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함 받은 자에겐 어떤 이유도 조건도 없다.
사람이 나기 전부터 구원은 몰라도 심판으로 예정한 것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보면 말이 안 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아니 아담의 타락 후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모든 인간의 영적 상태는 태생적으로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처지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추가로 심판형벌을 가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자 어느 누구도 미리 심판으로 예정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당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상태 그대로 두실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으로 예정할 자만 택하십니다. 그럼 또 어쨌든 선택되지 못한 자는 추가적 형벌은 아니라도 해도 자동적으로 심판으로 떨어지는데 반해서, 택함 받은 자는 아무 이유나 조건 없이 구원이라는 특혜를 받은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됩니다. 여전히 예정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하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기(遺棄)라도 자기 죄로 심판 받는다.
우선 불신자들을 그 상실한 마음 그대로 놓아두어서 결과적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방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장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를 만한 이유와 근거를 충분히 계시해 주었습니다. 당신을 알 만한 것을 그들 속에 하나님께서 보이셨고 창세로부터 당신의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당신께서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서 알도록 해주었습니다.(롬1:19,20)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핑계는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평생을 하나님께 다른 죄는 짓지 않고 단순히 그분을 모르는 채로만 살았다면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구원만 택한 것은 불공평하다는 반박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랑하면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기에”(롬1:23) 그런 반박은 전혀 성립하지 않고 그 반박마저 하나님을 거역하는 또 다른 죄가 됩니다.
그들은 세상을 만들고 통치하는 절대자 신적 존재가 있음을 알고도 그분을 피조물 수준으로 격하시켰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이 부려 먹을 수 있는 하인으로 만들었고, 최대한 양보해도 자기들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정신요법 안에 묶어버렸습니다.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진정으로 겸손하고도 심각하게 탐구해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당신을 알 수 있는 특단의 배려와 조치까지 행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또 인간과 그 사회를 어떻게 다스리는지 다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님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세상에 직접 참 빛으로 오셔서 각 사람에게 비췄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고 배척했습니다.(요1:9-11) 단순히 영적인 무지로 몰라본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욕심과 교만과 죄악에 사로잡혀서 빛을 싫어하고 어둠을 더 좋아했습니다. 의도적인 악의를 갖고 하나님을 배척 거역 대적한 것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19,20)
성경은 불신자들이 어둠을 더 사랑하고 빛을 미워해서 빛으로 오지 아니한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해보면 많은 이들이 교회에 출석하면 술 담배도 끊어야 하고 거룩하게 살아야만 할 텐데 자기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고 인생에 즐길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으므로 천천히 고려해보겠다고 거절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사6:10,요12:40) 이사야 선지자는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작정 때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언을 인용하면서 인간이 그렇게 된 까닭을 하나님의 주권에서 인간의 작정이라고 바꾸었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5) 인간이 당신의 십자가 구원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거룩해지는 것을 (심지어)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둘을 종합하면 불신자들이 심판으로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 본인들이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신자에 대한 방치와 그들의 자유의지가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고 예수님도 확인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교회에 출석하면 당장 금지해야 하거나 의무적으로 행해야 할 여러 종교적 요구사항들이 많아서 싫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세상 재미에 푹 빠져서 거룩한 일에 관여할 여유가 없고 더 나아가 그런 일들이 싫고 귀찮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등지다가 자기 인생을 허무하게 마감해버립니다.
성인이 되어서 예수를 믿은 자의 대부분이 스스로 의롭게 살아보려고 결심하는 자는 아주 드뭅니다. 실제 통계에 따르면 자기 힘으로 도무지 극복할 수 없고 전혀 예상치 못한 큰 고난이나 불행을 당해서 인생과 삶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매를 맞아야만 정신을 차리지 말로 해서 알아먹을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도덕률을 모르고 믿지 않아서 망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조차 제대로 지킬 능력이, 더 정확하게는 그런 순전한 의사조차 없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으로 예정하지 않은 자들도 분명히 자기 의사에 따라서 믿지 않기로 선택 결단 실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불신자들을 심판으로 예정하지 않았고 완악한 영적 상태대로 두었어도 그들은 자기 죄로 심판을 받는 셈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불신자로 남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요한은 바로 이어서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1)고 선언합니다. 자의로 예수를 믿기로 선택 결단 실천하는 자는 빛으로 왔고 그 행위(믿음의 결단과 실천)도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인물의 구원에서 살펴본 그대로 하나님의 택하심에 따라 구원 받은 자도 본인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이 전혀 상충되지 않고 광대하신 그분의 주권과 섭리에 따라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타 종교인들도 심판으로 예정되었는가?
