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일관된 요지는 믿음이 결코 특정한 하나님의 일과 종교적 행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는 실력처럼 다뤄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에 대한 너무나 부족한 이해입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나고 풍요로운 내용을 함의(含意) 합니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은혜와 권능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단순히 눈앞의 일들을 해결해 내는 능력으로 간주하면 그건 너무나 풍성한 부분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들어가면서. p.17-18)》
『기독교를 뒤집어 읽어도 오강남 박사가 말하는 그런 예수는 없다.』라는 귀한 변증서를 통해 알게 되었고, 홈페이지를 통해 수년 간 교제 나누고 있기에, 저자의 두 번째 책 발간 소식은 정말로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읽은 바 있으나, 선물도 할 겸, 출간 즉시 구입했습니다.
저자의 글들을 대할 때마다 ‘곱씹어 읽어야 할 내용’이라는 상념이 떠오르곤 합니다. 건성으로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감 잡기 힘들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진짜 이유』를 읽으면서도 동일한 느낌이었는데, 불현 듯 머드축제와 칠레광부 구조 이야기가 연상되었습니다.
충남 보령시의 머드축제는 유명합니다. 경험해 보지는 못했으나 피부에 무척 좋다고 합니다. 이미지는 ‘부드러움’입니다.
한편 지하 700 미터에 고립되었던 칠레 광부를 구출하기 위해서 불사조(피닉스)라는 구조캡슐이 이용되었는데, 바위와 흙이 뒤섞인 땅을 수직으로 뚫어야했습니다. 이미지는 ‘딱딱함’입니다.
우리 기독신앙도 부드러움과 딱딱함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양자의 비율은 소수의 부드러움과 다수의 딱딱함으로 이루어졌을 듯싶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극소수의 머드(보령처럼)와 대다수의 바위로 이루어졌듯이 말입니다.
수많은 목사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이 방언과 환상과 신유와 축사 등을 부각시킬 때 감성이 교감하는 것은 보편적 현상입니다. 눈물도 나고 흥분도 되고 마음이 들뜰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분명 성경에서 확인되는 올바른 영역에 속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기독신앙의 전부인양 오해하는 데에 있습니다. 기독신앙이 이러한 은사주의적 현상까지 포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비율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오히려 낮습니다. 보령시의 머드가 우리 국토에서 차지하는 비율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반대로, 기독신앙이 힘들고 어렵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을 결코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눈물콧물 흘리고 난 후에라도 반드시 조우하게 되는 처절한 인생사를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무수한 예를 들 수 있지만, 지면관계상 두 분만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적과 이적 이후에도 특별히 강조하거나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깨어있는 성도라면 향유사건도 바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냥 지나치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항상 일상으로 되돌아오셨습니다.
다음,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도 삼층천을 보고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사람들이 신으로 오해할 정도였고(행14:12) 손수건만 얹어도 병이 낫기까지(행19:12)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떤 기적과 이적을 강조하지도 자랑하지도 기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역시 지나쳤을 뿐입니다. 그도 항상 일상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바울의 일상을 극적으로 설명한 곳이 바로 고후12:23-28절입니다. 고생바가지의 삶이었습니다.
자, 예수님과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기적/이적(부드러움의 이미지)과 일상(딱딱함의 이미지)의 비율을 유념해 봐야 합니다. 일상의 비율이 훨씬 높음을 읽어내야 합니다.
혹자는 성경을 환청으로 읽는 것처럼 말들 합니다. 통독 한 번 안 했어도 하나님께서 항상 환상으로 구절을 보여주신다고 합니다. 비록 직접 경험은 못했지만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현상이 성경을 항상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함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꼭 지적하고 싶습니다. 환청식 성경읽기는, 머드처럼, 아주 극소수의 경우로 한정시켜야만 합니다.
비록 환청을 못 듣더라도, 성경은 곱씹어 읽어야 합니다. 맛도 없고 딱딱하고 지루하겠지만, 성경은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대부분 딱딱한 바위와 거친 흙으로 구성된 것만큼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서두에서 머드축제와 칠레광부 이야기를 하면서 ‘부드러움과 딱딱함’의 이미지를 말했습니다. 하고 싶은 함의는 이것입니다. “부드러워서 피부에 좋은 머드는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부드러움을 지나치게 추구할 때 개인주의로의 변질을 막기 어렵습니다. 반면 딱딱해서 힘들었던 칠레 광부 구출작업은 타인을 위한 일입니다. 딱딱함을 지향할 때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가치를 얻게 됩니다. 머드축제와 칠레광부 사건을 인용한 본뜻입니다.”
저자의 책은, 읽기 쉬운 은사주의적 책들과 달리, 부드럽지 않습니다. 반대로 딱딱합니다. 본의 아니게 수면제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어른이라면(육체적 연령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억지로라도 읽어 봐야 하고, 그리하여 우리 신앙을 뒤돌아보는 계기로 활용해야 할 양서입니다.
끝까지 읽고 나면 ‘딱딱한 바위를 뚫고 힘들게 뽑아 올린 지하 암반수와 같은 정갈함’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독신앙의 깊은 맛과 참 멋을 나누어준 저자에게 감사드립니다.
독후감에 나타나 있듯이,
가벼운 간증문에 익숙한 일부 독자들에게는 어려운 책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마음도 듭니다만,
성경을 묵직하게 읽으시는 분들에게는 아주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보다 많은 분들에게 읽혀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