라도 즉, 하나님이 보상해준다는 믿음은 전혀 없이, 주님께 자신의 전부를 내어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성전 문을 닫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복 받으려는 헌금은 성전 문을 닫더라도 절대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거창한 성전에서 경건해 보이는 종교적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학개서가 말하는 참 뜻

 

문제는 학개서에서 자기 집을 짓기 전에 성전부터 지으라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판벽한 근사한 집에서 평안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모시는 집은 아직 짓지도 않고 있다고 분명히 야단치셨습니다. 신자의 집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더 중요하다고 하나님 당신께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뜻 집을 담보로 대출을 해서라도 교회 건축에 성의를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독촉하고 심지어 믿음 없다고 정죄 겁을 주는 목사들의 설명이 타당해 보입니다. 이는 성경을 자기들의 유익에 맞추어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는 삯군 목자의 전형적 예에 불과합니다.

 

구약시대는 물론 예수님 당시의 성전과 지금의 교회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성전은 제사장들이 동물 희생 제사를 매번, 매년 드림으로써 이스라엘 전 백성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율법에 따른 구원을 실행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잘라졌습니다. 복음이 율법을 대체한 것입니다. 동물 희생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영단번의 제사를 상징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9-12) 율법(성전)의 시대는 끝나고 복음(교회)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본 질문과 연결하여 성전에서 생각해볼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 뿐인 중앙 성소였습니다. 모든 종교 활동이 이곳에서만 이뤄졌습니다. 나중에 생활이 복잡해지고 예수님 당대처럼 각지에 회당이 생긴 후에도 모든 이스라엘 남자 성인은 최소 일 년에 세 차례는 성전 순례를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도 그곳에 임재하겠다고 분명히 선언했으며 무슨 일이든 그곳에 와서 기도하고 제사 드려야 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한국 전체를 통 털어 기독교 교회라고는 서울에 하나뿐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건축을 등한히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대한민국 전체에 교회 건물로 하나만 세우는 것이 하나님 뜻이고, 모든 교인들이 일 년에 최소 세 번씩은 그곳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성경에 명시적으로 선언되어 있었다고 칩시다. 그럼 사천만 국민이 천 원씩 헌금해도 사백억, 만 원씩 하면 사천 억입니다. 얼마든지 근사한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지금 학개 선지자의 꾸짖음은 바로 그런 정도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전혀 부담가지 않고 자원해서 기쁨으로 헌금하면 충분히 중앙 성소 하나는 지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집을 담보로 해서 건축할 이유까지는 전혀 없습니다. 학개의 이 말씀으로 그렇게 해석 적용할 수 있다니 도리어 신기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들더러 집을 팔아서, 혹은 담보로 대출 받아서 교회건축헌금 하라고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소망, 목적, 아니 전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 백성이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을 상징하는 아니, 실제로 이뤄지는 장소였습니다. 한마디로 성전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율법에서 동물제사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온전한 믿음과 순수한 속죄가 전제된다면 말입니다.

 

지금 학개는 피 끓는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탄식했듯이 형식적 가식적 기복적 제사만 드리고 우상숭배를 겸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벌을 받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포로 귀환하여 제일 먼저 행할 일은 훼파된 성전을 다시 건축하여서 하나님과 교제 동행을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중앙 성소를 통해 온전히 율법에 순종하고 순전한 믿음으로 돌아가는 영적 부흥을 이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요즘으로 치면 일인당 천원, 만원만 내면 되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정말로 교회 건물이 하나뿐이라면 누가 만원 아까워서 헌금하지 않겠습니까? 집 대출 받지 않고도 백만 원 아니 천만 원 헌금할 자 얼마든지 많이 나올 것입니다. 학개의 이 말씀을 현대 교회의 예배당 신축에 적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너무나 황당한 억지춘향 식의 궤변입니다.

 

성전에서 회당으로

 

