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치신 예정론 (2)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1-13)

 

복음서에서 죄인이라고 말할 때는 주로 하나님께 선택을 받지 못해 율법이 없고 할례 하지 않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아예 여호와께 낙인 찍혀 구원 밖에 있는 족속이라는 뜻입니다. 유대교에선 이방인과는 식사교제도 해선 안 된다고 엄격히 금지시켰습니다.

 

세리는 알다시피 유대인 중에서 로마제국을 대신하여 세금을 거두는 관리로 로마가 지명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율을 자기 임의로 부과하는 등 부정한 방식으로 부를 쌓았고 로마 권력을 등에 업고 동족들에게 많은 잘못도 저질렀습니다. 유대인들로선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일 뿐 아니라 택한 백성을 대적하는 사탄의 종이었기에 마찬가지로 상종도 않았습니다.

 

세리와 죄인은 한마디로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자들의 대표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도 포기한 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지금 유대인 랍비인 예수가 왜 그런 자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즉, 금지된 식사교제 규정을 어기느냐고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당신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사회에서 천대 멸시 받는 자들을 더 따듯하게 사랑해주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구원과 연결시켰으니 그 의미를 정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죄인’은 당연히 유대인 세리와 이방인 죄인 둘 다를 포함합니다. 이방인들은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과 그 종교관과 구원관이 다릅니다. 아예 무신론자이거나 우상 신들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는 물론이고 당신의 십자가 구원을 믿을 생각도 없고 아예 알지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세리로 대변되는 유대인들은 유대 사회에서 인간들이 고안해낸 종교적 유전 관습 전통에 따라 심판으로 완전히 정죄한 자들입니다. 세리 외에도 창녀 불구자 문둥병자 귀신 들린 자 등의 경우도 동족끼리임에도 교제는커녕 근처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들로선 평생에 유대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가망성이 전혀 없습니다. 요컨대 여호와의 총회에서 배척된 자들입니다.

 

반면에 의인은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죄인과 세리 등과는 식사교제도 않고 그들을 유대 사회에서 추방해버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종교관 구원관이 구약성경과도 완전히 상치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나아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함을 이미 받았기에 구원에 의심을 전혀 하지 않으니까 사실상 예수님이 구원해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실은 자신들의 타락한 인간 이성에 따른 신념 고집 교만 죄악으로 스스로 참 구원의 밖으로 뛰쳐나간 것입니다. 이들의 경우만 봐도 예정 구원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결코 상충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부르러 오신 죄인은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과 동족으로부터 소외 추방된 유대인들입니다. 이방인은 당연히 그렇지만 유대인들도 유대교의 종교적 기준으로는 구원을 도무지 얻을 수 없는 구조적 태생적인 죄인입니다. 그들 스스로도 그럴 수 있다는 꿈을 벌써 포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자기들을 내쳤는지 너무 궁금하고 그에 대한 막연한 원망과 불평이 있었겠지만 현실적으로 아무 방도가 없습니다. 이런 엉터리 같은 세상이 멸망하고 자기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타인과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누릴 수 있는 다른 세상에 대한 소망은 가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육신이 죽어서 이 땅을 하직하는 길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죄인을 부르러 즉, 구원을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자에게 주님이 선도적으로 구원을 베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실제로 주님은 수가 성의 여인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런 자들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의인과 죄인의 두 종류로 나눠서 죄인을 구원 대상으로 선택했습니다. 비록 광범위한 범위이긴 해도 구원은 당신께서 택한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원리임에 분명합니다.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3-17)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뜻은 그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 선결 과제입니다. 그런데 구세주로 영접하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인간 위인 내지 선각자가 아니라, 죄로 타락해 사탄과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류를 구원하러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독생자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상 숭배가 만연한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먼저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 물었는데 제자들이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일반 유대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인간 선각자라고만 여기지 독생자 하나님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다시 물었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별칭입니다. 그는 스승이 인류를 구원하러 온 성자 하나님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를 온전하게 믿은 최초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선언합니다. 그 믿음의 고백을 네 지정의에 따라서 네 자의로 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말이 베드로에게서 나왔을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그런 믿음을 심어주었고 입술로 고백하게끔 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의 심령에 성령이 간섭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의 지정의로 그 심경의 변화를 인지하고 입술로 고백한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알게 해주신 이후입니다. 바꿔 말해 베드로 자신의 탐구 분별 판단에 따른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식의 대화를 유도하고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반응부터 먼저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았고 사역과 기적을 한두 번 목격했을 뿐입니다. 바로 곁에서 배우고 동참한 제자들의 당신에 대한 인식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달라야 하지 않느냐는 뜻으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럼 그 때부터도 성령이 베드로의 자의식에 영향을 미치며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사도도 동일한 원리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구원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은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앞 구절에서 자기 땅에 왔어도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선민의식이 있는 유대인들이라고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며, 이방인들도 스스로의 의지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하나님이 구원을 주기로 택한 자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하고 있는 예정 구원 교리를 사도들이 분명히 인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다 할 수 있느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3-26)

 

부자 청년이 와서 예수님에게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답해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주 힘들다고 가르쳤습니다.

 

제자들로선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었고 주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하신다고 답해주었습니다. 그 일차적인 뜻은 부자들을 천국으로 들이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부자들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줄 마음을 먹게 하고 또 그대로 시행케 만드는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 구원을 얻는 길에 대해서 답변하는 중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이 누구에게 구원을 줄 것인지 결정하는 일에서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주관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의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들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몹시 놀랐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가기 힘들고 가난한 자는 가기 쉽다는 뜻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외적인 조건을 보고 구원해주지 않습니다. 그 청년은 율법을 온전히 잘 지킨 자였습니다.(마:1918-19) 제자들도 그 점은 인정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둘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하신 뜻을 그렇게 선행을 많이 했는데도 천국을 가지 못한다거나, 아니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아야만 천국을 갈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에선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눅18:22)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눅18:28, 마19:27)이라고 물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두 번째 이유인 자기 소유를 다 팔아야만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여기고 놀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구제에 최대한의 열심을 내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 하나님이 선도적으로 주시는 구원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지로 따르기로 결단했기에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영광(마19:28).을 취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주님이 그 부자 청년에게 던진 말씀은 하나님과 재물 둘 중에 하나를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라는 뜻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했기에 구제에도 사실은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가 주님에게 무엇을 해야 선행을 얻을지 물은 까닭은 율법대로 다 행했으나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선행을 최대한 했지만 마음의 평강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그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실 때에 온전한 평강이 임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준 것입니다. 바꿔 말해 재물이 전부 다 없어져도 정말로 하나님만 섬기겠느냐는 질문이었는데 막상 재물을 다 팔아버릴 자신이 도무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전히 돈이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는 구원을 얻지 못한 채 돌아간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재물을 고향에 남겨둔 것이지 다 판 것은 아닙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든데 그가 가난했다면 구태여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 집은 가버나움에서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기거하는 사역의 본거지로 활용될 정도로 컸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설명을 듣는 순간 예의 그 성급한 성격이 발동되어서 자기들은 재물을 다 버려두고 왔으므로 주님으로부터 구원이 확실하다는 언질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사실상 부자 청년에게 했던 것과 동일한 답을 주었습니다. 구원의 길이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이젠 재물이 아니라 가족과 전토를 버린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재물은 물론 가족이 없어져도 주님만 주인으로 모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구원은 당연히 사람으로 할 수 없으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이 인간의 의지보다 선행되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예정론을 제자들에게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2/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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