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함 받은 자에게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

 

열매 맺게 해주시는 예수님

 

하나님은 불신자를 심판으로 미리 예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악의적으로 끝까지 당신과는 어떤 관계도 맺기를 싫어하므로 그런 상태로 생을 마치게 될 뿐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당신의 일을 대행할 일군으로 세우기 위해서 구원으로 예정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부르심부터 그랬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1-3)

 

먼저 하나님이 불러내시고 당신이 주실 땅으로 가라고 했는데 그 자체로 그에게 이미 소명을 부여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땅의 모든 족속들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얻게 하는 것인데 그들이 받을 복도 그처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후손들은 물론 이방인들로 자기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 그가 맡아서 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부터 전도자로 세우려고 택한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예수님도 당신께서 제자들을 택했는데 열매를 맺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로 승천하기 직전에 간곡히 당부하셨듯이(행1:8, 마28:20) 세상의 땅 끝까지 끝 날까지 당신의 십자가 복음을 전할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럼 제자들이 주님의 일에 충성하여서 열매를 맺게 할 만한 자격과 조건이 되니까 택한 것 아니냐고 반발할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들을 편애하거나 특혜를 준 것이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분의 종으로 택함 받지 못한 자로선 어쨌든 억울하고 불공평하다는 불만과 의심이 대두될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만의 거룩한 목적으로 택했든 간에 미리 둘 중 하나로 정했다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항상 생기는 반발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포도나무 비유(요15:1-16)를, 상기에 인용한 말씀이 그 결론임, 잘 살펴보면 그런 반발은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나무이고 제자들은 가지이므로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가 맺히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당신께서 택한 제자들에게 당신이 맡기셨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신께서 다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택함 받은 사람에게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혜를 준 것도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어둠이 더 좋아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고의로 끝까지 거부한 자들입니다. 그들로선 당신의 일꾼으로 쓰려고 하나님이 택하겠다고 하면 차라리 택함 받지 않은 쪽을 더 선호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열정적으로 받고 싶지만 그분이 시키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또 하기 싫어하는 명색만 교인인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이 올바른 신자도 전도에 재능과 은사가 있다고 스스로 자신하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전도자로 택함 받은 데에 그럴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편애나 특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 반발을 어떻게 부인하는지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자기 주변부터 전도하게 하는 택함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1)

 

예수님이 구원으로 부르시는 이들 사이에는 지혜와 능력과 문벌, 헬라나 유대 같은 언어, 할례파와 무할례파 같은 종교, 야만인이나 스구이다인 같은 인종, 종이나 자유인 같은 신분 등에서 일체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바꿔 말해 모든 신분, 계급, 인종, 나라, 종교 등에서 골고루 당신의 자녀를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이 간섭하면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있기에 더더욱 택함은 인간 신자가 이미 갖고 있던 자질과 조건에 전혀 구애받지 않습니다.

 

실제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베드로가 설교하자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중에서 삼천 명이나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들이 살던 로마제국의 곳곳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자로 택함 받았던 것입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2:7-11)

 

이들이 각지로 다시 흩어져 기독교인 공동체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 초대교회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바울은 자신이 방문하기 전에 로마에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었기에 로마서를 저술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오순절 현장에 있었던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들이 돌아가 그 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봅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 가옥에 연금 당했는데 그곳에서 로마군인은 물론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은 로마의 교인들도 더 힘을 얻고서 담대하게 전도했다고 바울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1:12-14)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복음의 특성상 아무래도 로마제국 내의 노예나 종들이 예수를 먼저 믿게 되었고 그들 또한 주님의 사랑으로 주인들을 섬김으로써 귀족들도 개종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엡6:5-8)

 

일반 노예들과는 전혀 다른 섬김을 받은 귀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자 그들 또한 그 노예들을 동일한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6:9) 그 결과 초대 교회에선 신분과 재산과 권세로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한 주님 안에서 모두가 동일한 형제와 자매였습니다. 귀족과 자기들이 부리는 노예가 함께 예배드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며 신실하게 섬겼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세상과는 달리 외모로 차별하지 않으면서 참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참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신분과 권세의 구분 없이 구원할 자를 택했다는 것은 자기가 속한 바로 그 계층 안에서 즉, 자기 주변에서부터 전도하라는 뜻입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 밀가루에 들어간 누룩 가루가 주변부터 부풀어 오르게 하여서 점차 전부를 부풀게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그렇게 확장된다고 주님이 가르치셨던 그대로입니다.

