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으로 택함에 하나님만의 목적이 있다.

 

예정 구원의 목적

 

아담의 타락 후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반대의 자리에서 거역하고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믿지 않는 모든 자연인들은 그분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불신자를 심판으로 따로 택한 것이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평생토록 자신의 의지로 그분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을 뿐 아니라 완악하게 그분을 대적하다가 생을 마칠 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주어야할 자만 택하시지만 택함 받은 사람에게 그럴만한 조건과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택할 뿐입니다. 그분의 예정에 불공평함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 택함에 당신만의 목적 하나가 있습니다. 당신의 일을 맡아서 수행할 종으로 택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18-21)

 

하나님은 사람들을 예정으로 구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전도라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을 당신께서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그럼 전도를 담당할 자가 당연히 필요한데 먼저 믿게 된 자가 전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도자로 세우려고 구원으로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정 구원에 내포된 하나님의 목적이지 신자가 갖고 있거나 노력하여서 취득한 구원에 합당한 조건과 자격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교인이 열심히 전도해야만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며 전도 많이 했다고 더 특별한 구원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본질상 전도란 교회가 종교적 의무규정으로 제정해 신자더러 실천토록 권면 독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 때부터 인간 세상을 거룩하게 다스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들어있던 방안입니다. 모든 인간더러 당신만을 주인으로 삼아서 당신과 친밀하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면서 당신께 감사 경배 찬양케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그렇게 되어서 당신의 일을 대행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 땅에 세우려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담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자기만의 인간 왕국을 세우려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 후로 모든 인간은 그 원죄 하에 태어날 수밖에 없는데 구원이란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했던 바로 그 죄에서 건져주는 것입니다. 타락 이전의 당신의 창조 경륜을 다시 이 땅에 실현케 하려는 목적으로 말입니다. 하나님만을 다시 주인으로 모신 신자로 자기 주변에서부터 그분의 거룩한 공동체를 세워서 확장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대신할 자를 택하여 구원을 주십니다. 일꾼으로 쓰임 받아야 하므로 수고와 노력의 부담이 따르는 그분의 종입니다. 구원으로 택함 받음에 하나님의 편애나 특혜가 개입되는 불공평한 요소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전도는 왜 미련한가?

 

그런데 바울이 왜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이는 한 단어로 여러 의미를 동시에 드러내는 중의법(重意法)적인 언어유희(wordpla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당신의 권능을 사용하여 기적적인 방법으로 당신의 거룩한 나라를 세울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인간들이 거듭나 그분의 종이 되면 얼마든지 전도의 짐을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그 전해지는 내용이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여겨지고, 전하는 방식 또한 미련해 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전(傳)해야 할 도(道)가 예수님의 대속죽음인지라 그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완전한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그 십자가 진리가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것으로 비춰진다고 합니다. 심판으로 떨어질 불신자들은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는 신이 있다면 착한 일을 많이 한 자를 구원해주어야 옳다고 믿습니다. 어떻게 아무 공로도 없이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를 하나님이라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고 하는지 불공평하고 불합리하게만 여겨질 뿐 도무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도를 말로 전해야 하는 전도는 지속적으로 해야 하고 그 방식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구원을 받는” 신자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신자는 구원을 선물로 수동적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의 지혜에서 나오고 그분의 지혜가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를 어리석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의 그 판단을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만 그만큼 어리석은 생각도 없다는 것입니다. 앞장에서 살펴본 대로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선행구원이 합리적이라고 여기지만 오히려 그렇게 구원을 주는 신을 불공평 불합리하게 만드는 미련한 생각이었지 않습니까?

 

“믿는 자들을” 구원한다고 해서 전도를 받아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고 믿기로 결단하면 택함과 관계없이 구원해주는 것처럼 오해해선 안 됩니다. 바로 그 문장의 전반부에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도를 전하고 있는 자부터 처음에는 전혀 모르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 얻었습니다. 그에게 전도 받고 있는 자의 상태도 똑같으니 전도의 방식으로 십자가의 도가 전해지고 있어도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 먼저 주도적으로 작용되어야만 그분의 지혜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2-25)

 

