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직전에 구원받으면 특혜 아닌가?

 

십자가상의 우편 강도

 

아무 자격과 조건 없이 구원으로 택함 받았다면 불공평한 특혜가 아닌지 앞장에서 살펴봤습니다. 오히려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할 소명자로 부름 받은 위에 사도나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할 정도로 많은 환난과 핍박이 반드시 따릅니다. 영악한 인간들은 만약 신자가 된 후부터 순교 당하기까지 일어날 일 전부를 미리 알려주면 구원 안 받아도 좋으니 택하지 말아달라고 사정할 것입니다. 실제로 불신자들 중에는 예수 믿으면 세상 재미를 다 끊어야 하니까 믿지 않겠다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자들이 죽기 직전까지 전도하여서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 받는 자들이 꽤 있습니다. 그럼 그들은 전도할 시간이 없으므로 특혜가 아닌지 반발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세상에서 풍요와 안락을 다 즐기다가 죽을 때 다 되어서 믿겠다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언뜻 세상 쾌락 다 즐기다가 마지막 순간에 구원 받는 것만큼 꿩 먹고 알 먹는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비슷한 경우가 나오는데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오른 편에 있던 죄수입니다. 큰 죄를 짓고 사형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로선 전도는커녕 이웃을 섬기는 선한 일도 해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제멋대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천국행 복권을 그저 주은 것 같습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眞實)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33, 39-43)

 

이 사건은 역사상 한 번 뿐이었고 또 예수님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건 자체가 주는 중요한 영적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평생 동안 전도 소명에 충성했던 신자 이상으로 그 강도는 중요한 역할을, 그것도 전도에서 했다는 뜻입니다. 후대의 성경독자들이 두고두고 그 뜻을 정확히 깨달아서 실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 하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그 강도도 예정에 따라 구원 받은 것입니다. 이 사건에 계시된 영적 진리가 무엇입니까?

 

우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육신이 죽더라도 마지막까지 구원의 권능을 행사하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사람은 예수님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임을 정확히 깨닫고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느냐, 아니면 그런 정체성을 부인하느냐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구원과 심판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땅의 인간사회에선 사형을 당한 중죄인이라도 하늘의 하나님의 법정에선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함으로써만 구원이 확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사람의 자격과 조건에 전혀 좌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주님은 하나님이 택한 자를 기어이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로선 누가 언제 어떤 식으로 구원으로 예정되어 있는지 모르니까 더더욱 마지막 순간까지 전도하길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본인도 하나님께 택함 받았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십자가 복음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그 전에 전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주시길 기뻐하십니다. 아무래도 죽기 직전에는 주로 가족과 친지들과 만나게 되기에 더더욱 애끓는 마음으로 전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령의 깊은 곳까지 아신다.

 

죽음과 마주치는 마지막 순간에는 사후(死後)의 심판이 두려워서 전도하면 비교적 쉽게 믿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택하심과는 관계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더더욱 자신의 결심에 달린 것이지 예정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반박입니다. 눈앞에 낫을 두고도 기억 자를 못 읽는 셈입니다. 십자가의 두 강도 사건을 성경이 기록한, 정확하게 말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마련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예정 진리를 쉽게 깨닫게 하려고 즉, 기억 자에 대한 낫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 강도는 그 인생이 처참히 실패했고 현재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똑같은 처지입니다. 현실의 삶까지 같았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여건과 실상에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한 강도는 주님을 끝까지 거부하고 다른 강도는 기꺼이 영접했습니다. 지적 영적 수준이 같다면 동일 사건에 대한 반응도 당연히 같아야 함에도 정반대의 결과가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이성적 종교적 판단 외에 어떤 다른 변수가 작동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강도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어둠이 더 좋아서 참 빛으로 오신 주님이 싫었던 것이며 하나님은 그 상실한 마음대로 놓아둔 것입니다. 반면에 그와 동일한 영적 상황에 있던 오른 편 강도는 상기에 설명한 대로 십자가 복음을 계시함에 중요한 역할을 맡기려고 하나님이 구원으로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가 고백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강도에게 너도 나와 같이 엄청난 죄를 짓고 또 지금 그 죄 값을 치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바울이 로마서 1-3장까지 변증한 불신자의 상태입니다.

 

말하자면 자기는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했고 그에 대해 세상에나 하나님 앞에서 아무 불평 원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어도 상대는 자기를 그렇게 만들거나 방치한 하나님에 대해 원망과 분노를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인간 사회에 만연한 모순 불법 죄악 불행 고난 재앙을 일으키거나 두고 보는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도 없고 싫다고 하며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과 그 영적 실체가 똑같습니다.

