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택한 소수만 사랑하지 않는다.
신앙상의 모든 의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과 특별히 십자가 복음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히12:2)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결과 열두 제자를 비롯해 바울에게 예수님이 먼저 예정에 의한 구원임을 확실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럼 사실상 더 이상 예정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정에 대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들이 있어서 이런저런 반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예정을 믿는 신자마저 그런 반발을 접하면 혼란스러워집니다. 예정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하기 위해서 과연 그러한지 대표적인 몇 개를 연관된 성경말씀에 비추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알아볼 반론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길 원하시기에 소수의 사람만 구원으로 택할 리가 없고 예수님과 사도들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미리 택한 일부만 구원한다는 예정론은 그런 말씀들과 상충되니까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요한복음 3;16, 디모데전서 2:4, 베드로후서3:9이 그 대표적인 말씀들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각 구절별로 따져보기 전에 성경을 해석하는 아주 중요한 원칙 두 가지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반론은 그 두 원칙에 따르지 않고 성경을 해석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해석방법이 틀렸다면 그 추정한 내용도 필연적으로 하자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앞뒤 문맥에 비추어 해석하라.
첫째로 성경은 반드시 앞뒤 문맥에 비추어서 뜻을 파악한 후에 성경 전체가 말하는 진리와도 일치하는지 다시 비교 검토해 봐야 합니다. 성경해석에서 한 문장이나 한 문구만 따로 떼서 보는 것이 최고의 금기 사항입니다.
성경에서 한 구절씩 떼서 봐도 되는, 엄격히 따지면 그렇지도 않지만, 유일한 책은 잠언입니다. 이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간단한 영적진리를 격언 형식으로 편집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경전들과는 달리 성경은 도덕적 종교적 계명을 하나씩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려는 계획을 창조 때부터 마지막 심판 때까지 어떻게 진행시키고 있는지 일관되게 이어지는 방식으로 당신께서 계시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런 뜻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끔 인간의 의사소통 방식으로 진술한 것이 성경입니다. 인간 저자들에게 성령의 영감을 주어서 각 책별로 전체 인류 구원계획에서의 일부 특정한 주제에 관해서 저작토록 했습니다. 따라서 각 책마다 서로 다른 저자가 특정한 저작 의도를 갖고 소설 전기 예언 시가 논문 같은 통상적인 문학 형식으로 저술했습니다.
어떤 책이라도 한 구절만 떼어내어서 저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진리를 논할 때는 그런 바보 같은 일을 예사로 행하며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정론에 대한 논쟁입니다.
성경의 원전은 연결된 이야기를 진술해야 하니까 당연히 장과 절의 구분이 없이 죽 이어져 있습니다. 훨씬 후대에 서로 인용 비교 대조하기에 편리하도록 문단과 문장을 나누어서 번호를 붙였습니다. 원저자들로선 한 절씩 따로 읽고 해석하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한 절씩 따로 떼서 해석하는 것은 앞뒤 순서 구분 없이 뒤죽박죽으로 책을 읽는 꼴로 저자에 대한 큰 모독입니다. 한글 철자와 문법을 막 깨우치려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그러지 않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한 책을 선정해서 그 책의 주제와 저작의도를 생각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연결해서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한 문장 혹은 한 문구를 떼서 읽는 것은 성경을 단순히 도덕 종교 계명으로 격하시키는 짓입니다. 성경의 진짜 저자인 하나님에 대한 큰 모독이자 죄가 됩니다. 최대한 잘 봐주어서 그렇게 한 절이라도 읽었다는 신자로서 종교적 의무감의 발로일 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도우려 하지 말라.
앞뒤 문맥과 연결해 해석하라는 것은 정작 그 본문이 말하는 바를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에 비추어서 정확히 찾아내라는 뜻입니다. 한 저자가 갑자기 자기가 전하려는 주제와 상반되는 내용을 한 문맥 안에서 글로 쓰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한 구절만 따로 떼어서 보면 필연적으로 본문의 뜻과는 다른 해석이 될 소지가 생깁니다.
따라서 성경 해석의 두 번째 중요한 원칙은 신자가 이미 갖고 있던 성경 혹은 신학적 지식이나 설교에서 들은 내용 같은 선지식(先知識)과 선이해(先理解)를 모두 제거하고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본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독자라도 저자가 진술하는 대로 본문의 흐름에 따라가며 해석하지 자기가 이미 갖고 있는 자기 생각에 본문의 뜻을 갖다 맞추는 법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상하게도 신자들이 성경에 대해서 또 유달리 예정론에 관해선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심판으로 결정해버리는 그런 매정한 분일 리가 없고 그래선 안 된다는 자기 선입관에 따라 성경을 읽고 또 해석합니다.