곧바로 이어지는 바울의 부연설명을 보면 그런 뜻이 더 분명해집니다. 본문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은 그 민족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은 신을 찾아서 믿으려는 종교인을, 헬라인은 신보다 인간이 자기 지혜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비종교인을 총칭합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과 헬라인과 같은 두 가지 구원관만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선 유대인으로선 구세주가 십자가에 아무 말 없이 못 박혀 죽었다는 복음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믿었던 그들로선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님이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 믿어 신자가 되는 데 가장 큰 거리낌으로 작용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신이 있다면 착한 자에게 구원을 주어야 하거나 신이 없다면 인간들끼리 세상을 의롭게 가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이 이 땅에 까지 왔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은데다 인간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신이 행할 수 없는 아주 미련한 짓이라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믿는 신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구원의 방식은 당연히 하나님의 지혜이지만, 개인별로 그 도를 깨달아 믿게 만드는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최초로 택함을 받은 자도 자기 지혜로는 알 수 없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나 구원 얻었듯이 그 먼저 된 신자를 통해 전도를 받는 자도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만 그분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입술로 시인하려면?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롬10:8-10)

 

일부에선 이 말씀이 예정 구원을 부인하는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의 결단만으로 구원 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정론 논의를 시작하기 전이나 진행해 나가면서 특별히 강조한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살펴봐야 하지만 그 전에 성경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이 결과적으로 성경이 갖는 특성을 저해하게 되면 그 의견은 틀린 것이 됩니다.

 

지금 바울이라는 한 저자가 성경의 이곳에선 예정을 주장하고 다른 곳에서 예정을 부인하는 진술을 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는 동일한 책인 로마서의 본문에 앞선 구절에서 구원 예정을 이미 명확히 표명했는데(롬9:19-24) 뒤에서 그것을 부인할 리는 결코 없습니다.

 

현재의 정경성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성령이 역사하여 이뤄진 것이므로 성경이 틀렸을 수는 없고 그런 해석이 틀린 것입니다. 바울이 예정을 먼저 진술했다면 이어지는 모든 말씀도 예정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요컨대 전체문맥에서 해석해야지 한 구절만을 가지고 특정한 교리를 주창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학이 아니라 성경해석학, 아니 너무나 당연한 상식에 속한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말이란 마음과 별도로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안에 담겨있던 내용이 겉으로 표현되어 나오는 것이 말입니다. 상기 말씀도 마음에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 뜻을 바울이 이어지는 말씀에서 더 확실히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믿음이 먼저 있어야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기꺼이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만 거꾸로 예수님을 주라 부른다고 다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이 생기려면 당연히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전도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전도의 필요성, 절박성, 시급성을 강조하려는 뜻입니다. 자기 의지로 결단하면 구원을 준다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결정적으로 10절의 “네 마음에 믿으면”은 헬라 원문에서 수동태로 “믿어졌다면”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9-10장은 유대인의 구세주로 온 유대인 예수님을 오히려 유대인들이 배척하고 믿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바울이 변증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상기 본문도 그 주제와 연결하면 비록 지금은 예정에 의한 구원진리를 잘 모르는 유대인들이 완악하게 십자가 복음을 배척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전도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면하는 뜻입니다. 바울도 그런 간절한 심정에 따라 자신은 그리스도의 저주를 받더라도 동족들이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롬9:3)

 