 

반면에 회심한 강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세 사람 다 곧 닥칠 육체적 죽음 앞에 매달려있습니다.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이 언제 있을지는 몰라도 마지막 날의 부활은 믿었지만 일단 죽으면 음부에 들어가 그때까지 아무 의식 없이 계속 잠을 잔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음 이후에 자신이 들어갈 영역에 대해서 “당신(예수님)의 나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의미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관장하는 분이라고 겸허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제발 심판에 떨어지게 버려두지 말라는 간구였습니다. 예수님을 심판과 구원을 주관하는 하나님이라고 온전히 믿어야만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영원한 구원을 갈망하는 그에게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오늘은 죽음이 닥치는 바로 그날로 “죽자마자 바로”라는 뜻입니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은 물론 천국입니다. 이는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온 우주는 물론 영계까지 통치하시는 하나님만이 선포할 수 있고 또 베풀 수 있는 구원이었습니다.

 

삼년 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주님께 천국 복음을 배운 수제자 베드로도 이 강도와 같은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 까닭도 자기 영혼의 영원한 구원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현실적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 내주해주자 비로소 십자가 대속죽음의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혜의 영인 성령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는 주님의 생전의 가르침(요16:8-11)의 의미를 성령이 간섭해 줌으로써 깨달았던 것입니다.

 

수제자 베드로의 영적 수준이 겨우 이런 상태였는데 그 강도는 더더욱 영적으로는 깜깜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모두가 스승이 이 땅에 계실 동안 즉,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하나님이라고 온전히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깨닫고 정확하게 반응하는 것은, 사실상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기준임, 성령의 간섭 없이 사람이 혼자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십자가상에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고 또 당신께서 이미 택하신 뜻에 따라 성령이 간섭해줌으로써 오른편 강도는 주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골고다 처형장에 있던 사람들 중에 이 강도 한 명을 빼고는 모두가 주님을 정죄하고 조롱하기 바빴습니다. 그는 주님이 예정하신 은혜로 구원을 얻은 가장 확실한 예였으며 또 그런 진리를 드러내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끝까지 한 영혼도 포기하지 말고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이유와 근거를 확신케 해주려고 예수님이 사전에 계획해놓았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죽기 직전이라 단순히 심판이 두렵기 때문에 또는 전해지는 복음이 잘 안 믿기지만 혹시 모르니까 밑져야 본전이니까 당장에 믿겠다는 대답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행동은 물론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불신자나 다른 종교인들도 죽은 후에 인간의 이 땅에서의 행적을 보고 구원과 심판으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그런 심판자가 겉으로만 선행을 한 위선자나 죽기 직전에 형식적으로 회개한 자를 골라내지 못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죽기 직전일지라도 예수 십자가 복음을 진심으로 수용하고 회심하는 자는 그 전과 후의 모습이 다릅니다. 우선 스스로 자신의 무가치 무능력 어리석음은 물론 자기 죄를 씻을 길이 없음을 절감하고 구원에 대해 고뇌 갈등해왔던 자들입니다. 입이 아프도록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택하심과 인간의 의지적 믿음이 상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이 구원으로 예정했고 도 본인도 구원을 진심으로 얻고 싶어 했음이 입증되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순수하게 영접하고 죽음을 맞는 자는 얼굴이 아주 밝아지고 웃음까지 머금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평안한 모습으로 운명하셨다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인정할 정도입니다. 그런 평화스런 임종을 본 불신자 가족이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실례가 종종 있습니다.

 

