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치신 예정론 (3)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1-3)

 

예수님이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를 고쳐주었습니다. 맹인이 주님께 고침을 받으려고 먼저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하늘의 권능으로 불구자를 고친다고 소문난 랍비 예수인 줄 맹인이 알아챈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를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맹인이 불쌍해서 고쳐준 것도 아닙니다. 이어지는 제자들과의 대화와 치유 후에 전개된 모든 상황을 살펴보면 주님이 의도적으로 그 맹인을 지목해서 쳐다보고 고쳐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그를 미리 택하여서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스승이 그 맹인을 지목해서 쳐다보는 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불현듯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인간의 질병 불행 재앙 등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당시의 종교적 인식에 따라서 이 맹인의 경우는 대체 누구의 죄 때문인지 주님께 물었습니다. 나면서 맹인이라면 항상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만하므로 사실상 남을 해하는 죄를 지을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해서 주님은 누구의 죄도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답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직접 고쳐주었습니다. 그럼 나면서 맹인인 자를 고쳐주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되며, 그 일을 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결국 당신의 당신 되심을 드러내려고 의도적으로 그를 고쳐준 것입니다.

 

마침 이 날이 안식일이었기에(14절)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제자들은 소경에게 죄가 있는지 스승에게 질문했으나 나중에는 엉뚱하게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율법을 어긴 죄인이라고 매도합니다. 반면에 그 소경은 자기를 고쳐준 예수님이 바로 인자로 오신 하나님임을 깨달아 믿게 되는 것으로 이 사건은 결말이 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38-41)

 

소경이었던 자에게 주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려고 이 땅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육신적 맹인이 자기 죄 때문에 심판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보다는 영적인 맹인을, 그것도 맹인인데도 맹인이 아니며 누구보다 영적으로 잘 본다고 자랑하는 바리새인 같은 자를 심판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나아가 육신적 맹인이든 영적 맹인이든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맹인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주님은 제자들과 그 소경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맹인 되었던 자로선 스스로 주님을 믿을 의도와 계획은 전혀 없었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이 지목해서 일방적으로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예정에 의한 구원이 옳음을 누구나 알 수 있게끔 주님이 직접 능동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단지 예정구원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차원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정으로 구원을 주시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나기 전부터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는 것만이 예정이 하는 역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정으로 구원 받은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세상 앞에 나타내어야만 예정으로 구원 받은 목적이 달성된다는 뜻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2,3 & 14)

 

예수님이 천국에 관해서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의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천국은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고, 잔치를 베푼 임금은 구원을 주관하는 성부 하나님을 또 왕의 아들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예수님과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순전한 신부가 되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비유에 따르면 2-13절까지 왕은 사환과 종을 다 동원하여 누구에게나 혼인잔치에 오라고 초청했습니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9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아니 모든 인간이 다 구원 받기를 소원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목할 사항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청함에 응한” 자가 적다고 말하지 않고 “택함을 받은 자”(chosen one)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분별 판단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 즉, 예정에 따라서 구원이 이뤄진다는 점을 주님이 분명히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초대했어도 그에 응하여 구원받는 자는 항상 소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로 외면 거절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안락과 재미에 푹 빠져서 하나님 그분을 외면했습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잔치에 청했음에도 사람들은 자기 의사에 따라 불참하려고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으로 구원과 심판이 결정되어도 인간의 자유의지와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는 점도 주님은 이 비유에서 분명히 밝혔습니다.

 

나아가 연회장까지 왔어도 혼인예식에 합당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다시 쫓겨나갔습니다.(11-13절) 혼인 잔치를 진정으로 축복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먹고 마시려고만 온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진정으로 거듭난 자가 아니라 단순히 현실적 문제를 해결 받으려는 기복주의 가짜 신자들을 말합니다. 그들 또한 스스로 교회에 출석 혹은 주님을 따르려고 결심 시행했으나 하나님의 심판 예정과 상충되는 점이 없습니다.

 

지금껏 예정론에 대해 설명해온 바를 주님은 이 비유 하나로 정확하고도 간단하게 다 확인해준 셈입니다. 무엇보다 명시적으로 “택함 받은 자”가 구원 받는다고 선포했습니다.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지막 날 당신께서 재림하실 때에도 택한 자를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2;21,22,24,30,31)

 

성령의 간섭이 믿음의 결단보다 먼저다.