유대인들이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어둠이 더 좋아서 스스로 심판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당대나 지금이나 예수님에 대해 전혀 전해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구원을 받아보려는 나름의 선한 동기에 따라 타 종교를 선택해서 진리를 알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들은 각기 특유의 의롭고 경건한 계명을 가르치면서 그대로 준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말하자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롬1:23) 바꾸지 않는 정상적인 종교들입니다. 그런 순전한 자들도 하나님이 구원으로 택하지 않고 멸망에 빠지도록 놓아두셨는가라는 의문과 반발이 생길 수 있습니다.
종교가 아무리 많아도 구원의 길을 따지면 크게 두 종류로만 나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신의 합격점에 들도록 노력하여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는 종교와, 인간 스스로는 도무지 그럴 수 없기에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베풀어주어야만 한다는 종교, 둘입니다. 후자는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 정통복음주의이고 전자는 그 외의 모든 종교들입니다.
이 둘은 “인간에게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있다와 없다”로 그 출발점 자체가 전혀 반대입니다. 구원으로 가는 여정도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상반됩니다. 동일하게 구원이라는 목적지를 지향하지만 출발지와 가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도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구원에 관해서만은 종교 간의 우열을 따질 계제가 아니며 둘 중 하나는 옳고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스스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는 종교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있고 선하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그래서 그 종교가 가르치는 대로 온전히 실천하여서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거나, 그들 사이에서 평균이상의 점수를 취득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자력(自力)으로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종교적으로 신령한 행위를 준행함으로써 취득하는 구원입니다.
타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통해서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선 구원으로 택할 필요 없이 그냥 그대로 두시면 됩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이 상실한 마음에 그대로 두어서 멸망케 된다고 선언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나아가 그들 또한 사실상 자기들의 죄 때문에 심판받는 것입니다. 우선 교만의 죄입니다. 자기들은 남들보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류도 셀 수 없이 많으며 종류별로 개별적 상황에 따른 죄의 경중(輕重)도 천차만별입니다. 엄밀히 평생을 다 따져서 볼 때에 모든 사람의 죄에 우열을 매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가 추하고 추한 죄인으로 도토리 키 재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는 하나님도 우등생만, 사실은 교만으로 가득 차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더 큰 죄인임에도, 편애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차별하는 속이 좁은 치사한 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죄까지 범하는 셈입니다. 흔히들 착한 사람이 천국 가야지 예수만 믿었다고 구원 준다니 기독교의 하나님은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력에 의한 선행구원의 하나님이야말로 사람들을 차별하는 치사한 신이 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당신의 무한한 긍휼이 필요하지 않은 자는 단 한 명도 없기에 모두를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누구나 똑같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며 그래서 누구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오면 구원을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사람의 지성 도덕성 종교성 영성에 따른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방인, 세리, 귀신 들린 자, 창녀, 불구자 등등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고 사랑하셨고 세상에서 평균 이하로 취급당하는 자들을 더더욱 사랑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가장 공평하고 합리적인 하나님, 정확히 말해 그분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고 또 그래서 완전히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것입니다.
