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3: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의 비교

 

구원에서 하나님의 예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인간의 믿음의 결단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의견이 오랜 기간 첨예하게 대립해 왔습니다. 그 동안 이에 대해 신학적인 논쟁이 수없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문제는 두 진영이 다 성경말씀을 그 근거로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신학과 성경 지식이 얕은 신자들로선 과연 어느 쪽이 옳은지, 둘 다 맞지만 표현만 다르게 한 것인지, 두 의견을 조화 절충할 수 있는 여지는 없는지 등등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구원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우선이라는 예정론은 어그스틴이 주창하였고 종교개혁시기에 프랑스 출신 신학자 칼빈(1509-64)이 체계화시켰습니다. 칼빈주의는 많은 종교개혁가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화란출신 신학자 아르미니우스(1560-1609)가 칼빈의 사후에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또 아르미니우스의 사후에 그의 후계자들이 토르트종교회의(1618-19)에서 다섯 가지 항론(remonstrance)을 제시했는데 그에 맞서서 칼빈주의자들이 오대강령(첫머리 글자를 따서 “TULIP”으로 통칭 됨)을 핵심교리로 확정했습니다.

 

이 두 상반되는 주장을 간단히 설명 드린 후에 신자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각각의 정의는 인터넷에 간략하게 정리된 것이 있어서 퍼왔습니다. - 출처: 총회신학D반 / 관련 성경구절은 대표적인 것 두셋만 인용했습니다.)

 

TULIP과 항론

 

1. 전적타락(혹은 전적무능력, Total Depravity) - 롬5:12-21, 엡2:1-3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 위해 복음을 믿는 일에 전적으로 무능력해졌기 때문에 구원에 관해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성령의 중생하시는 은혜를 통해 가능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항론: 부분적 타락(Partial Depravity) - 롬1:18-20, 빌2:12-13,

비록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영향을 받았지만 인간의 영적 상태가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을 얻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여 멸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 요6:44, 롬 4:4-8 엡1:4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덕이나 예지할 수 있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주권적인 의지에 근거한다. 따라서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시는 것에 있다.

 

항론: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 요1:12, 3:16, 벧전1:2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선택할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택하셨다. 결국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택하는 것이다.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제한적 특별한 속죄) - 마1:21, 26:28, 요17:9, 엡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들을 대신해서 당하신 형벌로써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는 오직 그의 택하신 백성을 위해 죽으셨다.

 

항론: 보편적 속죄 (Unlimited Atonement) -사53:6, 마18:14, 딤전2:4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을 하는 조건에서만 효과적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 요6:37-40, 롬 8:18-39, 고전15:10

성령께서 구원을 적용시키심에 있어서 결코 인간의 의지에 제한받지 않으시며 구원의 성공에 있어서 결단코 인간과 협동하지 않는다.

 

항론: 가항적 은총(Effectively Resistable Grace) - 마23:37, 눅7:30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함에 있어서 성령을 제한한다. 죄인이 반응하기 전에는 성령께서 생명을 주실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은 거부되어질 수 있다.

 

5. 성도의 견인(굳게 참고 견딤, Perseverance of the Saints) - 롬8:1,2, 벧전 5:10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으며 성령에 의해 믿음을 부여 받은 모든 자들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며 그 결과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된다.

 

항론: 탈락 가능성(Possibility of a Lapse from Grace) - 고전9:27, 히2:1-3

믿고 진실로 구원을 얻는 자들도 믿음과 그 외의 것을 지키는데 실패하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두 주장을 비교하는 첫째 기준

 

언뜻 봐선 두 입장이 다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섯 교리 모두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있기에 하나가 옳으면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며, 최대한 양보해도 하나가 성경에 말하는 바와 더 근접했다면 다른 것은 조금 더 먼 것입니다. 지금 논의하고 있는 주제인 예정론의 관점에서 어느 입장이 옳은 지부터 살펴봅시다.

