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에다 테러리스트로 있다가 붙잡힌 미국 청년 존 워커가 며칠 전 미국으로 호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기자들이 그의 부모에게 2년 만에 아들을 만난 소감을 물었다. 아버지는 “그는 여전히 미국을 사랑한다. 그는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 적대행위를 한 적이 없다”라고 했고 어머니도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의 품에 돌려준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의 그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unconditional)이고도 절대적(ultimate)”이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조국을 배신한 비겁한 자라고 욕할지라도 부모로선 자식을 향한 참 사랑은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각기 달랐다. 아버지는 감정을 절제하고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며 법적인 관점에서 말한 반면에 어머니는 이성적인 판단은 접어둔 채 오직 자기 아들에 대한 한량 없는 사랑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기에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자기 아들의 죄를 부모로서 용서한다는 데는 뜻이 다를 리가 없었고 둘 다 그런 뜻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흔히들 “예수 그리스도가 꼭 십자가에 죽고 부활해야만 우리 죄가 사해지는가? 하나님이 그냥 죄의 용서함을 선포하면 되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많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는 죄의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 죄의 방기(放棄 방임과 포기)다.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 반면에 부활이 없이 주님이 십자가에 죽기만 했다면 그 곳에 용서는 없고 법적 책임을 물어 형벌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에 자기 독생자를 죽임으로 죄에 대한 벌을 주신 것이고 또 벌을 주었지만 독생자를 부활시켰기에 그 사랑이 완성된 것이다.
만약에 이 청년의 엄마가 아들에게 벌을 주지 말고 무조건 사면만 해달라고 요구했던지, 아빠가 자기 아들은 조국을 배신한 자이므로 법대로 최대한 벌을 주기 바란다고 소감을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세상 사람 모두 정신 나간 부모라고 욕을 했을 것이다. 죄에 대한 벌은 받되 죄인은 용서 해주어야 한다는 원리는 상식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동일한 원리로 우리의 죄는 벌하시고 우리는 용서해 주신다고 십자가에서 선포한 것은 왜 그토록 믿으려 들지 않는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1/27/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