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텍사스에서 있은 한 여자의 재판결과가 세계적인 탑 뉴스로 보도되었다. 자기 어린 자녀 5명을 목욕탕 욕조의 물에 잠기게 해 익사 시킨 비정의 엄마에게 가석방 없는 조건으로 최소 40년 즉 무기징역의 언도가 내려졌다. 이 여인의 재판이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얼마나 중한 벌을 받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살인이 유죄인지 무죄인지의 배심원 결정 여부였다.
변호인측은 “평소 우울증에 시달린 데다 자기 아이를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나 죽인 것은 정신 이상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무죄”라고 옹호했다. 검사측에서는 “아이를 죽인 직후에 스스로 경찰에 신고할 만큼 자신이 한 행위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평소에도 선악에 관한 구분을 분명하게 할 수 있으므로 당연히 죄가 있다고” 반박 했다. 양측의 주장을 들어보면 둘 다 일리가 있어 보이고 어느 한 쪽이 절대 옳다고 할 수 없는 것 같다.
둘 다 옳아 보일 때 둘 중 하나를 골라버리면 결과적으로는 선택되지 않은 것은 옳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옳은 정도가 약해 오히려 옳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어 버린다. 둘 중 하나가 맞고 다른 것은 분명히 틀려야만 선택의 정당성이 보장된다. 반면에 둘 다 옳아 보이면 제 삼의 원인과 대책을 강구해 보아야 한다. 그 여인의 평소 정신상태도 정상이고 자기아이를 죽이는 그 순간에 자기 행위를 분명히 알고도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도저히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는 말이 된다. 흔히 “무엇인가에 홀렸다”고 표현하는 대로 자기 의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제 3의 파워가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고 봐야 옳지 않을까?
세상 법정에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상식 범위 안에 있는 범죄는 윤리적으로 또 이번 같이 이해가 안 되는 경우에는 정신병리학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둘 다 인간 지정의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케이스가 아닌가? 꼭 귀신에 홀려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게 되려면 범행 중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본인이 몰라야 한다. 그보다 우리 가운데 자기 자식이 심지어 부모마저 죽이도록 밉고 싫었던 적이 과연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과연 누가 선악을 정확히 구분해 자신을 선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은 정신과 의사 스코트 펙이 지적한 대로 “영혼이라는 신비를 모든 다양한 국면에서 접근해 들어가는 그런 치료자”가 필요한 불쌍한 자일 뿐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2,13)
3/17/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