능력 있는 기도의 용사었던 조지 뮬러에게 유명한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아무리 전도해도 믿지 않던 친구가 몇 명이 있었는데 뮬러의 임종과 장례식 모습에 영적 찔림을 받고 다들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뮬러는 생전에 자기의 기도 중에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는 하나도 없다고 말했는데 그 친구들에 대한 기도도 죽고 난 후에 응답받았던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5-60)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은 돌로 맞아 죽기 직전에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따뜻하게 맞아 주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틀림없이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광채가 나며 아주 평안해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를 순전하게 믿었던 신자나 죽기 직전에 진심으로 영접한 신자와 같은 전형적인 임종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귀를 막고 악의적으로 그를 조롱하고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싫어하는 자들로선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그들의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며 죽었습니다. 그에게 내주하고 계신 성령이 역사하여서 사탄에게 미혹된 영혼들에 대해서 예수님과 동일한 긍휼한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자리에 사도 바울이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웃옷을 그 앞에 두었다는 것은 그가 그 처형을 주도한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므로 스데반의 신성모독을 율법에 따라 판결할 수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신성모독에 대한 첫째 증인이 돌을 먼저 들고 치도록 했습니다.(신13:9) 사람을 죽이는 처형인지라 양심에 찔려서라도 함부로 위증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입니다. 어쩌면 그가 제일 먼저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바울로선 스데반이 나사렛 이단 예수를 믿었고 죽기 직전에 예수를 보았다고 말하니까 여호와의 대적을 넘어 아예 거짓말하는 사기꾼으로 간주하고 멸시하며 미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끔찍한 고통으로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평온을 유지한데다 도리어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큰 쇼크를 먹고선 그의 마음 한구석에 풀지 못한 숙제로 계속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자신도 다마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란한 빛 가운데 일대일로 대면하고 사흘간 봉사가 되는 체험을 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낫지 않고 백약이 무효한 가운데 죽음과 방불한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찾아온 아나니아가 기도해주자 다시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여 자신이 영적인 봉사요 시체에 불과함을 절감시킨 것입니다. 결국 그는 스데반이 죽기 전에 말한 것인 진리였고 정말로 예수는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하나님인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의 극렬한 핍박자였던 자기를 열렬한 옹호자로 바꾸려고 주님이 미리 예정하고 때가 되자 자기에게 먼저 찾아와 주셨다는 사실까지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예정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구원의 진리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시고 또 그런 전도자로 세우기 위해서 구원으로 택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교리적으로 잘 풀어 설명하면서 전도할 수 있는 신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기 이웃들에게 자신의 변화된 삶으로 영적인 찔림을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에 대해 물어올 때에 혹은 자연스런 기회가 닿으면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났고 그 후에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간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도입니다. 이처럼 모든 신자들은 전도자로 택함 받은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거룩하게 변화된 삶으로 전도하여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신자의 장례식도 전도의 아주 좋은 기회가 됩니다. 장례식 예배에 참석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순전한 십자가 복음이 전해지면 구원으로 예정된 자에게 성령이 역사하고 그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뮬러의 장례식을 보고 예수를 믿은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회심해서 평안한 가운데 죽은 죽는 것도 아주 훌륭한 전도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구원을 주는 방식과 때도 그분이 미리 정하십니다. 임종 직전에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특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런 시기에 그런 모습의 구원으로 예정된 것이며 설명 드린 대로 그 자체가 전도자로의 부름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시고 완벽하신 주권과 섭리를 인간 이성의 합리성만으로 섣불리 격하 내지 비하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순간의 순전한 회심이야말로 예정 구원이 얼마나 세미하고도 오묘한지 보여주는 반증입니다.

 

베드로나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들도 스스로 깨달아 결심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래서 믿을 수 있었다면 누차 강조하지만 인간의 공적이 되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구원이 됩니다. 구원을 주고 싶어 하시며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택해주심과 또 그에 따른 그분에 대한 순전한 반응도 없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 한 번의 자기 이성과 의지에 따른 다행스런 결심으로 구원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4/15/2020

 

이 글에 대한 추가질문을 한 분에게 보충해서 답변 드린 내용을 참고하시라고 아래에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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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를 그분이 택하여서 그분이 구원주십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내 맘대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구원 받으면 되지라는 마음을 가진 자를 기뻐하실 리는 절대로 없지 않습니까? (물론 스쳐지나 가는 생각이었다가 그 후에 그 생각을 완전히 바꿔먹었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그런 마음에서 죽기 직전에 행하는 한 번의 회개는 일종의 행위구원에 해당되며(회개도 정신 활동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구원에 담긴 정말로 엄중한 의미와 넘치는 은총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마치 알라딘이 외우는 주문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후에 이 땅에서 그분과 교제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고귀한지에 대해선 아예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 순간에는 누구나 지옥 심판이 두려워서 어느 정도 진정성 있는 회개를 할 것이며 예수님도 정말로 믿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은 누가 구원 받아야 할지 누구를 기뻐하는지 그분은 이미 다 아시고 구원과 심판으로 다 택해 놓았습니다. 누가복음 23:39-43을 다시 잘 읽어보십시오. 왜 두 강도가 구원과 심판으로 나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마지막 순간에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 하나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의 회개도 그 진심을 꿰뚫어 아시며 평소의 인생관, 세계관, 종교관, 가치관 등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예정론의 다른 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에 동역할 소명자로 세우기 위해서 예정으로 구원 주신다고 밝혔습니다. 또 택함 받은 자의 인생도 복음을 전하느라 형통 풍요와는 거리가 멀고 좁은 문을 통과하며 머리 둘 곳도 없는 고난이 기다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약에 미리 신자의 삶이 현실적으로는 고달플 수 밖에 없다고 알게 해준다면(예컨대 바울의 경우처럼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다가 결국은 순교당한다는 사실을 - 고후11:23-30 참조 요)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예정으로 구원주실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 상의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구원 받아 하나님의 일에 동역한 것이 없어 보이나 그렇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믿음으로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여실히 보여 주었고, 평소의 인격 품행 사고 철학이 달라야 하며, 무엇보다 인간은 예수로 인해 구원과 심판 둘로만 나뉜다는 진리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생생한 예입니다. (참고로 예정론에 관한 글들은 당시에 워낙 질문이 많아서 조금 서둘러 쓴 글이라 빠트린 내용이 조금 있어서 앞으로 여유가 생기는 대로 보완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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