하나님을 염려해서(?) 그분의 사역을 도우려는 의도까지는 좋은데 인간 주제에 그분을 대신하는 꼴이 됩니다. 의외로 믿음이 좋거나 성경지식에 능한 분들이 이런 잘못을 종종 범합니다. 문제는 그 주장하는 바가 하나님을 더 하나님답게 그럴싸하게 표현하는 것 같아서 많은 신자들이 잘못인 줄 모르고 넘어가며 오히려 잘하는 일이라고 지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유컨대 돈에 눈이 어두워진 회계사가 회사와 짜고 그 재정실상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평가하지 않고 이윤이 많은 것처럼 분식 회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기존의 주주와 외부 투자자들이 회사가 적자에 전망이 없는데도 투자하게 하여서 결과적으로 손해를 입히는 큰 죄가 됩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분식해서(?) 해석하려는 데에는 악의는 없고 하나님을 위하려는 열성이 개입됩니다. 열성이 지나치면 항상 부작용을 낳게 마련인데 성경해석에서도 결과적으로 순진한 신자들로 성경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게 만듭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기에 지옥은 존재하지 않고 있어서도 안 된다든지, 그분은 신자가 잘되기를 바라기에 무엇이든 기도하는 대로 형통 풍요하게 해주신다는 등의 가르침입니다.
예정론을 명시적으로 개진한 바울이 율법대로 준행하고 있기에 구원에 대해 염려하지 않던 유대인들을 예리하게 비평하는 말을 보십시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 성경 특별히 율법에 대한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선민의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심 때문에 오히려 진리를 오도하고 있고 그 결과 구원과 멀어졌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처럼 예정론을 반대하는 자들도 하나님이 냉정하고 잔인한 분이 결코 아니라고 변증하고 싶은 열성이 앞선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이 많은 하나님으로 변호하고 싶다면 동일한 맥락에서 지옥은 없고 기도만 하면 신자가 원하는 대로 이뤄준다는 점들도 함께 주장해야 합니다. 그러지는 않고 예정에 대해서만 자기들 주장을 지지해주는 것 같은 성경구절을 따로 떼어내어 그 비판의 근거로 내세웁니다. 성경을 접근 이해 해석하는 기본적인 관점과 원칙에서 이미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는 셈입니다.
영생을 얻는 온전한 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언뜻 보면 택한 자를 구원하지 않고 “믿는 자마다” 즉, 믿기만 하면 예정과 상관없이 누구나 구원을 주시는 것이 옳은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니고데모가 구원의 길에 대해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나온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1절에서 21절까지를 하나의 문맥으로 보아야 하고 무엇보다 주님이 구원 받으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먼저 전제한 맥락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절)라고 아주 초보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람에 비유하여 육이 아닌 영의 거듭남이라고 설명해주었으나(5-8절),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라고 재차 질문했습니다.
이 둘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 10절에서 21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럼 상기 본문도 당연히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절대적 구원진리에 대한 두 번째 보충 설명인 셈입니다. 요컨대 그 근본적인 뜻은 성령의 간섭이 먼저 있어야 구원 받는다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이 구절만 따로 떼어서 해석하면 인간이 믿기로 결단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되고 예정론과 상충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한마디로 주님이 메시아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만약에 메시아가 맞다면 자기도 구원받고 싶다는, 최소한 구원 받은 것이 확실한지 다짐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럼 주님은 당신이 메시아라고 답하면 그만인데 엉뚱하게도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구원의 길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16절에 와서 당신을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했습니다. 둘 다 구원의 길이기에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바로 당신을 믿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한 자리에서 동일한 인물과 나누는 짧은 대화 가운데 서로 다른 구원의 길을 말씀하실 리는 없습니다. 당연히 “그를 믿는 자마다”의 뜻도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니고데모더러 이스라엘의 선생임에도 성령의 일은 모른다고 지적한(10절) 점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상기에 인용한 롬10:2의 바울의 지적과 일맥상통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란 여호와와 그 율법을 잘 알고 스스로 준행하면서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자입니다. 그런 선생인데도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절)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민수기의 불 뱀으로 물려 죽게 되었을 때에 놋 뱀을 쳐다보는 사건을 구원의 예화로 들었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달려야 된다는 것을 예고한 말씀입니다. 나아가 이 사건 당시의 이스라엘로선 아무 공로 선행은 물론이고 믿으려는 노력은커녕 결단도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려 놋 뱀을 쳐다보기만 했어도 치유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의 구원을 하나님이 주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방식으로 구원을 베푸는 것이 바로 하늘의 일인데 그것을 인간 중에 지혜와 믿음이 가장 뛰어난 니고데모도 모른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지혜로는 구원을 모르니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주님과 나눈 대화를 니고데모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첫 질문에 대한 답조차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예수님은 영생은 하나님과 그 보내신 독생자를 알아야만 얻을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3:16의 독생자를 “믿는 자마다”는 사실은 “아는 자마다”라는 뜻입니다. 구원이 단순히 이신칭의의 교리를 믿고 결단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성령 안에서 일대일 인격적으로 대면해서 체험적으로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미 살펴본 대로 그분이 당신의 뜻대로 당신이 택한 자에게 주관하십니다. 예수님이 한 죄인을 먼저 찾아와 주셔야만 주님과의 인격적인 대면이 가능하고 또 주님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상기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성령이 역사하여 당신을 온전히 알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미리 택한 소수에게만 구원을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소원과 구원방식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이 두 구절의 해석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당연히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소원하십니다. 어디까지나 그분의 소망입니다. 반면에 당신께서 실제로 구원을 주는 방안은 그와 다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소수만 택해 구원 주심이 잘못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의 모든 인간을 향한 사랑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너무나 간절하고 넘치지만 인간이 완악하여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분의 구원 예정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상충하지 않음은 이미 살펴봤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그대로 행하지 못할 리 없지 않느냐고 우기면 안 됩니다. 그럼 모든 악인들을 다 구원해주셔야 합니다. 죄인과 의인의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렇게 따지면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 전에 아예 인간을 로봇이나 짐승으로 만들거나, 그조차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결론에 이릅니다.
