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이 있는 콘도 단지의 어떤 집의 차고 문에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의 얼굴을 크게 부쳐 놓았다. 차고 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산타가 인사를 하는 셈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흔히 보는 풍경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 가면 그만이련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목사의 직업의식 때문인지 성에 안 차면 참아 넘기지 못하는 까다로운 제 성미 탓인지 알 수 없다.
사실 산타크로스는 크리스마스 나아가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주후 4세기에 미라의 대주교를 지냈고 아주 자비심이 깊었던 성자 니콜라우스(Saint Nicholaus)를 카토릭에서는 오래 전부터 어린아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숭배했다. 그 관습에서 유래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착한 일을 한 어린이에게 성탄절이면 선물을 주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가 그 성자의 이름을 본 딴 산타크로스가 되어 설화상에 등장하게 된 것뿐이다.
비록 가공의 인물이지만 한 해 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한 어린이에게 년 말에 선물을 주는 싼타로 인해 아이들이 선한 일에는 상급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진리를 가르치고 또 착한 일을 해야겠다는 소망을 갖게 하는 긍정적인 면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신자로서 반드시 좋게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산타가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날 크리스마스 때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로 무의식 중에 산타와 예수의 이미지가 오버랩(Overlap)되어 생각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까닭이 마치 선한 일을 한 자에게 상을 베풀고 구원을 주시는 것처럼 오해 될 소지가 다분히 생긴다.
예수님은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대신 짊어지시려 이 땅에 오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사53:5)이다. 차고 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호!호!호!” 산타가 웃으면서 사람에게 절을 하면 십자가에 흘리신 주님의 피는 쉽게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크신 사랑 앞에 우리가 행한 눈곱 만큼도 안 되는 선한 일로 감히 자랑하고 상급을 받아야겠다고 나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독일 속담에 “만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길 주저하셨다면 천국은 텅텅 비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은 잊어버리고 산타에만 열광하면 천국은 점점 더 비어져 가고 대신에 지옥이 가득 차지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12/23/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