로마서 1:23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에게서 찾는 것”도 우상숭배라고 정죄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의 경배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인간끼리는 서로 존경하고 좋아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경배해선 안 됩니다. 간혹 인간 종교창시자들을 경배하거나 그들에게 기도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또한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인 것이니까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선행구원을 주장하는 종교는 엄격히 따지면 모두가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입니다. 선행한 점수로 천국을 갈 수 있으니 그 신은 아무 하는 일이 없습니다. 단순히 인간의 일생을 두고 점수만 매기는 채점관에 불과해집니다. 하나님을 인생 만사는 전혀 주관하지 못하는 한갓 허수아비로 비하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구원마저 인간이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셈이지 않습니까?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다른 종교인들을 열등하다고 비하하거나 잘못한다고 비난하려는 뜻은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출발이 다르고 종류가 다른 종교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사탄의 미혹에 붙잡혀 거짓에 속고 있고 그래서 참 하나님을 속히 알게 해주어야 할 너무나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들로선 지금 논의하고 있는 예정론을 알지도 못하고 타종교의 교리인지라 시비도 걸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정론을 정확히 이해해야 할 신자로서 그들의 구원이 예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정리해둘 필요는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십자가복음에 대해 전해 듣지 못하더라도 스스로의 죄 때문에 결과적으로 심판에 떨어진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요컨대 타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불신자들로선 구원으로 택함 받지 않았다고 억울해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택함에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이젠 구원으로 택함 받은 자는 과연 하나님의 편애나 특혜를 입었는지 여부를 살펴야 할 차례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으로 택한 자들의 상태를 바울 사도가 설명한 내용입니다.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자들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지혜롭고 강하고 문벌 좋고 가진 것 많은 자들을 역차별 했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 자들이 많지 않다고 했으니까 그들도 숫자는 적을지라도 분명히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이 그러했고 베드로도 출신이 어부라도 당시로선 부자에 속했습니다.
한마디로 구원으로 택함 받은 자에게는 그럴만한 조건이나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라도 구원 받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른 선택이지 택함 받은 자의 조건이 단 한치도 작용하지 않았기에 편애나 특혜는 아예 성립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구원 받은 자로선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하게 그분께 순전한 감사와 경배와 찬양만 돌릴 수 있을 뿐입니다.
상기 본문은 택함 받은 자의 현실적 상태가 그분의 택함에 전혀 구애 받지 않았다는 뜻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나중에 복음을 전해 듣고 믿으려 결단 실천할 자가 누구인지 미리 알고 그런 자만 구원으로 예정했다는 예지예정론도 본문이 부인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기가 복음을 알아듣고 믿었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그렇지 못한 자는 영적으로 자기보다 열등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대놓고 자랑하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 앞에 자기 구원을 자랑한 꼴입니다. 믿었다는 행위가 하나의 조건이므로 사실상 선행 구원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선행 구원의 의미는 최소한 평균 이상의 착한 자라야 구원받으니까 필연적으로 자랑이 따라는데 반해 심판 받는 자에겐 영적으로 열등하다는 딱지가 붙게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미련하고 지혜롭지 못한 자들을 택했다고 말합니다. 택함 받은 자에게 자랑할 거리가 하나 없습니다. 그럼 택함 받지 못한 자 쪽에서도 그만한 조건이 하나도 없으니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실제로 자기들 죄 때문에 심판 받으니까 더더욱 억울해 하거나 불공평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구원으로 택함 받은 자는 엄청난 의무를 짊어져야만 합니다. 자기가 손해 희생하며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야 할 소명입니다. 아주 쉽게 말해 하나님이 당신의 일꾼으로 부려 먹으려고 택한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불신자는 그분의 빛에 들어가서 자기가 거룩해지는 것이 싫어서 안 믿었는데 그런 엄청난 일을 시킨다면 더더욱 거부했을 것입니다.
구원으로 택함 받은 자에 대한 바울의 이어지는 선언을 보십시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1:30,31)
먼저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택함 받아 이뤄지는데 그것도 오직 예수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합니다. 예정에는 예수 십자가의 의로우심 외에는 어떤 조건이나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예수에 의해서, 예수를 위해서 구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라도 주권적으로 택해서 그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서 예수 십자가 은혜를 깨닫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에게 맡길 일도 예수 십자가에 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으로 택한 자에게 맡길 엄청나고도 위험한 일이 무엇인지는 다음 장에서 살펴봅시다.
3/10/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