 

예수님이 예정에 대해 가르친 대표적인 몇 가지 경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정’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택함’이라는 용어까지 당신께서 사용했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이 예정을 직접적으로도 가르쳤음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그럼 엄밀히 말해 예정론에 대한 시시비비는 아예 할 필요도 이유도 없고 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택한 자만 구원 준다고 선언했는데 더 이상 무슨 논의가 필요합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정을 하나님이 인간 운명을 미리 심판으로 결정했다는 측면으로 아주 좁혀서 접근합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하나님 쪽에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줄 것을 먼저 결정하시고 일방적 선도적 주도적으로 베푸셨다는 것이 예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은 반드시 먼저 성령으로 거듭나야 갈 수 있다고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성령은 인간이 예수를 믿기로 먼저 결단해야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먼저 임해야 그 영혼을 거듭나게 해서 예수를 믿으려는 결단을 할 수 있게끔 이끕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올 때에 이미 주님을 믿어보려는 소망과 결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구원받았거나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으려고 찾아왔으나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도 모르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성령이 임하도록 아직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서 구원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온전한 결단까지는 내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구원 받기 전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골고다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19:39)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 예수님의 장례를 도왔다고 단순히 이해해선 안 됩니다. 부패하지 않게 하려고 몰약과 침향을 시신에 바르는 것은 당시에는 여자나 노예들이 하는 아주 천한 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인 그는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율법의 정결 규정에도 어긋나기에 꿈도 꾸지 못하는 일입니다. 나아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직후인지라 유대관원인 그가 주님을 위하면 유대사회에서의 지위 신분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배운 적도 없습니다. 지금 오순절 성령 강림 전이라 제자들도 구원의 진리에 대해서 지혜의 영인 성령의 깨우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힌 바로 그 날 밤이라 주님은 아직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숨어 있었기에 니고데모와 만날 기회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신을 자기 손으로 깨끗케 보존하려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특별히 그동안의 모든 종교적 지식과 체험과 믿음에 따르면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이 바로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임을 깨우쳐주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거기다 모든 세상의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는 권능도 덧입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먼저 임한 후에 그는 예수를 믿을 수 있었는데, 한마디로 그도 예정으로 구원 받았던 것입니다.

 

깨끗함을 입은 자는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12:4-7 & 11)

 

바울이 각 성도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모습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성령은 같고, 주는 같으며,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합니다. 삼위 하나님은 그 성품과 속성과 권능 등 모든 면에서 동일하기에 은사를 나눠주고 역사하게 만드는 뜻과 방식에서도 다른 점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동일하신 하나님들끼리 서로 다르면 도리어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의 성도들이 맡을 직분과 은사들이 각기 달라도 한 분 성령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눠준다고 했습니다. 신자가 어떤 직분과 그에 합당한 은사를 받고 싶다고 소원 결정 노력한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과 계획에 따라 특정 성도를 택하고 그에 합당한 특정 은사를 주어서 활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동일한 방식임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령이 외적 은사만 “당신의 뜻대로 행하여 각 사람에게 나눠주고”,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구원은 죄로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들에게 맡겨두거나 인간들과 협력해서 준다는 것은 아예 말이 안 됩니다. 성령은 당연히 먼저 역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이 주권적으로 택한 자에게만 거듭남의 간섭이 임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당시로선 가장 온유하고 합리적이며 예수님에게도 가장 마음이 열렸고 정말로 배워서 알게 되면 믿을 생각도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주님의 말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가 성령의 간섭을 받고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유대교와 그 권력자들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으로 말해 자기 결단으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지 못한다는 가장 확실한 표본이었습니다. 이를 또 역으로 말하면 그의 믿음 또한 성령이 심어준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니고데모는 예정 구원의 진리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려고 택함 받은 자였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구약인물 중에도 그런 자가 있었다고 예수님이 직접 선언했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4:27)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어도 택함 받지 못했고 오직 수리아의 나아만만 구원으로 택함 받았다고 합니다.

 

나아만이 누구입니까? 이방의 군대 장관으로 이스라엘의 대적 중의 대적이었습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할 일입니다. “구약 인물의 구원”에서 살펴본 대로 오직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택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야말로 예정에 의한 구원이 옳다고 입증하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구원의 방도가 다를 리 없는데다 구약에서 이미 예정구원이었다면 신약시대에는 더욱 그래야 하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2/1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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