 

자기 주변에서부터 전도시키기 위해 택했다면 단지 시간적으로 먼저 구원 받았다는 뜻일 뿐입니다. 그의 전도를 받는 자도 마찬가지로 그 택함에 어떤 자격과 조건은 한 치도 개입되지 않았고 단지 전도하는 자보다 순서로 따져 나중에 구원 받은 것뿐입니다. 물론 그 사람 또한 그가 전도할 다른 사람에 비해선 먼저 구원 받은 셈입니다. 바울도 같은 맥락에서 로마서 9-11장에서 이방인이 유대인보다 단지 구원의 순서에서 앞장선 것뿐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예정 구원에서 당신만의 주권으로 독단적으로 결정한 유일한 사항은 바로 이 구원의 시간적 순서일 뿐입니다. 그럼 예정 구원이 불공평하다고 하나님께 따져볼 사항이 있다면 유일하게 바로 그 순서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왜 나를 좀 더 빨리 구원해주지 않았느냐? 왜 나를 다른 이보다 늦게 구원해주었느냐?”라고 얼마든지 하나님께 불평 원망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 외에는 예정구원에서 단 한 치의 불공평과 불합리는 개입되지 않습니다. 시간적 순서도 엄밀히 따지면 인간의 인식 차원에서 생기고 머물지 시간 밖에 계시며 시간과 전혀 무관한 하나님에겐 아예 성립되지 않는 불평입니다.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신 예수님

 

주의 종으로 부르되 자격과 조건으로 택한 것이 전혀 아니라면 이제 택함이 편애나 특혜에 따른 것은 아닌지 자세히 따져볼 차례입니다. 신자로 부르심에는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음”(고전1:26)은 분명합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는 도무지 구원 받을만한 자격과 조건이 안 되는 자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언뜻 구원으로 택함 받은 것이 특혜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자격과 무관하게 택한 우선적인 이유를 성경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고전1:29) 이라고 말합니다. 구원과는 가장 멀어 보이는 자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구원 밖에 있는 사람들로 보게 만들려는 뜻입니다. 나아가 살펴본 대로 자기 주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도록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다 부르신 것입니다.

 

만약 이와 반대로 하나님이 지혜나 능력이나 문벌이 좋은 자들 위주로 부르셨다면 그 사람에게 어쨌든 구원 받을 자격과 조건이 되니까 구원을 주신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따지면 그런 구원은 인간 쪽에서 그런 자격과 조건을 스스로 갖추려 노력한 열매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따로 택할 필요가 사실상 없습니다. 이미 인간이 열심히 공부해서 합격 점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절대적으로 선행 구원이 아니라 은혜 구원입니다. 그럼 그 구원의 조건과 자격을 전혀 따지지 않는 택함 또한 절대적으로 필연적입니다. 바꿔 말해 예정 구원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구태여 죄인들을 위해 대속 제물로 바쳐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래서 인간의 자력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주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놀랍게도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그렇게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사53:8) 예수님은 인류를 위한 대속 제물로 바쳐질 텐데, 오늘날의 불신자들이 반발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냥 로마의 한 사형수로 여길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영적인 시체입니다. 그들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죽음으로 갚고 그 의로 구원을 주시려는 은혜구원을 죄에 찌든 인간들이 알 수 없었습니다. 삼년간 동고동락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배웠던 제자들마저 골고다 형장에선 전부 배반하고 도망갔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같은 핍박이 따라오는 부르심

 