 

성경은 분명히 예정에 관해서 가르치고 있으니 일단 예정이 없다거나 틀렸다고 말하면 그 자체로 반성경적인 교리가 됩니다. 그래서 아르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선택할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택하셨다.”는 예지예정(豫知豫定)을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선 앞에서 이미 한번 논의했지만 조금 더 이어가보겠습니다.

 

선택이란 선택자가 피선택자에 대해 분석 심사 판단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하며 또 그 기준에 따라 선택을 결정하는 선택자 쪽의 임의적이고도 자발적인 의지가 반드시 작용해야 합니다. 예지예정에서 그 기준은 예수를 믿을 자를 미리 아는 것 하나뿐입니다. 말하자면 구원 받을 자격과 조건을 형성하는 것은 오직 선택받은 자 즉, 인간이 노력한 결과이며 구원 받고 못 받고는 인간의 재량과 책임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을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하면 사실상 구원이 이미 결정된 이후의 일입니다. 선택자인 하나님이 당신의 의지로 구원을 심사 판단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양과 염소로 이미 나뉘어져 있는 상태에서 단순히 각기 다른 우리에 몰아넣은 것뿐입니다.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누기만 한 자들이 구원 받을만한 상태에 이르도록 하나님은 아무런 역할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정이라는 용어가 사용될만한 근거가 전혀 없으며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끼어 입은 꼴입니다.

 

선행이나 업적을 쌓거나 제사나 치성을 드린 것이 아니니까 신자의 공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기로 결단한 것뿐이니 행위구원이 아니고 믿음에 따른 은혜구원이라고 강변해서도 안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그런 믿음을 갖게 되기까지 하나님이 영향을 끼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연히 그 믿음 자체도 인간의 공로가 됩니다.

 

무엇보다 믿으려고 비교 분석 선택 판단 결단하는 모든 과정은 엄연히 인간의 사고활동 즉,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행위입니다. 도덕적 선행은 아니라도 인간의 믿으려는 종교적 행위를 보고 구원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상황에서 비슷한 신분과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복음이 전해졌는데 어떤 사람은 복음을 수긍하여 믿기로 결단하고 다른 이는 그러지 못했다면 사람들 사이의 영적 수준과 능력에서 우열의 차이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믿은 자는 믿지 못한 자보다 결과적으로 일등 인간이 될 뿐 아니라 본인도 은연중에 우월감을 느끼게 됩니다.

 

예지예정은 하나님이 예정했다는 표현만 차용했을 뿐 근본적으로 행위구원입니다. 그러니까 행위구원의 원리에 따라 나중에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교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구원을 얻으므로 나중에 스스로 믿음을 버리는 일도 불가능할 수 없습니다. 만약 구원 취소가 불가능하다고 하면 자가당착에 빠집니다.

 

문제는 그런 원리대로라면 사람이 여러 번 믿음을 가졌다가 여러 번 버리는 일도 즉, 여러 번 구원 얻었다가 다시 취소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그럼 또 여러 번 취소되기 전의 그 여러 번의 구원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죽기 직전에 믿음을 가진 자의 믿음의 순수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에게 수명이 오래 더 연장된다면 다시 버리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예지해야 하거나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킬 자만 미리 아시고 예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구원과 취소가 반복되더라도 그 본질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행위 구원에 해당됩니다. 결국 인간이 자유의지로 믿어서 구원 얻는 것은 참된, 최소한 천국이 보장된 구원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이 예수님과 그 십자가 구원은혜를 믿기로 결단하면 성령이 협조해서 구원 받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해서 구원 얻은 신자가 나중에 스스로 그 구원에서 벗어나려고 결단할 때에는 성령은 아무 역할을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8-40)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는 둘 다 같은 구원받은 신자를 뜻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결코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의 결단을 먼저 하면 성령의 역사가 뒤따른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은 엄연히 그 반대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따라서 TULIP과 항론 중에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구원에서 성령이 한 죄인의 영혼에 역사하는 것이 먼저인지, 인간의 믿음의 결단이 그보다 먼저인지 여부입니다. 전자가 옳다면 칼빈주의의 이중예정이 옳은 것이며, 후자가 옳다면 아르미니안주의의 예지예정이 옳은 것입니다.

