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심판으로 예정하지 않았다.

 

예정론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간혹 하나님이 구원으로 예정한 것까지는 이해해줘도 미리 심판으로 예정했다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도 해도 도무지 용납이 안 된다는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으로 미리 예정했다고 성경이 말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똑같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19,20)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의 인간의 영적인 실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사람들이 특별한 종교적 교육과 훈련 없이도 스스로 당신을 믿고 따를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증거와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고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롬1:18) 속에 하나님은 “당신을 알 만한 것”을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덧붙이기를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했습니다. 신비하고 장엄한 자연을 보면 절대로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위대하신 손길이 있으며 자신은 그분 앞에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일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모든 인간의 속에는 비록 타락으로 인해 왜곡되어 상대적이긴 해도 태생적인 윤리의식이 있습니다. 그 또한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형상의 잔재이기에 선을 행하지 못하거나 죄를 범하면 반드시 수치심과 죄책감이 따르게 됩니다. 사람 속에 저절로 생기는 이런 피조물인식과 윤리의식은 필연적으로 자기를 창조한 절대자에 대한 경배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소망과는 정반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족속들은 하나님의 심판받아 마땅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로 세우서 거룩한 율법까지 수여한 유대인들의 상황도 하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2:3) 유대인들이 이방족속들의 우상숭배와 온갖 도덕적 타락을 악하다고 판단하면서도 그와 동일한 죄악을 범하고 있다고 정죄합니다.

 

요컨대 그들이 여호와를 따르며 섬기는 열성이 아무리 많아도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지 않았기에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시는 물론 지금도 가장 경건하고 율법적인 유대교가 그렇다면 세상의 어떤 종교로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이방 우상들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 신앙에 빠졌고 그에 따르는 온갖 완악한 죄악을 범했기에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방족속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그 둘을 심판하는 원칙은 같다고 선언합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2:9,12) 유대인과 헬라인(유대인을 제외한 이방인들을 총칭) 둘 다 각각의 범죄로 심판받을 뿐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란?

 

그런데 아담의 타락 후에 모든 인간이 원죄를 갖고 태어났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성경의 선언에 대해 많은 이들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항상 악한 일만 궁리하여서 죄를 밥 먹듯이 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분명히 선한 양심이 있고 때로는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며 남을 살리는 선행을 하는 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인류의 영적실상에 대해 성경이 내린 결론을 다시 살펴봅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9-18)

 

하나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찾고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는 의인이 한 명도 없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그분을 찾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이가 죽어 마땅한 까닭이 도덕적 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관해 완전히 어리석어서 그분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영적인 죄인이이라고 합니다. 그분에 대해 무지하니까 그분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창조주 하나님을 유일하게 믿었던 유대인들조차 종교행사에만 능했지 실질적으로는 그분과 아무런 영적 교통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거룩한 통치에 따라 살고 있었다면 하나님을 이방에 알리는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을 것입니다. 그럼 주님이 구태여 오실 이유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사람들로 하나님을 나타내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주님이 종교적 스승이나 선각자로서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고 훈련시키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냈다”고 합니다. 당신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 대속 죽음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으로써 행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종교로는 불가능한 구원을 손수 베풀어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9-11)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당신께서 택하여서 그들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여 출애굽을 비롯한 숱한 권능과 은혜를 베풀어준 이스라엘조차 영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속 살펴본 대로 니고데모는 주님에게서 구원의 길을 전해 듣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열두 제자들마저 주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셔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주님의 이름을 믿으며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를 단순히 주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 준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런 영접이 가능한 까닭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선민이라고(혈통), 또 종교적 열성으로(육정), 나아가 사람의 뜻(스스로 믿으려는 노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만 즉, 그분이 구원으로 택한 자들만이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까닭은 자녀를 생산 혹은 입양하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모가 행합니다.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지 않았다.

 

결국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인간의 영적인 상태는 모두가 똑같이 점수로 치면 빵점(zero)도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는 정반대인 그분의 원수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순전한 관계가 없는 채로 살아왔고 죽을 때까지 그 상태로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구태여 하나님이 심판으로 예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토기장이신 하나님이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당신의 뜻에 따라 만든다고 설명한 것도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권과 섭리에 따른 선택에 따른다는 진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강조하는 뜻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믿지 않느냐는 비평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 때문이라고 변증하는 것이 그 비유가 말하고자 아는 바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11:25,26)

 

바울은 구원의 순서가 이방인이 먼저 된 것일 뿐 이스라엘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토기장이 비유에서 천한 그릇이 심판으로 예정되었다는 뜻이 되려면 이스라엘이 심판으로 예정되었어야만 하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의 불경건함을 고쳐주신다고 예언했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별칭이므로 유대인들도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어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그들을 경건하게 만들어주시니까 마찬가지로 당신께서 택하신 자들을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3)는 말씀도 정확히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했다고 해서 그를 심판으로 예정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에는 비교급과 강조법을 나타내는 표현법이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특정 표현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으로 대체하는데 두 번 반복하면 비교급, 세 번 이상 반복하면 최상급 표현이 됩니다. 거기다 어떤 특정한 사안을 아주 강조하기 위해서 그와 정반대되는 사안을 대조시킵니다. 이때에 동원된 정반대되는 사항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단지 강조되는 사안을 더 강조시키는 역할만 합니다.

 

에서를 미워했다는 것이 바로 그런 대조법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했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와 반대되는 표현을 에서에게 적용한 것이지 실제로 에서를 미워한 것이 아닙니다. 에서를 미워해서 심판으로 예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야곱을 구원으로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이 또한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제외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택한 자만 구원받는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설명하는 중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앞부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7,8)

 

불신자를 그냥 그대로 두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이를 택해서 심판으로 예정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뜻을 명시적으로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알만한 것을 사람들에게 다 보여주었음에도 당신께 경배 드리지 않고 그 영광을 우상으로 대체한 완악한 불신자들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4,26,28)

 

하나님은 당신을 찾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그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부끄러운 욕심에, 상실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온갖 죄악으로 스스로 더렵혀지고 죽음의 파멸로 치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따로 그들을 심판하려 예정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태여 별도 형벌을 가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 자신들의 죄로 저절로 정죄되고 구원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같은 의미를 세 번이나 반복했으니 히브리어 표현법에 따르면 불신자를 따로 심판으로 예정하지 않은 것을 최상급으로 강조한 셈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도 니고데모와 구원에 관해서 나누는 대화중에 동일한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당신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 바로 이어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7,18)

 

우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심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주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주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 자체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바꿔 말해 그가 나기 전부터 심판으로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그분을 멀리한 죄 때문에 심판받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불신앙의 죄에 빠져 있는 채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며 죽은 후에도 그런 관계가 이어지기에 낙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반대편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예수님은 다시 그런 뜻을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그 다음에 제기되는 반론은 하나님이 구원주실 자만 미리 택했다 해도 어차피 택함을 받지 못한 자는 결과적으로 심판으로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그에 대해선 다음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2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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