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예정과 인간의지가 상충되지 않는 과학적 근거

 

교리보다는 개인적인 신앙고백

 

예정론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사실을 성경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첫째 성경의 인물들 모두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구원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예정했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묶어 놓고 강제로 구원한 것도 아님을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은 각자 자의에 따라 자유롭게 행하게 두고도 당신만의 절대적이고 완벽한 섭리로 신자 본인은 사전에 구체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구원 체험도 예정에 따른 것이었는지 아닌지 회상해 보았습니다. 감히 성경의 인물과 비교하려는 뜻이 아니라 성경에서 확인한 두 가지 진리가 실제로 저에게도 적용되었는지 살피려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이 입증하는 예정 진리를 그대로 체험한 신자라면 사실상 예정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뜻입니다.

 

예정을 아주 쉽고도 간단하게 풀이하면 “주님이 먼저 한 죄인을 찾아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령 안에서 주님과 그런 영적 대면의 체험을 한 신자는 필연적으로 또 자연스럽게 주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평생을 두고 따라가기로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해서 결단하게 됩니다. 인간 쪽에서 믿으려는 결심과 실천은 구원 이후에 일어나는 자연스런 반응일 뿐 구원을 이루는 전제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라면 구원론을 교리적으로 정립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구원체험을 정말로 진지하고도 세밀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대체로 삶이 불안하고 인생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차에 전도를 받아서 교회 출석하기로 결심합니다. 또 교회에서 열심히 설교 듣고 성경 공부하여서 스스로 믿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찾아와서 만나주었다는 간증들을 들으면 나와 상관없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 같을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을 하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구원으로 택했다고 하니까 고맙긴 하지만 잘 이해도 안 되고 당황됩니다. 주변에 자기보다 더 선하게 사는 자, 특별히 믿지 않는 가족들이 처음부터 지옥 심판을 받기로 결정되었을 수 있다고 하니 너무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하나님처럼 여겨집니다.

 

구원은 오직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뤄집니다. 주변 사람의 구원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구원부터 성경과 합치하는지 반드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려고 결단하기 전에 하나님 쪽에서 자신의 심령을 노크하려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간섭 인도한 적이 없었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중에 믿음의 결단이 따랐다 쳐도 정말로 엄밀하게 교회에 출석하게 된 모든 경과를 되짚어보면 하나님이 나를 먼저 찾아와 은혜를 주셨고 그 전에 여러 모양으로 간섭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려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가 될 수 있게끔 그분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인생을 다듬어서 준비시켰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스스로 나야말로 천하 죄인의 괴수라고 눈물로 통회 회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예정론은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의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도리어 모두가 흔쾌히 동의 수용하지 않는 특이한 교리입니다. 예수님과 일대일의 인격적 대면이 없었던 자는 아무리 설명해도 예정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2-14)

 

성령의 조명으로만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해주신 의미를 분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육에 속한 사람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미련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교리나 신학으로 아무리 설득력 있게 가르친다고 해서, 당연히 저의 이 변증도 포함해서, 그 은혜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정은 인간의 입장에서 이 땅에서 통하는 인간적인 지혜로만 접근해선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당대 최고의 지성인 종교가 의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선언했으나 정작 그는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반면에 어떤 범인이라도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실체를 발견하고 자기 전부를 주님의 긍휼 앞에 내어드린 체험적인 은혜를 받은 자는 주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요셉이나 바울의 구원 여정이 자신의 구원체험과 동일함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신자에겐 이미 겪었던 일이라 구태여 교리적 신학적 설명도 사실상 필요 없습니다. 예정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을 더욱 보장해주는 역할로 그칩니다. 그래서 예정론은 교리라기보다는 예정을 실제로 겪어서 절감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체험적인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

 

십자가 복음을 말로 설명한다고 불신자로 믿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정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으며 섣불리 설득시키려 했다간 오히려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반작용만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정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접근해가면 지금껏 잘못 알고 있던 요소들이 제거되고 본 시리즈 제목처럼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여지는 생깁니다.

