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간은 빼고 인간의 의지는 더해라.

 

예정을 지구적인 시간의 틀 안에서 이해하려들면 더 복잡해진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시간 개념을 살펴봄으로써 확인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영원한 현재만 있기에 인간의 구원과 심판도 그분의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뜻에 달렸습니다. 당신의 그 뜻 안에는 신자라는 한 인생 전체와 불신자라는 또 다른 한 인생 전체가 각각 자리 잡고 있을 뿐입니다. 한 인간의 일생이 어떻게 될지 다 본 후에 판단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미리 둘로 나눠버린다는 예정에 대한 불신자들의 비난과 신자들의 의심은 그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소치입니다.

 

따라서 예정론을 쉽게 이해하려면 인간 세계에 적용되는 시간 개념을 완전히 빼버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복잡한 신학적 논의에 함몰되거나 결론 없는 말꼬리 잡기 식의 끝없는 논쟁으로 변질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자들이 제대로 정리해 놓아야 할 예정과 연관된 몇몇 이론들이 있습니다.

 

예정이 타락 전이냐 후냐?

 

교리의 제목에서부터 시간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구원할 자와 심판할 자를 예정하여서 창조했다는 것이 타락전예정설입니다.(칼빈과 루터의 의견) 타락할 것을 아시고도 인간을 창조한 후에 타락한 죄인들 중에 구원할 자를 택했다는 것이 타락후예정설입니다.(어거스틴과 워필드의 의견) 이 둘은 다 성경적 근거에 따라 이중 예정을 지지하되 예정의 시점으로만 나뉘기에 사실상 깊이 따져볼 필요는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9:21-23)

 

타락전예정설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구원 받을 긍휼의 그릇과 심판 받을 진노의 그릇은 토기장이가 자기 뜻에 따라 미리 정한다고 비유했습니다. 인간을 만들기 전에 하나님이 둘로 미리 나눴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토기인 인간이 토기장이인 하나님에게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구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합니다.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렘18:3-4) 여호와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토기장이가 작업하는 모습을 통해 계시한 내용입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었지만 흡족하지 않아 깨트리고 그 흙으로 마음에 드는 다른 그릇을 만들 듯이, 하나님이 타락 후에 구원주실 자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앞뒤 문맥상의 뜻은 개인의 구원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는”(7절) 일은 그 민족의 죄악을 판단하는 당신에게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구약계시 특유의 이중성 때문에 개인구원에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타락후예정설은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선별적인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최초 인간의 타락은 창조 시와 시간적 간격이 크지 않습니다. 또 아담과 이브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이미 타락한 후에 태어났기에 타락 전과 후로 나눠서 구원예정을 살펴보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어쨌든 예정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시간과 무관하신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는 구원예정에 시간개념을 대입하면 불필요한 신학적 논의만 낳게 된다는 사실만 인식하면 됩니다.

 

예지예정이냐 예정예지냐?

 

정작 논의해야할 과제는 예지예정과 예정예지 중에 어느 쪽이 성경적인지입니다. 칼빈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과 신비에 따라 구원 받을 자와 심판 받을 자로 작정했다는 이중예정론을 주장합니다. 미리 예정했기에 미리 알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예정예지(豫定豫知)라고 부릅니다.

 

칼빈의 이중예정에 반대하여 웨슬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인간이 자기 의지로 선택하여 구원에 협력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놓으셨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로 구원의 선택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복음을 받아들일 자와 아닌 자를 미리 아셨을 뿐이고, 그것이 성경이 진술하는 예정이라고 해서 예지예정(豫知豫定)이라고 칭합니다.

 

예지예정의 성경적 근거로는 이 말씀을 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그러나 이 말씀은 구원의 구체적인 과정, 특별히 “예정과 예지의 전후관계”를 설명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오직 “은혜로만 구원하시는 목적”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여서, 많은 형제(많은 불신자)들 중에 맏아들이(먼저 믿은 자) 되게 하고, 또 영화롭게 하기 위해 구원으로 미리 정했다는 것입니다. “미리 아신 자”가 바로 “미리 정하신 자”이고 또 “영화롭게 하실 자”입니다.

 

바로 앞 28절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전체 문맥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즉, 예정에 의해 이미 구원 받은 자들에 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부르심을 입은 신자라도 믿음이 연약하고 여러 고난으로 인해 때로 넘어질지라도 성령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여 선으로 이끌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어지는 예의 29,30절도 당연히 성화에 관한 설명이지 예지예정과 예정예지로 나눠서 논의해야 할 칭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아무 공로 없이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았지만,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성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맏아들이 되어서 영화롭게 되는 것이 칭의 구원의 목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예지와 예정을 나누고 예지가 먼저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어떤 일을 미리 안다는 것은 그 일이 반드시 그렇게만 즉, 정해진 어떤 코스로만 진행되어져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아주 쉽게 비유해보겠습니다.