“네가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을 취할지 말찌니 곧 돈의 이식, 식물의 이식, 무릇 이식을 낼 만한 것의 이식을 취하지 말 것이라.”(신23:19) 같은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는 돈을 빌려주어도 이자를 받지 말라고 율법은 엄격히 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학개 선지자의 말씀의 참 뜻도 모른 채 각자가 주택대출 받아서라도 교회 예배당부터 짓자고 권면 강요하려면 이 율법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운영하는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으라고 합니다. 율법을 이것은 지키고 저것은 지키지 않는 모순을 범하는 차원을 넘어서 교회가 칼만 안 든 강도 노릇하고 있습니다. 이미 익히 듣던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이 성전에서 환전상과 제물 파는 장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해주면서 그 장사치들에게 뇌물을 받아 치부했습니다. 주님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바꿨다고 야단치면서 성전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지금 그와 똑같은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뒷전에서 암암리에 부정을 저질렀지만 질문하신 내용으로는 공공연히 교회가 성도의 주머니를 도적질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짓입니까? 그야말로 천벌도 안 두려운 심장에 털 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그 엄청나게 위용을 자랑하던 헤롯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없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겨우 몇 십 년 안에 로마에 의해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전 건물이 여호와 신앙의 본질이 전혀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그 성전을 헐어도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선언했는데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십자가에 찢어진 주님의 몸이 성전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에게 성령을 영원토록 내주케 하여 “성령의 전”(줄이면 성전)이 되게 합니다. 성도 개인이 바로 성전입니다. 또 예수 십자가의 같은 은혜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은 그 어디라도 성전입니다. 참 안식을 주시는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님의 날에 그분의 이름을 높이러 모이는 것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후의 영적 부흥을 위해서, 이스라엘 전 국민에게 다시 영적인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성전 건축에 모두 참여하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성전이 없던 바벨론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진정한 회개와 순전한 예배는 그곳에서 더 활발히 이뤄졌을 것입니다. 동물 희생 제사는 하지 못해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은 더 누렸을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배교와 우상숭배 죄악을 심판하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한 걸음씩 역사를 전진시키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간섭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로 열 가정이 모이면 회당을 조직하여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뿐인 중앙 성소에 모일 수 없었기에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주님도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에 성전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써 성전 시대가 끝났음을 당신의 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짓는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교회에 건물이 전혀 필요 없다거나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에 맡긴 사역을 하려면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건물이 교회도 아니며 건물건축이 첫 째 가는 사역도 아닙니다. 교인들이 스스로 건물을 증축 구입 건축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교회재정 형편에 적합할 때, 교인들에게 부담주지 않고 무리하지 않게 하면 됩니다.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 은혜를 채워주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미리 은혜를 바라고 헌금하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교회 목사가 권면 강요에 따라 하면 내키지도 않는데 강제로 상거래 계약서에 억지로 도장 찍는 꼴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 가장 비슷하게 비유할 수 있는데 부모가 주는 보상을 바라고 말 잘 듣는다면 참 효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식들 간에는 나중에 반드시 유산 다툼이 생깁니다. 역으로 따져도 자식이 순종 헌신 충성해야만 사랑하는 부모라면 부모로서 자격부터 없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하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 어느 지파에게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나 ....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삼하7:5-1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항상 함께 하시고 모든 대적을 멸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성전을 짓지 말라고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성전 건축이 당장 급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방 대적을 멸하는 것부터 당신께서 앞서 행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방 대적을 다 멸하고 이스라엘에 평화시대가 오면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성전을 짓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 보기에는 성전을 짓기에 가장 합당한 다윗이 그러지 못한 첫째 이유는 전쟁을 치르느라 손에 피를 많이 묻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방대적의 위협이 완전히 없어진 솔로몬 때에 성전을 짓게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도 가장 강성한 때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집을 지어주고 성전도 당신께서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짖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 솔로몬의 성전과 하나님을 위하는 열성이 너무 과해서 그 성전 짓는 일이 왕국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오늘날에 교회 건축하면 꼭 교회가 쪼개지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화의 실체

 

교인이 연로하여 주택을 처분하고 양로원에 들어가서 기도하며 여생을 마칠 계획으로 그 자금만 남기고 자발적으로 건축헌금을 낼 수는 있습니다. 또 집이 여러 채인 사람이 교회가 전혀 권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먼저 그 중 하나를 처분하거나 대출받아 헌금하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두 경우에도 목사는 그들에게 경제적 손실과 부담이 가지 않는지, 과연 그래도 생업에 지장이 없는지 함께 염려하고 말려야 할 형편입니다. 교회가 먼저 하나 있는 집마저 담보로 해서 대출 받아 헌금하라는 것은 죄송하지만 그 목사부터 하나님께 큰 벌을 받을 짓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자에게도 이른 비와 늦은 비 즉, 일반적 은총을 베푸십니다. 의식주의 기본은 해결해 줍니다. 그러지 못함은 인간의 죄로 인해 이 땅이 타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낮의 해와 비를 피하고 밤의 추위를 막는 장막이자 가족의 안식처인 집을 맡겨서 헌금하라고 하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목사가 지어낸 말에 불과합니다.

 

나아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대박 같은 축복을 주시고 그것을 믿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겁을 주어 돈을 더 받아내려는(목사 본인의 의식했던 못했던, 못했다 면 영적통찰력이 목사가 되어선 안 되는 수준임) 간교한 흉계일 뿐입니다. 학개 선지자 본인의 말을 빌려서 성전건축에 등한히 한 자들에게 주는 벌이 어떠한지 봅시다.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언뜻 엄청난 벌을 받은 것 같으나 사실은 기후여건이 정상 수준에서 조금 벗어난 것뿐입니다. 한마디로 통상적으로 있는 흉년이 든 것뿐입니다. 평소보다 수십 배의 엄청난 형벌을 가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는 일이 잘 안 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복을 받는 모습은 그 반대일 뿐입니다. 일상적인 일에 어려움이 제거되고 그냥 순전히 풀리는 것입니다. 과수원에 황충이 생기지 않고 이른 비 늦은 비가 적절히 내려서 평년작 이상의 수확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사업이 수십 배로 잘 되거나 로또에 당첨되는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성실히 사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복입니다. 요컨대 신자더러 집을 담보대출 받아서 통상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정상생활을 구태여 어렵게 만드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한 마디로 줄이겠습니다. 헌금은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때로는 극한 가난 가운데 힘에 넘치도록 하더라도, 신자 쪽에서 먼저 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헌금은 아무리 거창한 종교적 일에 빚대어 경건한 명분을 내세워도 잘못된 헌금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돈이 없어서, 건물이 없어서 당신의 일을 못하실 분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 영혼이 바뀌어서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여서 모든 이로 그분의 거룩한 이름 아래 무릎 꿇게 만드는 것입니다.

 

질문을 여럿 주셨지만 일일이 구분해서 답변 드리지 않아도 모든 의문은 해소되었으리라 믿습니다. 한 가지만 첨언하자면 상기에 기술한 헌금에 대한 원리가 심오한 기독교 교리나 난해한 신학이론에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성경만 잘 읽고 분별하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진리가 인간의 합리적이고 선한 이성, 상식, 양심과 초월은 해도 절대 상충하지 않습니다. 성경만 잘 연구해도 영적 분별력은 생깁니다. 질문하신 대로 이미 상식적으로도 이상하면 사실상 이상한 것입니다. 그럼 성경 안에 분명한 답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문제가 많은 까닭은 잘못된 삯군 목자 탓이 첫째이지만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지 않는 잘못도 아주 큽니다.

 

10/2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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