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치신 예정론

 

예정론은 바울의 고유사상인가?

 

예정론을 이해하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사항은 인간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구원과 심판으로 미리 나눠버렸기에 인간 쪽에서 어떻게 해도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심판으로 예정된 자들은 너무나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종들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살펴봤습니다. 그 결과 전부 예정에 따라 구원받았으며 또 예정된 구원이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자진해서 믿으려는 자유의지가 작동됨에 전혀 제한 받지 않았다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라 인간이 인식하고 또 제한 받아야만 하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전혀 해당 적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미리 심판과 구원으로 나눠서 예정했다는 말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성립되지 않음도 살펴봤습니다.

 

이제 우리 믿음의 주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 과연 예정구원에 대해서 가르쳤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그런데 그전에 먼저 따져볼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예정은 예수님이 가르치지 않았고 바울이 고안한 교리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수많은 학자들이 신학적 성경적으로 정교하게 비교 분석하여 연구 발표해왔습니다. 제가 여기서 덧붙일 필요가 없으며 서론에서 밝힌 대로 그럴만한 학문적 소양도 부족합니다. 대신에 그런 주장은 성경을 이해하는 기본관점에서의 오류라는 측면에서 접근해보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먼저 바울의 고유 사상이라는 주장은 당연히 예수님이 가르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간접적인 맥락에서도 예정론을 계시 내지 인정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요컨대 이런 주장은 예수님과 바울이 예정에 대해 서로 다르게 가르쳤거나 예수님이 가르치지 않았는데 바울이 독단적으로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는 다른 바울만의 개인적인 의견이라면 성경에 포함되어선 안 됩니다. 한 성경이 서로 상충되는 사상을, 그것도 가장 중요한 구원의 방도를 계시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구원의 길로 이것도 저것도 옳다고 제시하고 있다는 주장은 아예 논의할 대상조차 안 됩니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바울 둘 중 한 사람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니까 반드시 한 명을 성경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제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니까 바울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럼 그의 서신서 모두를 다 없애야만 합니다. 비록 책별로 주제가 달라도 기본적으로 그가 갖고 있는 예수님과는 다른 구원론에서 나왔거나 영향을 받은 사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정경(正經, canon)으로 인정된 현재체계의 성경에 담긴 모든 사상은 서로 상충되지 않고 일관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입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전제입니다. 정경성이라는 말 자체로 바울의 사상이 예수님의 것과 다를 리 없으며 바울이 예정론을 가르치면 당연히 예수님도 예정론을 가르쳤다는 뜻이 됩니다.

 

이 너무나 명백한 전제를 거역할 수 없기에 예수님과 바울 둘 다 예정을 가르치되 예정의 방법론에서 바울이 예수님과 다르게 가르쳤다고 주장합니다. 사람이 나기 전부터 구원과 심판 둘 중 하나로 하나님이 이미 결정해 나누었기에 사람이 개입될 여지가 전무하다는 이중예정론은 바울의 주장이지 예수님이 의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어쨌든 성경이 두 가지 상충되는 의견을 계시한다는 뜻에서 그 출발부터 원칙적으로 틀린 주장입니다.

 

그리고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예정이라는 말 안에 이중예정의 의미가 당연히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구원 받으면 심판 받지 않는 것이며 심판 받으면 구원 받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이를 구원으로 예정했다면 반드시 구원으로 예정되지 않은 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결과적이었던 간에 구원으로 예정되지 못한 자는 심판으로 예정된 셈입니다.

 

이처럼 예정론이라면 이중예정을 함의(含意)하고 있기에 둘을 구분해서 복잡하게 논의할 계제가 아닙니다. 예정이 옳으면 당연히 이중예정인 것이고 예정이 틀리면 아예 이중예정이라는 교리는 물론 예정이라는 단어도 사용해선 안 됩니다. 성경에서도 예정이라는 단어나 그와 관련된 말씀들도 다 제거해야 합니다.

 

이중예정에 대한 반론

 

문제는 성경에 이미 언급된 예정을 제거할 수는 없으니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죽음으로 구원하는 방도만 예정한 것이지 개인적인 구원은 오직 인간의 믿음에 달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개인의 구원에 하나님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또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적고 더딤에 관해 변증하는 로마서 9장에서 바울도 개인 구원은 이중예정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9:21-24)

 

토기장이가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미리 작정해서 만든다는 것은 비유이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지막에 “이 그릇은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고 했습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미리 구원으로 예정하신 이가 “부르신 자”인데 이는 분명히 예정 받은 각 개인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단순히 예정 받지 못한 자가 예정 받은 자에 비해서 천하다는 뜻으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히브리 어법에는 반대되는 사안을 극명하게 대조되는 표현으로 강조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은 이런 대조법에 따라 반대의 상태 즉, 예정 받은 자에 대비해서 예정 받지 않는 자임을 강조하려는 비유일 뿐입니다.

 

어쨌든 구원으로 예정 받지 못한 자는 심판으로 예정되는 결과가 되므로 하나님은 그렇게 잔인 냉혹한 분일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런 비판이 있으리라 바울도 예상하고 상기 구절 바로 앞에 아래처럼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에게 결코 허물이 있을 수 없기에 인간이 감히 하나님에게 반발 비평 판단해선 안 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이에 대해선 성경신학적인 보충설명이 더 필요한데 차후 다른 항목에서 다루겠습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9:19,20)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른 택하심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기에 마지막으로 믿을 것이 확실한 자를 미리 아시기에 그들을 골라서 예정해 구원해준다고 합니다. ‘예지예정론’을 논할 때에 예지(豫知)라는 단언 자체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경로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예정의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을 것이 확실한 자”라는 말도 표현만 다르지 그와 같은 뜻일 뿐입니다.