 

임신한지 십 개월 만에 아이가 태어나서 언제 쯤 기고 언제 쯤 일어서서 걷는다는 것은 모든 아이에게 미리 정해져 있는 하나님이 부여한 생물학적인 법칙입니다. 그러니까 미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이들마다 기고 걷는 시기를 자기가 선택한다면 아무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정이 예지보다 먼저라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고도 사실상 논증이 필요 없는 자명(自明)한 이치입니다. 인간의 선택에 따라 구원이 이뤄진다는 예지예정은 하나님이 절대로 독선적이어선 안 된다고 인간이 그분의 입장을 고려해주려는 동기는 가상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구태여 할 필요가 없고 또 잘못된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그분의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주권과 섭리에 대한 인식이 없거나 크게 부족한 탓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선해야만 한다는 전제에 묶여서 인간적 시간개념의 틀에서 어떻게든 예정을 변증해보려고 무리하게 시도했지만 전혀 비논리적인 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자 고 로레인 뵈트너 박사는 예정과 예지의 관계에 대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으면 예지되기가 어렵다는 것은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래서 “예지와 예정을 혼동해선 안 된다. 예지는 예정을 전제로 하지만 예지 그 자체가 예정은 아니다. 자유행동자인 인간의 행동은 그것이 예지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예정되어 확실히 일어날 것이므로 예지되는 것이다.”라고 부연해서 설명했습니다. - 칼빈주의 예정론(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도서출판 베다니 번역 1996년 출간, 김남식 번역, page 63 & 68)

 

브뢰너는 같은 책에서 스트롱의 의견도 인용해 놓았습니다. “논리적으로(시간적으로가 아니라) 결정은 예지 전에 있는 것이다. 내가 ‘나는 내가 할 바를 안다’고 말할 경우 내가 벌써 무엇을 하기로 결의하였다는 것 또한 내 지식이 결의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결의에 수종하고 거기에 근거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스트롱 박사의 Systematic Theology) 한마디로 예지할 수 있어서 예정되었다는 주장은 고려할 필요가 없는 궤변일 뿐입니다.

 

숙명론 결정론 예정론

 

문제는 시간의 물리적 흐름과 그 파생적 결과가 인간의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그분의 결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원리는 인정해도, 결과적으로 인간의 입장에선 어쨌든 미리부터 둘로 나눠진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 개념을 빼고 예정을 말해도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나기 전부터 정해져버렸다면 숙명론(운명론)이나 결정론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생관과 세계관은 그것들과 전혀 다릅니다.

 

숙명론(宿命論 fatalism)은 간단히 말해 인간의 일생이 이미 다 정해져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 변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사가 단순히 운(運, luck or chance)에 따른다는 운명론과 세부적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사가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에선 동일합니다. 그러면 또 인간의 자신이 행한 어떤 일에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모든 것을 알라 신의 뜻이라고만 받아들이는 이슬람이 그렇습니다. 자신이 차를 정비하는데 소홀히 해서 고장이 나도 알라의 뜻이라고 믿고 심한 경우는 고치지도 않습니다.

 

숙명론에선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과 심판에 개입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이미 정해진 코스에 따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사와 아무 관계없이 강요된 일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 결과를 두고 하나님이 구원과 심판으로 나눌 수 없고 그럼 그만한 독선도 없습니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사탄에게 속아 죄를 범하고 타락했어도 인간의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성경 인물들의 구원과정을 통해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대로 두고도 당신의 예정을 한 치의 차질 없이 실현시키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그분이 자유의지를 가지신 인격적인 분이므로 당신의 전인격을 걸고 구원을 주시고 구원 후도 인격적으로 이끄십니다.

 

결정론(決定論 determinism)은 결과적으로 따져 인생의 길이 미리 정해졌다는 면에선 숙명론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합리적인 인과관계가 없이 무작위적 무의미적으로 정해지는 숙명론과는 다릅니다. 인간 세상에는 사전에 어떤 운행 법칙이 설정되어 있고 그에 따라서 인생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뉴턴의 만유인력법칙 발견 이후에 물리학과 천체역학이 발전됨에 따라 과학에 기반을 둔 세계관인 셈입니다.

 

대표적으로 18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라플라스가 “우주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안다면 우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우주에 장치된 운행법칙을 완전히 파악한다면 그의 말은 진리일 것이며 기독교 예정론은 물론 성경도 하나님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양자역학에서 불규칙적인, 바꿔 말해 예측불가능한 입자의 움직임을 발견함으로써 결정론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지정의를 갖추신 인격체입니다. 전지성과 전능성은 물론 당신만의 거룩하신 뜻대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당신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서 홀로 전 우주를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통치하고 계십니다. 당신과 원수 되어서 극렬히 거역하는 죄인인 바울에게까지 성령이 역사하여 회개토록 하고 당신의 열렬한 옹호자로 세우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인생이 어쩔 수 없는 강제적인 법칙이나 힘에 이끌려간 것이 아님을 이미 확인했으며 예수를 믿은 우리 모두의 인생 또한 그렇습니다.

 

숙명론이나 결정론은 둘 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이 만들어졌다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을 단 한명도 똑같지 않게 만드시고 또 각자에게 각기 다른 성격 기질 재능 은사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각자의 자유의사에 따라 그것들을 활용하고 자기만의 시간표에 따라 얼마든지 자기 인생을 끌어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승천 후에 당신과 같은 보혜사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령님은 한 죄인에게 간섭하셔서 신자 인간의 믿음의 선택 결단과 하나님의 구원 예정이 전혀 상충되지 않게 합니다. 구원 후에도 신자의 일생동안 성령님이 내주하여 신자의 인생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상충되지 않게 보호 인도하십니다. 이처럼 인격적인 하나님이 당신을 거역해 죽어 마땅한 죄인들도 인격적으로 일대일로 구원 사랑해주신다는 점에서 기독교 예정은 숙명론이나 결정론과 전혀 다릅니다.

 

요컨대 예정론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용어의 뜻에 묶이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시간 개념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광대하신 의지와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그럼 또 믿기 전이든 후에든 아무 장애나 강제 없이 인간의 뜻에 따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작동할 수 있음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정에 인간의 시간 개념이 조금이라도 가미되면 구원을 그분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 안에 제한시키다 못해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인간이 주관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지예정이자, 구원은 인간과 하나님이 협력해야만 한다는 알미니안주의입니다. 인간은 구원에 협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신 은혜에 반응만, 그것도 성령의 간섭에 따라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10/1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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