 

상대의 주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금껏 각 진영은 서로 상대의 의견이 무조건 틀렸고 심지어 이단이라고까지 정죄해왔습니다. 그러나 각각이 성경 말씀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기에 그렇게까지 매도해 버리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이 틀렸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고 상기에 살펴본 대로 둘 다 옳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간혹 둘 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관한 진리인데 구원의 여정을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르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입장에서 진술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뜻 일리가 있어 보이나 잘못된 판단입니다.

 

정작 양 당사자들은 서로 자기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데 제 삼자가 둘 다 옳으니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오지랖 넓게 끼어드는 형국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많은 사상자들을 내면서 피 흘리는 전투를 수백 년간 계속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만 둘 의사가 전혀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 삼국이 두 나라더러 둘 다 옳으니 전쟁을 그만두라고 권하는 것과 같습니다.

 

칼빈주의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근거로 세워진 교리이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구원의 여정이라는 진술은 옳습니다. 실제로 첫 네 개는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이유와 과정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견인 교리도 하나님이 구원 받은 신자의 성장까지 주관하셔서 당신께서 주신 구원의 효력을 천국에 이르기까지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전적으로 타락한 한 죄인의 구원과 성화와 영화의 과정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TULIP은 하나의 연결된 교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의 모든 말씀이 TULIP에 기초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래서 당연히 그것에 근거한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합니다. 말하자면 칼빈주의는 아르미니안주의의 부족하거나 모순되는 점들을 보완 수정 포용하는 변증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 죄인의 영혼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구원은 TULIP에 의해서 일어나되 본인이 그 구원을 인지한 후로는 항론이 말하는 바대로 자기 믿음으로 선택 결단 실천하는 모습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반면에 항론은 일단 TULIP이 틀렸다고 부인한 바탕에서만 자기 교리의 타당성을 변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구원에 대해 말하는 바의 전부를 설명해내지 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일부 진리를 무시하고 교리를 전개해나가니까 필연적으로 예지예정에서처럼 여러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부터 아르미니우스는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구원론으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칼빈의 주장의 결점 내지 잘못을 드러내려고 각각의 교리 별로 자신의 반대 의견을 제시하면서 그 뒷받침 할 수 있는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당연히 각 항론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하나로 연될 수 없으며 말 그대로 항론으로 역할만 가능합니다. 결과적으로 칼빈의 후계자들로 도리어 자기들 의견을 TULIP으로 더 확고히 체계화시켜주는 계기만 제공했습니다.

 

거기다 그들이 각 항론의 근거로 드는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도 앞뒤 문맥과 그 책이 강조하는 주제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항론이 대체로 그런 성향을 띌 수밖에 없듯이, 하나님은 미리 심판으로 예정할 만큼 냉혹한 분이 아니라는 대전제 하에서 성경이 말하는 바를 자기들 주장에 무리하게 적용시키는 바람에 성경이 말하는바 전부와는 불일치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두 의견 중에 과연 어느 쪽이 성경의 구원론 전체를 종합해서 합리적으로 설명하느냐를 살펴봐야 합니다. 지금까지처럼 서로가 다섯 교리를 갖고 일대일 부분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것은 결론 나지 않는 지루한 말꼬리 싸움이 됩니다. 거기다 각 진영은 자기들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정확히 말해 상대가 틀렸다는 점만 더 부각시키려고 배타적으로 경직화된 표현들을 많이 사용해왔습니다. 성경을 통전적(通典的)으로 해석하는 바탕에서 지금보다는 더 합리적 논리적인 변증들이 두 진영에 다 절실합니다. 이런 두 주장의 차이점과 표현상의 문제점들을 간단하게나마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두 주장의 구체적인 차이점

 

한 죄인이 회심하게 되는 과정은 성령이 인간의 영(spirit)에 먼저 작동한 것인지라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듯이(요3:8) 인간의 지정의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지나가고 나면 그 흔적은 남기에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회심의 역사가 일어난 후에는 신자는 자기 지정의로 구원 받았음을 알 수 있고 자기 입술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게 됩니다. 흔히들 아무 이유 없이 밉고 전혀 믿어지지 않던 예수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아무 이유 없이 좋아지고 믿어졌다고 간증하는 까닭입니다.