밤중에 정말로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그렇게 어렵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내가 너희를 대신해서 죽을 메시아다 나를 믿으라고 한 마디만 하면 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대신해서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어서 구원해줄 것이라고 설명해 주면 됩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은 삼 년간이나 동고동락하며 주님께 직접 베운 수제자 베드로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적극 만류했습니다. 그럼 온유하고 합리적인 니고데모는 더더욱 말렸을 것이며 그 이전에 그 또한 그런 구원을 전혀 이해 못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나 베드로는 유대인들로서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벌이라는 확고한 선입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일부 신자들이 예정에 관한 말씀을 본문이 말하는 그대로 문맥에 따라 해석하지 않고 자신들의 미리 정한 뜻에 갖다 맞추어서 해석하는 것은 이들과 같은 오류에 빠지는 셈입니다. 상기의 두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이전에 쓴 제 글의 일부를 인용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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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마을에 의사가 한 명만 있었다고 칩시다. 그 의사는 어떤 마음으로 자기의 일을 수행하겠습니까? 제대로 된 의사라면 그 마을 모든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병들지 않고 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고 혹시 병이 들어도 전부 자기에게 와서 고침을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되어져 가는 현실은 어떠합니까? 병이 든지도 모르고 죽는 사람도 있고, 병이 들어도 의사보다 민간요법을 찾는 자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의사를 싫어해 병원을 가지 않는 자도 있고, 심지어 병원 가는 것이 죽기보다 무서워 못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의사가 고쳐 튼튼하게 만드는 사람은 일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가 시간이 없거나 능력이 모자라거나 동네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의사가 가만히 있은 것도 아닙니다. 병원은 마을 한 복판에 있어 누구나 의사를 찾아 갈 수 있었습니다. 의사도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심심찮게 조금이라도 몸이 이상하면 병원으로 찾아오라고 말해 주었는데도 그렇습니다.
이 예에 비추어 보면 본문은 의사(하나님)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마음을 나타낸다면 실제 일어나는 현상은 예정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구절 자체와 예정론과 연결시켜 해석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관한 본심과 예정론도 구태여 연결시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 심히 기뻐했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을 인간더러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신 이유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입니다.(요3:16) 그 세상이 특정한 일부 예정된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의사의 입장에서도 병에 걸려 힘들어 하면서도 병원을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보면 더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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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조하지만 상기 두 말씀은 하나님의 소망을 말한 것이지 구원의 방식에 관한 설명이 아닙니다. 거기다 앞뒤 문맥과 연결해서 그 뜻을 살피면 요3:16과는 달리 구원이 아닌 다른 주제를 보충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딤전 2:4는 당연히 2장 전체의 문맥에서 뜻을 찾아야 합니다. 바울이 편지의 수신자들 즉 신자들이 평안한 생활을 하기를 간구하면서 대표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2장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평안한 삶은 진리를 알아야만 가능한데 진리는 또 구원을 받아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 2:4의 뜻입니다. 택함 받는 자의 숫자나 구원의 범위를 따지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아서 진리대로 살라고 강조하는 데에 초점이 모입니다.
마찬가지로 벧후3:9도 3장 전체에서 그 뜻을 찾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천지가 여전히 창조할 때의 그 모습대로 있으니 주의 강림한다는 약속은 틀렸다고 오도하는 이단이 나타났습니다.(3-5절) 그에 대해 베드로가 주의 약속이 무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 참으며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에겐 늦어지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변증한 것이 9절 내용입니다. 재림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변론이지 구원과 그 방식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소망한다고 온전히 그대로 행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사무엘 선지자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만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를 세우길 원했으나 백성들이 다른 나라처럼 인간의 왕을 요구하자 그대로 응해주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그 땅에서 율법을 순종하며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원했지만 이스라엘이 타락하자 도리어 그 땅에서 다시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이 회개하고 구원 받아 진리를 알고 거룩하게 살기를 당신께서 원하지 않았던 적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마지막 날까지 변함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돌아오는 일이 불가능하기에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해서 대속 제물로 받으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비록 사랑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위하려는 열성이 앞서도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벗어나서 그분이 구원으로 소수만 택할 수 없다고 주장해선 안 됩니다. 성령이 먼저 간섭해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우리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구원의 절대적인 전제로 선포했습니다. 이는 누차 강조하지만 당신께서 택하신 소수에게 구원을 선도적으로 베푸신다는 뜻일 뿐입니다.
2/2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