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예정론의 결론

조회 수 878 추천 수 2 2020.04.28 10:12:08

알기 쉬운 예정론의 결론

 

길 가다 천국입장권을 주은 행운아(?)

 

예정론 구원에 대해 불공평하다는 불만을 갖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사람을 구원과 심판 둘로 독선적으로 나눴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결과만 살피면 구원 얻은 자는 그야말로 길가다 천국 입장권을 그저 주은 것 같으니 하나님의 공평성이 의심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어둠을 더 좋아해서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끝까지 자의에 따라 악의적으로 미워하고 배척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제 멋대로 세상의 모든 쾌락을 다 즐기며 평생을 마치도록 그대로 놓아두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따로 심판으로 예정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당신의 뜻을 평생토록 수행할 일꾼만 구원으로 택하기에 결코 공짜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순교도 당해야 할 정도로 큰 환난과 핍박이 따라옵니다.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따지면 구원으로 택함 받은 자를 행운아라고 부러워할 수만은 없습니다.

 

신자가 전도나 선교하다가 겪는 박해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죄악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어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수시로 고난으로 연단하십니다. 심지어 강권적으로 사방이 막히고 생명을 걸어야 하는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당신의 뜻대로 따르지 않고 죄를 범하는 당신의 백성은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징계를 내립니다.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사백 년 간이나 노예로 혹사시킨 냉정한 여호와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숭배를 하며 온갖 세상 쾌락과 죄악으로 실컷 즐기는데도 아무 벌을 내리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서 말입니다. 나아가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사십년 간 방황하다 전부 진멸되게 했습니다.

 

신약의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들과 수많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순교했습니다. 요한 사도만 당신의 세상 끝 날에 대한 계시를 받아서 기록하게 하도록 처형을 면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섬에 유배된 죄수로 생을 마감했으니 순교한 셈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0,21)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을 히브리서가 어떻게 표현합니까? 오직 하늘의 본향을 사모했기에 땅에선 나그네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에 “부끄럽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당신의 종들이 당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아주 기뻐할 일인데도 부끄러워 아니한다고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합니다.

 

그렇게 표현한 까닭은 사람들이 신자들을 보는 관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정반대의 시각으로 신자를 대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신자들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너희가 그렇게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동안에 너희 하나님은 뭐하고 있느냐, 너희들을 그렇게 고생시키는데 그런 하나님을 왜 믿느냐, 아니 그런 자가 하나님이 될 자격이 있느냐, 너희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보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네.” 등등의 비방과 조롱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신자들 둘 다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바울이 설명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당시에는 신자로 택함 받은 것을 두고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하나님의 특혜나 편애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신자들의 삶이 현실적으로 너무 궁핍한데다 온갖 핍박을 감수하고 기꺼이 생명까지 바쳤기에 사람들은 너무나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예수 믿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부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신자들이 구원으로 택함 받았든지 말든지 또 자기들이 심판으로 예정되었든지 말든지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도 예수 믿는 신자를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멸시합니다. 우선 신자들의 삶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와 다르게 위선적 형식적 광신적이라고 비방합니다. 그러면서도 도리어 자기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정죄하니까 아주 싫어합니다. 심지어 성경의 진리를 잘 모르고선 심판으로 미리 예정되었다고 단정지어니까 말도 안 되는 말을 한다고 경멸까지 합니다.

 

참으로 심각한 말씀을 드리는 중입니다. 만약 오늘날의 신자들도 초대교회 신자들과 똑같은 모습의 삶을 살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전히 흑암이 좋아서 예수님을 배척했듯이 신자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긴 해도 속으로는 분명히 양심이 찔림을 받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좁고 힘든 길만 걸어가는 신자들의 현실 삶이 너무 궁핍해서 예정 구원에 대한 시시비비는 아예 없을 것입니다.

 

본인 고백 없이는 예정론은 무효하다. 

 

그리고 예정론은 초대교회 신자들 스스로에게도 아예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 서신서에 설명된 예정을 너무나 당연하게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들에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의 영광이 너무 컸고 모든 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오직 예수님의 은혜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떻게 노예가 자기가 모시던 귀족이나 왕족 주인을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 함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한 식탁에서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말입니까?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평생 아무 의미와 가치도 없이 자유 한 번 누리지 못하고 노예로 살다 죽기 마련이라 아무런 소망이 없던 인생이었습니다. 노예보다 더 큰 불행만 안 생기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자들이었습니다.