 

예정에서 가장 먼저 또 크게 문제되는 점은 하나님이 왜 인간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미리 결정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미리’라는 용어는 어디까지나 인간에게만 해당되지 그분에겐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정론 자체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미리 결정했다는 이론인데 예정을 논하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느냐고 여겨지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살펴보면 무슨 뜻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구와 태양 간의 거리는 약 9300만 마일이고 빛의 속도는 약 18만6천마일/1초입니다. 그 엄청난 거리 때문에 태양 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8분이 조금 넘게 걸립니다. 인간의 육안으로 보는 태양은 항상 8분 전의 태양입니다. 태양의 실제 위치는 동쪽 바다 위에 상당히 떠올랐는데도 한참 후에 볼 수 있고, 또 서쪽 바다에 이미 졌는데도 계속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한쪽 발은 태양에, 다른 발은 지구에 둘만큼 엄청난 거인이 있다고 가정하면 태양 빛을 8분 늦게 보는 인간과는 달리 한눈에 동시에 볼 수 있다고 필립 얀시의 어떤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얀시는 하나님은 이 거인과도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이 큰 존재라는 뜻으로 비유했지만 과학적으로도 분명히 옳은 진술입니다. 그분은 우주의 중심에서, 아니 우주라는 범주 밖 혹은 위에서 우주 전체를 동시에 다 관망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그 모두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일 년 열두 달, 한 달 30여일, 하루 24시로 구분되는 시간은 지구와 달과 태양의 자전 공전 역학에서 생성됩니다. 하나님이 그 셋을 창조하셨기에 시간과 공간도 그분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 피조물의 외부에 계시면서 모든 시간과 공간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그분은 얀시가 비유한 거인처럼 우주의 모든 것을 동시에 다 보고 계실 뿐 아니라 그 전부를 동시에 관리하십니다.

 

하나님에겐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현재 인류가 갖고 있는 시간 개념은 오직 지구상에서 한시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만 유효합니다. (다른 행성에선 지구와는 다른 그 행성 특유의 시간 단위가 생깁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유의지로 자기 일생에 대한 시간표를 짜고 그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이나 인류 전체로나 과거 현재 미래의 궤적이 반드시 발생합니다.

 

반면에 하나님 그분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태초부터 영원까지”라는 개념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며 그분은 항상 영원 안에서 영원하신 분일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어폐가 있지만, 당신의 일생에 대한 시간표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당신의 뜻만 있을 뿐이며 당신께서 그 뜻을 이루려고 마음먹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해서 인간이 사는 물질계 안에 그대로 정확히 이뤄지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더러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라고 가장 먼저 기도하라고 가르친 까닭입니다. 그 분의 뜻이 언제 어떻게 이뤄질지 따져보는 것은 시공간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의 필연적 과제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에게 따지거나 물을 질문이 아닙니다.

 

천국의 시간 (1) - 재림의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하나님의 시간 개념을, 엄밀히 말해 그분에겐 시간이 없기에 틀린 말이지만, 설명하는 말씀이 성경에 두 군데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예수님이 재림하겠다는 약속을 주시면서 깨어서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는데도 베드로가 이 서신을 기록할 시점 즉, 주님이 승천하신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 불만 의심이 늘어나고 심지어 재림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이단적인 가르침마저 생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재림의 지연에 대해서 변증하면서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인간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어떤 역사가 급히 하루 만에 일어났으면 바랄지라도 천 년처럼 더디게 이뤄질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천년이나 후에 일어날 것 같은 일도 하루 만에 성취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물리적 시간의 길이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선 아예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긴 하나 여전히 인간적인 관점이 일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아예 무관한데도 인간의 시간 개념에 빗대어서 그분의 역사는 인간이 소원하는 시기와 다르게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도 같이 시간에 대한 정밀한 지식이 없었던 때라 인간 독자의 이해 수준에 맞추려니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하루는 지구가 한 번 자전하는 기간이요, 천 년은 지구가 해를 천 번 공전하는 기간으로 오직 오직 지구에서만 적용될 뿐입니다. 그분에게는 우리처럼 하루 혹은 천 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는 하늘 보좌는 지구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물리적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은 아예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는 하나님의 일정표에, 정확히 말해 그분에겐 일정표가 없기에 그분의 뜻에 달렸을 뿐입니다. 인간이 인식하는 물리적 시간으로는 결코 추측조차 할 수 없습니다. 독생자 예수님도 지구상에 와있는 인자의 입장에서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고 말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좌정하여 우주를 통치하시는 천국 보좌에는 시간은 없고 오직 그분의 뜻과 그것을 실행할 의지만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에도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을”(창1:3)뿐입니다. 육일 간의 창조 일정표도 실은 지구의 시공간에 구속받는 인간의 지식수준에 맞추어 기록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구원계획도 태초부터 삼위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시기”(요1:18) 위해서 그 실행만 남겨둔 채 말입니다.

