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장이 비유와 예정론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9:21-24)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 비유를 일부에선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말씀하는 것이지 개인구원의 예정과 유기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전체 문맥에서 따져서 그런 의미가 된다고 말하지만 앞뒤를 연결해보면 오히려 개인 구원의 예정에 관한 의미가 더 강합니다.
우선 토기장이 비유 자체를 해석하는 데에 집착해선 안 됩니다. 비유란 어디까지나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를 더 선명하게 설명해주는 보조 역할만 합니다. 토기장이가 귀히 쓰거나 천히 쓰는 그릇으로 나눠서 만드는 것은 오직 토기장이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나눠서 각기 다르게 통치하시는 것도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속하는데 독자가 주목해야 할 바울이 강조하려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논의를 하게 된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로 유대인으로 왔는데 왜 동족 유대인의 배척을 받았으며 그들은 잘 믿지 않고 이방인 신자들만 많아지는가라는 의심 비평 반발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9-11장에 걸쳐서 변증을 하면서 토기장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을 당신의 주권에 따라 다스릴 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초대교회 당시의 이방인이 오히려 예수를 더 많이 잘 믿는 역설적인 상황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른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논의를 이끌고 가다가 결론을 어떻게 내렸습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11:25,26a) 쉽게 말해 충만한 수의 이방인더러 먼저 믿게 하고 그 후에는 이스라엘도 믿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체 맥락에서 보면 개인구원과 관계없는 것 같으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바울이 변증하고 있는 주제가 유대인 대다수가 왜 동족 예수를 배척하느냐는 즉, 유대인들은 왜 구원 받는 숫자가 적느냐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개인구원과 관련된 질문이므로 바울의 변증의 주제도 그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예수를 믿어 구원 받는 일은 한 개인과 연관되지 한 민족 전체를 구원하는 법은 없습니다.
이 논증의 결론도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구원 받을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이방민족 전체가 그것도 한 명 빠짐없이 다 구원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해서 마찬가지로 한 명도 빠짐없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어법상 아주 많다는 뜻으로 온(all Israel)이라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말에도 여의도에 백만 관중이 모이면 온 서울 사람들이 다 모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방인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유대인 중에서 충만한 수가 구원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대다수 혹은 최소한 과반수라고 예측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만한 숫자일 뿐입니다. 당신께서 구원을 주기로 택한 자들은 당신의 때가 되면 한 명도 누락시키지 않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이스라엘과 이방족속에 대한 주권적 통치에 관한 논의가 롬11:26의 결론에선 그들 중에 구원 받을 숫자에 관한 설명으로 바뀌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구원은 민족 단위가 아니고 개인별로 이뤄질 뿐 아니라 이 변증의 시발 자체가 구원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사항은 토기장이 비유를 풀어서 설명하는 말씀에서부터 개인의 예정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천히 쓸 그릇은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인데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귀히 쓸 그릇은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인데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둘로 나누어서 각기 다르게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에서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9:20)라는 반어법으로 하나님께 불평 원망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9:24에서 그렇게 둘로 나눈 그릇을 누구라고 설명합니까?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 그릇은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 즉, 구원 받는 그릇인데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중에서 한 족속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민족이 아니라 “부르신 자” 즉, 구원 받기로 택함 받았기에 하나님이 구원을 선물로 준 개인입니다.
그럼 그 반대도 성립됩니다. 진노의 그릇은 “우리가 아니라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니라.” 민족의 구분 없이 예정에 속하지 못한 유기된 자들 모두가 진노의 그릇이 됩니다. 요컨대 바울은 유대인들이 동족인 예수를 배척하고 또 많이 믿지 않는 까닭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계획에 따르는데 그 구원은 예정에 따라 이뤄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논의의 앞부분에선 이스라엘이라고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약속의 씨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선 이삭만, 이삭에게선 야곱만이 약속의 씨앗이 되는데 그들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나님이 택했다고 강조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0-13)
이는 분명히 개인의 구원에 관한 진술입니다. 나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것도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실행하려고 야곱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럼 신자가 믿을 것을 미리 알고서 택해준다는 예지예정론도 성경은 지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자면 로마서 9-11장의 주제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말씀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민족별로 이뤄지지 않고 오직 개인에게만 적용되므로 그 주제 자체는 물론 그것을 보충 설명하는 토기장이 비유도 개인의 예정에 관한 진술입니다.
(10/1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