 

만약 예정을 부인하려면 단순히 “믿는 자를 구원해준다”고 말해야 하나 이는 구원에 하나님이 개입은커녕 영향도 전혀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 사람의 믿음을 보고 구원해준다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만 판단하는 시험 채점자에 불과해집니다. 그럼 실질적으로는 다른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행위구원으로 바뀝니다. 믿는다는 것도 인간의 행위에 속하며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

 

바울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유대교 모태신앙으로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오히려 열렬한 반대자 박해자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한 인간이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후에 인간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도 안 되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이 유대사회에 번져나가고 있다고 오해했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사형수를 경배하는 자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로선 절대로 그대로 두어선 안 되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척결해야 할 그분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알다시피 스데반 처형을 주도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 예수 믿는 신자를 체포하려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고 기세당당하게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일대일로 대면하고 사흘 간 봉사가 됩니다. 그가 가졌던 이전의 유대교 사상이 완전히 뿌리 채 흔들리다 못해 뽑혀 나가는 심한 영적인 갈등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 사흘 동안에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여 그의 심령에 깊이 자리 잡은 여호와 성전과 율법 중심의 형식적 유대교는 완전히 제거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긍휼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이성에 따라 형성 작동되는 철학 윤리 종교의 가르침과는 완전 별도로 오직 외부에서의 초자연적인 간섭으로 자신의 영혼이 뒤엎어진 결과였습니다.

 

예정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누차 말씀드린 대로 전혀 구원 받을 생각이 없고 심지어 그분과 원수가 되었던 자에게마저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구원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예정이 되어있으니 당연히 먼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당신과 원수 되었던 바울을 먼저 찾아와서 지난 모든 죄를 용서하고 구원을 먼저 베푸시고 이방인의 사도로까지 세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예정론을 가르치셨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님과의 대면이라는 생생한 체험은 필연적으로 예정이라는 교리로 발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이 예정을 그에게 말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거듭남의 체험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성경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님과 바울의 개인적인 만남을 네 번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행9:1-19, 22:4-16, 26:9-19, 갈1:11-24) 이중 사도행전 9장만 간접적인 보고의 형식이고 나머지 셋은 바울의 직접적인 고백입니다. 바울이 동일 사건을 성경에 세 번이나 스스로 언급할 정도면 자기 믿음의 출발과 바탕이 오직 그 사건에 연유다는 점을 강조한 셈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그 사실을 별도로 기록했다는 것도 바울이 가르친 구원의 진리와 그가 기독교 생성에 끼친 중대한 영향력들이 그 회심 사건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초대교회에서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도저히 잊을 수 없고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찼던 그 구원체험을 예정론으로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그 체험은 자기가 고안해낸 것이 당연히 아니며 예수님만이 역사해줄 수 있는 정말로 신비롭고 의로운 신적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구원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르쳤다는 주장은 정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왔어도 바울이 믿었기에 구원 받은 것이지, 주님이 바울에게 먼저 찾아왔다고 해서 예정이 꼭 옳다고 말할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해도 인간이 거부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신 뜻이라고 말합니다. 언뜻 그럴싸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겠다는 계획을 이미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또 모세의 율법과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대비해서 구원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도로 세우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 대한 계획을 미리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를 미리 예정만 한 것을 넘어서 그 계획에 합당한 자로 미리 준비 훈련시키고 있었다는 뜻도 됩니다. 바울 본인은 물론 예수님과 원수 상태였으니까 그 계획을 미리 알 수 없었고 단순히 모든 여건과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아주 경건한 바리새인으로 스스로 훈련 성장했습니다. 바로 그의 그런 성장 배경과 다메섹 사건이 있을 때까지의 모든 영적 체험도 하나님이 작정하고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지 않을 자에게 찾아갈 리도 없고 그 전에 택할 리도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믿을 것이 확실한 자를 택했다는 것이 바로 예정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정에서만큼 광대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잘 드러나는 그분의 역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정을 가르치지 않고 바울의 독단적인 의견이라고 주장하려면 그의 이신칭의(以信稱義)나 삼위일체 교리도 부인해야 합니다. 이 둘 또한 예수님이 명시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주님의 가르침, 사역, 특별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안에 분명히 계시된 그분의 절대적 진리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간섭으로 그 진리를 깊이 깨달았고 초대교회 교인들 모두도 동의하고 한치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정도 바울 개인은 물론 당시 사도들이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대면 교제 특별히 성령의 거듭남 등의 동일한 체험을 통해서 동일하게 깨달은 진리입니다. 바울의 이신칭의와 삼위일체론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예정론도 인정해야 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다른 모든 논의를 제외하고 논리적으로만 따져도 현재의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한다면, 에베소서 1:4-14에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는 바울의 예정론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아예 예정과 관련된 구절들을 다 들어내고 성경을 따로 저작해야 합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고고학 발굴에 힘을 써서 예정을 부인하는 성경의 최초원전을 찾아내든지 말입니다.

 

1/28/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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