 

그러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 때가 찼다는 것은 바울이 인간의 입장에서 진술한 것입니다.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창3:15)이 수천-수만 년이라는 지구상의 시간이 흘러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겐 베드로의 비유를 빌리자면 단지 하루 같을 뿐이었고, 정확히 말해선 영원한 현재 안에 계신 그분의 단순히 한 순간의 실행이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재림도 태초부터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고 이제 그 실행만 남았습니다. 지구 시간으로 언제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이르시되 구원의 완성이 있으라.”고 말씀만 하시면 주님은 큰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본 주제와 관련해선 구원으로 택함 받은 모든 신자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천국의 시간(2) - 영생(永生 everlasting life)과 영원(永遠 eternity)

 

하나님의 두 번째 시간 개념은 요한 사도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천국에 관한 계시에 나옵니다. 베드로처럼 직접적인 설명은 아니지만 앞뒤 내용에 따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천국 상황을 묘사한 것이니까 구원 받은 신자가 죽은 이후부터 적용되는 시간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1-14)

 

비록 묵시를 통해 받은 상징적인 말씀이긴 해도 천국에 관한 묘사라곤 천사들과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오직 천국 보좌를 향해 세세토록 찬양 경배하는 장면뿐입니다. 지구 식으로 이야기 하면 날이 새나 날이 지나 시간 흐르는 줄 전혀 모른 채 오직 하나님과의 순전하고도 아름다운 교제만 있는 곳입니다.

 

율법에 따라서 형수와 결혼한 일곱 형제들이 천국에서 관계가 이상해질 것이므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 지구상의 생활 방식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하고도 신령한 천사들처럼 변모되어서 세세토록 하나님을 섬기며 함께 왕 노릇하고 있기에 아예 시공간의 개념이 없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도 영생에 대한 정의(定意)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영생(永生)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NIV) 영생을 예수님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아는 것, 요컨대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해야만 구원을 얻어 천국을 가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주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NIV)

 

그런데 영생으로 번역된 영어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everlasting)는 의미보다 영원(eternal)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흠정역(KJV) 영어역본은 3;16의 영생을 ‘everlasting life’라고 번역했습니다만 헬라 원어로는 모두 동일합니다. 그 헬라원어의 뜻은 “시작과 끝이 없는, 항상 존재하는, 멈추지 않는” 등의 의미입니다. 시간이 무한대로 지속된다는 것보다는 멸절되지 않는다는 데에 방점이 찍히는 의미입니다.

 

흔히 예수 믿어 가는 천국을 더 이상 죽음은 물론 질병도 없고 불행 슬픔 상처 고통 등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유토피아로 상상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못 누렸던 풍요와 안락과 즐거움을 죽음 이후 “끝없이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물론 예수님도 이 땅과 생활은 물론 실존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곳에서 하나님처럼 시간과 관계없이 온전한 사랑의 교제만 하나님과 나누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예정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라.