바울은 대다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변증의 결론을 내립니다. 그 뜻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롬11:25)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주님을 배척할지라도 일시적인 현상이지 끝까지 그렇게 방치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신의 주권으로 구원 주실 자를 택했다고 해서 전도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심히 떨면서 행하는 전도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바울이 성령의 역사를 잘 모르는 이방인 교인들이 많은 고린도 교회에 신령한 것에 대해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두 번이나 거푸 부정함으로써 강력한 긍정이 됩니다. 제발 정확히 알아주기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로 강조하는 영적진리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고 입술로 시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먼저 역사한 후에 예수가 주라는 믿음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먼저 자기 판단과 의지로 주로 영접하고 입술로 시인한다고 해서 성령이 역사하여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전혀 예상치 않던 상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사흘간 실질적인 영적 죽음에 빠져 절망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성령이 먼저 역사해서 자기 눈을 뜨게 해주고 구원을 얻는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을 했습니다. 그로선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고 믿을 수도 시인할 수도 없다고 선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이자 진리였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말로 십자가의 도를 전하더라도 역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만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영적 시체의 상태에 있는 자연인에게 복음을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해봐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는 헬라인에게 미련한 것으로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비록 미련하게 인간의 말로 전도하긴 해도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전해지길 간절히 바랐다고 합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전해지는 내용도 사람의 지혜가 아니지만, 그것을 전해 듣고 믿게 되는 것도 사람의 지혜에 달렸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람이 담당할 수밖에 없지만 구원 자체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지혜로 믿을 수 있게 되면 또 다시 그렇게 지혜로운 자만 구원해주는 불공평한 하나님이 되고 또 그렇게 믿게 된 자도 자기 지혜를 의도했던 안 했던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란 바울이 말한 대로 정말로 미련한 구원의 방식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지혜이지만 사람들은 미련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그런 미련함을 당신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무너뜨리고 구원을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미련함을 그냥 둔 채로 인간의 미련한 말로써 복음이 전해지게 하더라도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인간이 미련함을 그대로 두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미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인간의 지혜와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그분만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그 자리에서 당장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어서 천국으로 바로 데려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또 다른 지혜는 복음이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끔, 계속 강조하지만 인간 지혜로 이해할 수 없어도 전도를 기뻐하시기에 택한 자에게 당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주실 것이니까, 인간의 미련한 말로 반드시 먼저 전해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할 때마다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전해지는 진리를 사람들이 쉽게 알아먹고 받아들이고 구원이 일어난다면 그렇게 두렵고 떨릴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우선 부족한 종이 하나님의 엄청난 일을 대행하고 있음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미련한 종이 미련한 지혜로 미련한 인간의 말을 통해서 한 사람의 생명이 오가는 구원으로의 초대를 감히 담당하고 있으니 성령의 역사가 따르길 간절히 소원했던 것입니다.

 

거기다 그 사람이 구원으로 예정되었는지 알지 못하니까 더 떨렸던 것입니다. 또 전할 때마다 혹시라도 먼저 믿은 자로써 자기 자랑이 나올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전함을 받는 자 쪽에서도 성령의 진정한 거듭남이 없이 인간적 지혜로 기독교 교리로만 동의하고서 입술로만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이유

 

전도를 통해 구원 주시길 기뻐한다는 말씀은 구원으로 택함 받은 자라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도 구원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도 내포합니다. 우선 전하는 자는 물론 전함을 받는 자 본인도 자기가 예정되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당장에 전해지는 복음에 온전히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들은 의미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것에 동의할 수 있는지 세밀하게 점검 판단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앞에서 설명한 대로 자기 지혜로는 십자가의 도를 믿을 수 없고 성령이 먼저 역사해야만 하는데 택한 자에게는 그런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도에 대해 열린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알아보고 싶은 소망도 생깁니다. 성령이 교회로 그 발걸음을 인도하고 믿음의 동료와 지도자를 붙여주십니다. 본인 스스로 믿으려고 노력하고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찾와와서 인격적으로 만나달라고 기도하면 그에게 가장 합당한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믿음의 결단을 하게끔 인도해주십니다.

 

이 모든 일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지정의로 정확히 인식은 못해도 성령이 신자의 영에 이미 역사함으로써 자신에게 진행되고 있는 구원으로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알고 싶다는 소원과 열정이 생긴 후로는 즉,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그렇게 인식한 후로는 자기 영의 변화에 적응해서 스스로 행하게 되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 반응이 성령으로 그에게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예정과 결코 상충될 리도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예정했다고 해서 인간은 무조건 군말 없이 믿어야만 한다거나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믿어진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에 부려 먹을 종으로 삼으려고 택했으니 신자에게 그런 소명의식이 확고히 생기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헌신하게 될 때까지 그분이 구원의 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선도적으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죽어가는 한 영혼을 전도의 미련함으로 살려내고 그렇게 살아난 사람들끼리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거룩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바울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고 인간의 지혜로는 이뤄지지 않기에 성령이 역사해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에게 성령이 평생토록 내주하여서 보호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써 끝까지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주님은 승천 직전에 제자들더러 성령이 오길 기다리라고 당부하면서 성령이 오면 복음의 증인으로 세워지는 권능이 임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실제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은 곧바로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고 그 후로는 순교하기까지 복음으로만 살면서 복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으로 예정한 것이 불공평하게 인간의 동의 없이 태어나기도 전에 특혜를 준 것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그 때까지, 세상 땅 끝과 세상 끝 날까지, 십자가 복음의 군사로써 미련하게 전도하라는 뜻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 중에 기독교만 유일하게 살아 있을 때에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까닭입니다. 

 

3/1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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