 

바꿔 말해 아르미니안 주의가 말하는 교리들은 하나님만이 전적으로 주관하는 구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이미 일어난 이후에 신자가 반응하는 측면에선 그 주장들이 어느 정도 의미를 갖습니다. 예컨대 성령의 중생의 역사 후에는 신자는 자기 의지로 예수를 믿기로 선택하고 결단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비로소 완전히 믿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앞으로는 예수님만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시작하겠다고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의 인간의 ‘전적타락’의 뜻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깨달아서 믿는 측면에서만 무력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양심마저 완전히 부패한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3:9-18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선언하지만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인간들의 평균적인 실상을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구원을 이루기 전에도 니고데모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문제는 니고데모는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의 예에서 보듯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는 구원 진리는 아무도 몰랐는데 바로 그런 상태가 전적타락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미리 제자들에게 예언하고 가르치신 대로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강림하시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우쳐주자 비로소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한속죄도 이미 설명 드렸지만 하나님의 근본적인 심정은 부모가 자식을 향한 마음 같이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측면에선 아르미니안 주의의 주장을 일부 수용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식 중에도 부모의 뜻과 다르게 불효하며 천륜을 어기는 자가 나오듯이 구원의 효력은 택한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완전한 비유는 아닙니다. 인간의 부모는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불완전한 존재인지라 자식을 사랑하고 양육하는 데에 이런 저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권능은 완벽하고 광대하십니다. 성경 인물들의 구원의 예에서 살펴봤듯이 인간이 자유의지를 맘껏 행하도록 그대로 두고도 당신의 선택과 유기에 단 한 치의 오류가 생기지 않게 행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TULIP은 하나님 의지의 완전하심과 인간 의지의 자유로움 사이에 아무런 상충 모순이 생기지 않음을 전제로 하기에 성경말씀 그대로 진리가 됩니다. 반면에 항론은 이 진리를 전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믿기로 결단해야 성령이 구원을 협력해준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부인한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권능이 광대하고 완벽함에도 구원에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인간의지와 별개로 당신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고 또 그러기에 미리부터 택한 자를 구원으로도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그분의 권능은 시간을 창조하시고 시간과 무관하게 시간 밖에서 모든 시간을 통제하는 데서 나옵니다. 영원토록 현재이신 하나님에겐 엄격히 말해서 예정이란 말 자체가 해당사항이 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뜻은 인간관점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괄하여 현재형으로 실현될 뿐입니다. 인간 생각으로는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되었으니 불합리하게 여겨지지만 그분에겐 전혀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정론에서 절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하나님은 심판할 자를 미리 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한 명의 예외 없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기에 구원 할 자만 그것도 심한 고난과 핍박이 기다리는 당신의 일을 맡기려고 택한 것입니다.

 

과연 서로 전제가 다른가?

 