신자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동일하게 걸어가라고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8)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당신의 참 제자라면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핍박이 따른다고 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4)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따를 자들의 숫자가 적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20) 당신께서 걸어가신 길이 너무 험난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택함을 받은 신자들은 그 믿음으로 인해 큰 희생과 손해가 일상적일 것임을 반드시 각오해야 합니다. 실제로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거의 전부 순교 당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예정론을 확정적으로 설파한 바울이 가장 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예정을 입은 신자의 일생에 고난이 따른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2-27)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라고 시작하는 말씀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바울은 바로 앞에서 “육체를 따라 자랑하는 (거짓) 일꾼”(18절)들의 잘못들을 탓한 후에 자기가 겪은 환난과 핍박을 열거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자기처럼 핍박과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면 올바른 일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바울 자신의 일방적 자랑이나 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특성상 복음을 전하는 자는 불신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 십자가 복음은 멸망하는 자에겐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 전해지니까 격렬히 반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정을 단순히 구원과 심판으로 미리 나눴다는 차원으로만 이해해선 안 됩니다. 그럼 아무 조건과 자격 없이 천국 입장권을 받는 특혜를 입었다고, 또 그 반대로 예정에서 빠진 자들은 일방적인 차별을 받았다고 자꾸 오해합니다. 예정 구원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따로 불러내어서 평생 동안 그분이 맡기신 일을 수행하며 그분을 따라가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 모든 신자에게 반드시 큰 희생과 수고가 따르며, 때로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택함입니다.

 

가뜩이나 어둠이 좋고 빛이 싫어서 주님을 믿지 않던 자들이 믿게 되면 목숨까지 잃게 된다고 하면 발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다 도망갈 것입니다. 삼 년간이나 동고동락하며 주님께 직접 배웠던 제자들조차 한명은 은 삼십 냥에 스승을 팔아넘겼고, 나머지 모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뿔뿔이 흩어졌지 않습니까? 그나마 대제사장의 관정에까지 따라간 베드로도 세 번이나, 나중에는 저주하며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않고 항변조차 하지 않는 너무나 무력한 스승을 보고 자기들도 똑같은 핍박을 당할 것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시로선 하나님을 가장 잘 믿어보려 했던 유대인들,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영적으로 시체였을 뿐입니다. 이런 판국에선 하나님의 입장에선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구원할 자를 택하여서 그것도 성령으로 간섭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구원의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지성 이성 영성으로 십자가 복음을 알아 듣고 자유의지로 믿기로 스스로 결단하기만 하면 구원 준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분의 은혜를 무시하는 큰 잘못입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아주 교만한 죄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지혜와 능력과 문벌이 좋지 않은 자들 위주로 부르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심한 핍박

 

종교적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이라고 신자들에게 핍박이 따르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선 원시 미개지의 열악한 환경이나 타 종교가 주도하는 지역에서 선교하다 순교하는 종들이 많습니다. 그런 노골적인 종교적 박해가 없는 선진사회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 유독 개신교에 대해 아주 교묘하게 사회적 법률적 차별과 위해가 가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예컨대 성경에 엄연히 죄라고 명시된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하면 범죄자가 될 판입니다.

 

일반 신자 개인적으로도 정말로 예수님의 길을 순전하게 따르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불법과 부정과 사기와 거짓에 휩쓸리지 않으면 세상으로부터 반드시 온갖 비방 음해 모략 핍박이 따라옵니다. 심지어 모함과 누명으로 덮어씌워서 죄인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원죄 아래에서 여전히 어둠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때와 마찬가지로 신자에게 돌을 던지고 그 사회에서 격리 퇴출시키려 듭니다. 예수님이 생명으로 가는 길은 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예언하신 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들만 남겨둔 채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신다고 하니 걱정과 불안이 앞선 제자들에게 위로를 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대놓고 예언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그런데 제자들로 그런 환난 가운데도 평안을 누릴 수 있게끔 약속의 말씀을 먼저 주셨다고 합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이르신 “이것은” 최후의 만찬 전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강론하신 요14:1-16:32의 내용 전부를 말합니다.