 

사실은 귀족이나 왕족들에게 생긴 변화가 더 극적입니다. 당시로선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하고 있음에 스스로 자기들에게 놀랐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주위 사람들의 눈치가 조금 보이긴 했으나 차츰 아무렇지 않게 노예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종이나 노예들도 자기들과 동일한 성정과 인격을 가졌을 뿐 아니라 자기들보다 훨씬 더 고상한 성품을 지닌 자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교제하면서 넘치는 예수님의 권능과 은혜를 느꼈습니다. 지금껏 누리던 모든 특혜가 취소되고 그 사회에서 추방될 수 있음에도 그들을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노예와 상류계급에 공통적으로 일어난 변화는 자기 스스로의 도덕성과 종교성만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예수님의 제자들부터 주님을 닮은 자들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제자들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권능이 그 주변 사람들도 십자가 복음으로 하나씩 둘씩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나감으로써 가능해진 일이었습니다.

 

스스로 도무지 불가능했던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자기들의 필요나 계획 때문에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당신의 필요와 계획 때문에 구원으로 택한 것입니다. 그렇게 택한 자들이 온전히 믿을 수 있게 되기까지 하나님은 온갖 방식으로 간섭하십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성령을 부어주시고 믿음으로 반응하게 만들어 신자가 되게 합니다.

 

그들로선 예수 믿기 전의 삶을 지금의 삶과 비교해서 되돌아 볼 때에 나를 구원으로 택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예정을 교리로 배워서 동의 수긍한다고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예정교리와는 별개로 예정의 은혜 안에 푹 잠겨서 살고 있었습니다. 예정은 예수를 주로 영접하여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 안에 있는 신자라면 누구나 쉽게 깨닫고 평생토록 감사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

 

바울의 고백이지 신학이 아니다.

 

예정을 바울이 고안한 그의 고유의 신학이지 예수님이 제정한 교리가 아니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변론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이 세운 교리는 사실상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자 교리라고 명확히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교육방식은 한 집에서 함께 기거하며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의 삶은 물론 그 행동과 말투까지도 따라했습니다. 강론도 많이 하지만 주로 이야기, 비유, 예화 등을 통해 간접적인 가르침을 줍니다. 네 복음서가 증명하듯이 예수님도 열두 제자들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가르쳤습니다. 내용이나 형식에서 기독교교리에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도 하나님이 이미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확장해서 더 정확히 풀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은 기존의 랍비와 달리 권세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더 자세히 설명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전혀 몰랐던 새로운 해석과 진리를 덧붙였습니다. 나아가 스승으로 설득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입장에서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인간이 믿던 안 믿던, 심지어 동의하던 안 하던 관계없이 선포했습니다. 그런 가르침 중에 절정은 말씀의 강론보다도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한 후에 승천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삶과 사역과 죽음을 포함하여 모든 방식의 가르침 전부가 주님이 세운 신학이자 교리인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신학과 교리도 예수님의 진리가 계시된 네 복음서를 비롯해 성경전체에 일관되게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들을 신학자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비교 검토 연구하여 핵심적 요소들을 추출 정리해서 체계화한 것입니다.

 

바울이 역사상 가장 논리적이고 위대한 신학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학도 성경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을 만나 준 사건을 통해 주님이 그에게 십자가 복음의 정수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기가 깨달은 주님의 계시 즉, 교리들에 관해 주님의 직접 제자들과 토론 확인하여서 바르게 정리했습니다. 바울의 신학이 예수님의 직접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이 가진 신학과 다를 수 없으며 본질상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준 것들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입장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예정론을 내가 고안해낸 나만의 신학이자 교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고 또 못할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부르심’입니다. (참고로 신약의 서신서에 31회, 바울 서신에만 23회) 부르심을 입은 나 바울이라고 자신에게 적용한 적도 많습니다. 자기가 자신을 예수님께 부르심을 입었다고 표현했는데 어떻게 예정론이 바울 고유의 신학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어떤 이라도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예정을 입어 구원 받았다고 저절로 고백할 것입니다. 요컨대 예정론은 설명이 필요 없는 체험적 교리라는 것입니다. 설명할수록 더 의심과 미궁에 빠트릴 수 있습니다. 당대의 최고 변론가인 바울이 실제로 자신이 생생하게 체험한 내용에 기초해서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했는데도 지금 온갖 논의가 분분합니다. 저의 설명은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제가 처음부터 댓글을 달기를 아예 금지시킨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정은 자기 쪽에 정말로 자격 조건 능력 공적이 눈곱만큼도 없었고 믿으려는 의도는커녕 상상도 못했던 자들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심하게 대적했던 저도 구체적인 과정과 의미는 모르지만 자꾸만 예수를 믿게 되는 쪽으로 인생이 이끌려가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믿음으로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내 존재와 삶과 인생의 온전한 구주이며 주님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당신만이 알파요 오메가입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넘치는 감사와 기쁨 가운데 고백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한 번이라도 인격적으로 대면했던 자에게는 예정론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의심도 없이 자연히 저절로 고백하게 되며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의아해질 뿐입니다. 구태여 신학적으로 깊이 따질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진리가 한계성을 지닌 인간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인류 최대의 신학자 바울이 최선의 방식으로 설명해 놓았음에도 너무나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인지라 온전히 알아먹지 못합니다. 그전에 예수님만한 최고의 스승이 없는데도 제자들은 진리의 영 성령이 오기 전까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 않습니까?