다시 강조하지만 칼빈주의자나 아르미니안주의자 양쪽 다 자기들 의견만이 옳고 상대를 이단시 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이런 차원에선 종교개혁자들의 지지를 받은 데다 TULIP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엄격하게 강조해온 칼빈주의자들이 더욱 겸손해져야 하고 더 합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칼빈주의자 중에 다섯 교리 중에 둘 혹은 셋만 믿는다고 말하는 자가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다섯 교리는 사실상 상호 연결되어서 하나씩 떨어질 수 없는 단 하나의 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부인되면 사실상 다른 것들도 다 부인됩니다. 인간의 전적부패가 시발점이 되어서 나머지 네 교리도 성립되는 것입니다. 전적부패가 아니면 나머지 넷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TULIP은 인간의 전적타락이, 항론은 인간의 부분타락이 그 주장의 출발점입니다. 전제가 다르면 그 다음의 논리 전개도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박사 논문처럼 모든 논의는 반드시 그 논리의 시발점과 지향하는 목표점 둘로 이뤄지는 범주를 정하고 논의에 사용되어질 용어들의 의미까지 통일 시킨 후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각기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분타락에 근거하므로 TULIP과 항론은 다른 선로 위에서 평행하여 달리기에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두 기차인 셈입니다. 논의가 지향하는 목표는 구원으로 같을지 몰라도 서로 다른 트랙 위에 있기에 사실은 진정한 의미의 논의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둘 다 옳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한 분 하나님이 가뜩이나 어리석은 인간들 앞에 서로 다른 두 가지 구원의 길을 성경에 함께 계시해 놓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진영이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진술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한 분이고 그분의 절대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하나이면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도 하나입니다.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가 각각의 교리를 출발하는 전제는 하나님의 구원 여정의 시작점이 되므로 하나로 같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시작점 즉,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구원을 하러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와 배경을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인간에겐 아무런 소망이 없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한 가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백성으로 택함을 받아 거룩한 율법도 수여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들의 역사에 수많은 기적으로 간섭 역사했고 수많은 선지자까지 보내어 계속 경고했음에도 그들은 우상숭배와 죄악에 빠져서 구원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당시로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도덕적으로도 가장 의롭게 살았던 사람들이었음에도 그랬습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은 신약에서 시작되기에 구약은 그 구원의 전제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전체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하고 있다면 구원론의 전제가 바로 그것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이 칼빈주의 특유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순전하게 따르지 않고 또 도무지 자기 죄를 씻을 수도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빠져있었기에 예수님이 십자가 은혜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예정론을 체계화시킨 것도 구약 백성들의 실패처럼 즉, 전적타락으로 인해 자신도 자력 혹은 협력 구원에 철두철미 실패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컨대 구원론을 논의하려면 반드시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명하는 전제인 것입니다. 양 진영이 평행 선로 위에서 같은 곳을 향해 가는 두 기차가 아니라 출발지가 서로 달라 반대 방향으로 달려서 그 종착역도 달라지는 두 기차인 셈입니다.

 

따라서 양 진영 다 성경의 한두 구절만 택하여 서로 말꼬리 잡는 신학과 교리 싸움을 더 이상 계속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신자들도 그런 신학적 논의에 빠지면 빠질수록 방향을 잃고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인간의 신학이 아무리 정교해도 구원의 시발점은 성경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설명하는 내용 바로 그것 하나입니다.

 

이 두 진영의 전제 중에 과연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신의 구원경험에 비추어서 스스로 잘 판단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구원 경험이 예정이었는지에 관한 판단 기준도 다시 강조하지만 성령의 간섭이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결심보다 먼저인가 뒤인가 하나면 충분합니다. 자연인이 과연 성령의 선도적 주도적 간섭 없이도 예수님과 그 십자가 대속구원의 진리와 은혜가 스스로 믿어지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옛 자아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합하여서 죽고 주님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런지 여부를 잘 판단해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정론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TULIP과 항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몰라도 구원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외면 거부 대적했던 것이 바로 영적인 죽음이었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그로 인해 파생하는 모든 죄들도 스스로는 도무지 씻을 수 없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주님만 따라 살기로 결단하고 실천하면 됩니다.

 

자신을 주관하는 진짜 주인이 돈에서 예수님으로 완전히 바뀌고 그에 따른 모든 가치관이 전도되어서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과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물론 우리의 본성 자체가 완전히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기에 수시로 쓰러지고 죄를 지을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신분과 특권은 결코 빼앗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알고도 죄를 범할 수 있지만 내주하신 성령님이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진정으로 회개하도록 인도해주시기에 구원의 취소는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항론은 단순히 쓰러진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선 다음 장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합시다.  

 

6/30/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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