 

그 요점은 당신은 성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 너희에게는 또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당신의 죽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깨닫게 해주고 지금껏 주님이 함께 하셨던 것처럼 똑같이 인도해주실 것이니 환난을 당해도 얼마든지 이겨내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이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해줄 텐데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16:11)고 했습니다. 세상 임금인 사탄이 이미 심판받았다고 과거시제로 말하는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실 승리를 뜻합니다. 그 승리를 온전히 믿으면 제자들에게 성령의 위로와 권능이 충만하게 역사해 환난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8-12)

 

사도 바울은 신자들은 예수님의 생명을 몸에 지니고 있기에 세상에서 어떤 환난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질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망하지 않는 것은 주님 안에서 얻은 영적인 새 생명인 반면에 이 땅에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육신적 생명은 항상 죽음에 넘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신자들은 이 땅에서 육신적 죽음을 당하지만 그럼으로써 영적으로 죽어가는 불신자들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 오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심판하지 않고 구원한다고 합니다. 불신자들은 자기들이 택한 길대로 걸어갈 뿐입니다. 처음 믿은 자, 처음 구원으로 택함 받은 자는 주님의 이런 구원에 동역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구원으로 택함을 받아 먼저 믿은 자는 다른 이로 함께 믿게 하려고 먼저 선택 받은 것뿐입니다.

 

전도은사가 없어도 전도자로 택함 받았다.

 

주의 종으로 세우려고 구원으로 택하는 하나님의 이 원리는 구약시대에도 동일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에서 전도자가 되라고 불러내셨습니다. 그런데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해놓고 막상 복을 받는 자는 그가 아닌 그를 축복하는 자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 아브람은 단지 이방인들에게 여호와를 알게 해주는 복의 통로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삶은 평생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고 죽을 때에 후손이 창성해지기는커녕 약속의 아들은 하나뿐이었고 그가 얻은 땅도 자기 시신이 누울 무덤뿐이었습니다. 대신에 그는 가는 곳마다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경배했습니다. 사악한 우상숭배의 땅에 전혀 다른 거룩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또 이방의 두 왕에게까지 여호와의 권능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모든 믿음의 후손은 아브라함처럼 반드시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선진들 노아, 요셉, 모세, 다윗, 선지자들 모두가 너무나 힘든 일생을 살았습니다. 일례로 십자가에 수난 받을 종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가장 정확히 예언한 이사야는 산 채로 톱으로 몸이 잘리는 모습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성경은 그래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은 떠나온 세상의 풍요한 본향을 사모하지 않고 하늘에 시민권을 둔 자답게 뒤를 보지 않고 오직 천국만 소망하며 이 땅에선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선언합니다.(히11장) 만약 우리가 구원을 주되 반드시 그런 고난의 삶을 평생 살아야 한다고 미리 귀띔해준다면 틀림없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지레 겁먹고 구원을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구약의 선진들도 모두도 이런 저런 모양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주의 종으로 불림 받았습니다. 당신을 대면하면 죄에 찌든 추악한 인간은 그 자리에서 바로 소멸당하지만 그들로 당신을 증거하는 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해서 살려주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만난 자는 거룩하게 변화될 수밖에 없고 나아가 그분께 평생을 두고 충성 헌신하게 됩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기꺼이 감사하며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전도하는 종으로 부름 받았다고 하니까 혹시라도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전도란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다른 사람에게 비처지게 하는 일입니다. 단순히 교회의 교인으로 등록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당신과 원수의 자리에 있던 죄인까지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셨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서 주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신자로선 자연히 세상 사람과 달리 거룩하게 살 수밖에 없으며 또 그런 모습이 남들 앞에 자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요컨대 올바른 믿음을 가진 신자라면 누구나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모든 신자는 전도자 선교사 목회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자기가 서있는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던 새롭게 변화되어진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워내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 저들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고 싶다는 도전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떠나지 않고 신자에게 내주하시므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긴 바울이 이렇게 선언하지 않습니까?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8,9)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니까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며 사랑 받을 만하며 칭찬 받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랬기에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염병처럼 번져나간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다는 것이 단순히 전도자자 전해주는 복음을 내가 알아먹고 수긍해서 천국 입장권을 확보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일꾼으로 목숨을 바치는 일꾼으로 택함 받은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도 제대로 깨달을 수 없는 인간 중에 순교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초대에 응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해 구원을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엄청난 일인지 아셔야 합니다. 세상이 아름답고 거룩해지는 일과 사람들이 영원히 살고 죽는 일이 신자들의 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4/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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