 

삼위일체 교리도 예정처럼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아서 바울이 확립한 셈인데 마찬가지로 설명할수록 어려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유일신 여호와만을 절대적 진리로 믿었고 그래서 인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나사렛 이단을 없애려고 극렬하게 설쳤던 바울입니다. 그가 삼위일체 교리를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 분명했고 그 진리를 깨닫게 해준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을 보십시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6:10) 기독교 교리 전부가 실은 성령이 간섭해주어야 체험을 통해 온전히 믿고 고백할 수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며 예정론도 교리 이전에 새 생명을 선물로 받은 자들의 체험적 고백입니다.

 

예정론의 개요

 

연재를 시작하면서 칼빈주의와 알미닌안 주의를 신학적으로 비교할 의사도 실력도 없다고 전제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추적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그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예정론을 그 논리의 흐름에 따른 몇 가지 단계로 다시 쉽게 간추려보겠습니다.

 

첫째: 가장 먼저 신구약 성경의 인물들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살펴봤는데 예정이 아닌 구원이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구약의 요셉과 신약의 바울을 꼽을 수 있었습니다. 신구약 인물 모두가 예정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동일하신 한 하나님에게 구원방식이 둘이 될 수 없기에 당연히 예정구원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둘째: 그들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자신들의 자유의지가 서로 상충 모순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모두가 일생토록 자기가 처한 사건과 여건에서 스스로의 이성과 의지로 자유롭게 판단 결정 시행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으로 예정해서 당신께서 목적한 바대로 당신의 일에 쓰임 받게 그 인생을 이끌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의지가 상충된 적이 한 번도 없었음도 확인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구원에 관해서 어떻게 가르쳤는지 살펴봤습니다. 제자들을 당신께서 예정하여 택했을 뿐 아니라 직접 말씀으로 예정을 가르쳤음도 확인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우리 믿음의 주요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 예정에 관해 가르쳤으면 사실상 더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넷째: 그럼에도 예정구원에 하나님의 불공평성이 개입된다는 반론들이 신자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구원과 심판으로 나눴다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것이 첫째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시간에 묶여 사는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생각입니다. 시간을 만드시고 시간 밖에서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에게 시간적으로 미리 예정했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완전하신 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빛이 있으라.”고 명하시면 바로 빛이 생기듯이 구원과 심판에 대한 당신의 영원한 현재적인 뜻만 있을 뿐입니다. 그 뜻을 시공간에 제한받는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니 예정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 어떤 흉악한 죄도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이 구원과 심판으로 미리 일방적으로 나눈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에 부합되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을 너무나도 긍휼히 여기시지만 끝까지 구원의 손길을 뿌리치는 사람까지 구원으로 예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동네에 의사 한 분이 있다면 모든 이의 모든 병을 자신이 고쳐주고 싶어 하나 끝까지 민간요법을 고집하며 병원에 오지 않고 살다가 죽는 경우와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그 경우 그 의사의 인자한 성품에는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품과 구원의 방식은 별개이며 예정은 당신의 성품이 아니라 구원방안에 관한 교리일 뿐입니다.