 

지금껏 하늘의 시간에 대해 살펴본 대로 천국에 대한 개념도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즉, 그분이 어떤 분인지 또 그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고 그 은혜 앞에 자기 전부를 바치며 항복한 순간 이미 영생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안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 완성은 물론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을 거쳐서 지구 시간으로 언젠가 신령한 육신까지 덧입게 되는 부활 승리 때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의 실체적 모습과 마지막 날의 부활승리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국과 종말에 대한 시간개념만은 정확하게 가져야 합니다. 바꿔 말해 예정론에 대한 근본 패러다임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인간의 입장에서 지구상에서 인식하는 인간적인 시간 개념으로 예정론을 따지고 이해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아가 어떤 나쁜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미리 절대적으로 구원과 심판으로 예정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을 의미가 없다는 식의 반발은 그분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미리 구원으로 예정해 놓았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 범위 안에서 인간 신학자가 인간의 언어로 인간에게 말할 때만 해당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에겐 처음과 끝이 없고 모든 것이 영원한 현재입니다. 그분에겐 완전하고 영원한 뜻과 그 실행만 있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에게 천지 창조와 예수 십자가에 관한 완벽한 뜻이 있었고 “빛이 있으라, 나사렛 구유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라”는 말씀만으로 그 뜻이 완벽하게 실현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 받을 신자의 일생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분의 뜻 안에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OOO의 구원과 그 일생이 함께 있습니다. 당신께서 지구상의 때가 차면 “OOO에게 성령이 역사하여 그 영혼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만 하시면 구원이 이뤄집니다. 그것이 인간의 안목으로는 즉, 지구 시간적으로는 먼저 뜻이 있었으니까 예정으로 인식되고 또 예정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십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구원만큼은 그분의 입장에서 접근 분별 이해해야 합니다. 택함 받은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생할 자입니다. 그는 항상 현재 시제로 그분의 영원한 뜻 안에 있었고, 있고, 또 있을 것입니다.

 

10/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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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집니다.(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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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원님이 빛의 속도에 기초하여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귀한 의견을 나눠주셔서  함께 참조하시라고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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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얼마전 물리학 공부를 하다가 "빛"에 관해 깨닫게 된게 있는데, 나름대로 저에게 큰 감동이어서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빛은 빠릅니다. 정확히 얼마나 빠르냐면 약 초속 30만키로미터의 속력을 갖습니다. 이는 1초에 지구 8바퀴 반을도는 속력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속도이죠. 

 

근데 이 빛의 속력을 과학자들은 "절대속력"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모든 속력은 다 상대속력인데 빛만 오로지 모든 것중에서 유일하게 빛만 절대속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10km/s 로 달려가고  골리앗이 다윗을 향해 5km/s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다윗이 봤을 때 본인은 정지했다고 생각하기때문에 골리앗은 자기에게 15km/s로 다가온다고 생각하고 그 반대인 골리앗의 경우 역시 골리앗은 자신이 정지했다고 생각해서 자기는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다윗이 15km/s로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는 관점에 따라 속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를 상대속력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빛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예를들어서 골리앗 진영에서 출발한 빛이 있고 다윗 진영에서 출발한 빛이 있다면 다윗 진영에서 출발한 빛 입장에서 골리앗진영에서 출발한 빛을 보면 분명히 빛의 속력의 2배인 초속 60만키로미터로 다가와야하는데 그냥 초속 30만키로미터로 측정됩니다. 자세히 설명하면 여기서는 복잡할 것 같고 간단하게 얘기해서 빛의 속력이 모든 속력중에 최고값이기 떄문에 절대로 이 값을 넘을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빛의 속력을 절대속력이라고도 부릅니다. 

 

또 근데 신기하게도 이 빛은 시간이라는 개념자체가 없습니다. 빛은 유일하게 시간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내가 만약에 빛이라면 나는 시간이 정지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를들자면 실제로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 지구로 오는데 8분이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태양은 실제로 지금의 태양의모습이아니라 정확히는 8분전 태양의 모습이고 현재태양의 모습은 아무도 모르고 오직 물리법칙을 초월한 하나님만 알수있습니다. 빛의속력이 최고높은 속력이기 때문에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도 빛의 속도를 넘을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그 8분이라는 시간은 지구에 서있는 사람이 측정한 것이지, 정작 태양빛입장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즉 빛입장에서는 0초가 흘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0초가 아니라 빛 입장에서는 시간자체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게 단순히 어둠을 밝히시기떄문에 빛인가? 했는데 물리적인 빛으로 생각해도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습니다.  정말로  주께 있어서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는 말씀,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이라는 말씀이 이런식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는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멋진 하나님입니다. 

 

빛이신 예수님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고 느낀 경험이 생각나서 짧게 공유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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