 

여섯째: 어쨌든 결과적으로 구원과 심판으로 나눠지면 불공평하다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우선 심판은 미리 예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불신자들은 끝까지 완악하게 당신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기에 하나님은 그 상실한 마음을 그냥 그대로 두실뿐입니다. 참 빛인 예수님이 이 땅에 왔으나 어둠을 더 좋아해서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성경은 심판 형벌을 예정으로 혹은 추가로 가한 것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일곱째: 따로 심판으로 예정하지 않았어도 그 중에서 구원받는 자는 특혜를 받은 것 아니냐는 반론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동역자로 세울 자만 택하십니다. 임종 직전에 구원 받는 자도 특혜가 아니라 전도자로 부름 받았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정이 길 가다 천국입장권을 그냥 주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주 크고도 지속적인 수고와 희생과 책임이 따르는 택함입니다. 그 택함 받음으로 인해 평생토록 세상에서 직간접으로 핍박을 받아야만 하고 때로는 생명까지 바쳐야 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택함을 미리 안다면 오히려 구원을 거절할 것입니다.

 

여덟째: 무엇보다도 예정은 체험을 통한 신앙고백적인 교리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으면서 믿어보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자들의 삶에 하나님은 미리부터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주는 것 하나 없이 싫고 미웠던 예수가 어느 순간부터 아무 이유 없이 너무 좋아졌다고 실토합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여서 평생토록 그분 뜻대로 따르겠다고 헌신하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이 계속해서 주님을 거부 대적하고 있었음에도 주님 쪽에선 세밀하고도 은혜롭게 간섭하셨음을 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의심 없이 예정 받았다고 큰 기쁨과 감사로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신의 구원체험을 살펴보고 성경의 기록들과도 면밀히 비교하면 예정만큼 저절로 믿어지는 교리도 없습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정론을 1+1=2처럼 설명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알기 쉬운 예정론”이라는 제목 때문에 금방 손에 명확히 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가 여전히 이러저런 의심과 질문이 남아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로선 하나님이 왜 미리부터 독선적으로 예정했느냐, 왜 인간의사와 무관하게 구원과 심판 둘로 나누어야만 하는가, 사랑의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되지 않는 것 아닌가, 구원으로 택함 받은 자를 편애했거나 특혜를 준 것 아닌가, 등등의 가장 핵심 되는 반론에 대해 나름대로 성경적인 변증을 한 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이외에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를 어떻게 비교하고 이해해야 할지, 이미 예정되었다면 구태여 전도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이미 구원으로 예정되었다면 마지막 때의 백보좌 심판이 왜 있는가 등에 관해선 부록에서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정말로 중요해서 덧붙이는 말

 

마지막으로 반드시 추가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예정론을 정확히 이해하고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알미니안 주의가 더 옳은 것 같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구원 못 받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과 교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십니다. 죄로 타락해 자기를 최고로 높이고 자신의 주인이었던 심령에 성령이 간섭하여 예수님을 자신의 유일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을 거역했던 지난 인생이 완전히 실패였고 자신은 그분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 죄를 세상의 어떤 고상하고 경건한 도덕과 종교로도 씻을 수 없었음도 알게 됩니다. 요컨대 나를 대속해 제물로 바쳐진 예수님의 은혜를 정말로 순전하게 받아들이면 구원은 유효해지는 것입니다. 이것 외의 구원방안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신자는 세상 사람과 정반대로 주님 뜻대로만 살아가려고 인생의 목적 방향 방식이 바뀌었고 실천은 더딜지라도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자입니다. 본인이 자기 인생을 완전히 유턴했기에 제 삼자는 몰라도 그 구원을 하나님과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있는 것이 믿음이 행할 바 본질이자 전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살고 있는 자에게 예정론은 자기가 받은 구원의 의미를 더 깊고도 풍성하게 깨닫게 하고 더 신실하게 신앙 생활하는 데에 아주 견고한 근거와 큰 힘이 됩니다. 한마디로 삼위 하나님이 순교까지 시킬 수 있는 종으로 미리 택하여서 준비시키고 신자가 된 후에도 평생토록 실제로 그렇게 인도하고 있다는 것이 예정론입니다. 단순히 태어나기 전부터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로 독선적 일방적으로 나눈 것이 아닙니다. 

 

4/2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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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예정론은 바울의 고유사상인가? master 2020-01-28 623
11 하나님의 시간은 빼고 인간의 의지는 더해라. master 2019-10-16 1259
10 하나님예정과 인간의지가 상충되지 않는 과학적 근거 master 2019-10-10 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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