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4: 과연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과연 오직 은혜인가?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공로 하나 없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과 맞바꾼 구원인데 또 다시 인간의 공로 부족 때문에 구원을 취소한다면 독생자는 헛된 죽음을 한 것입니다.
상기 말씀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우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죄인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십자가 보혈로 사탄의 철장 권세를 깨트리고 구원해주었기에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노예가 아닙니다.
이어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시나니”라고 합니다. 연약한 육신으로는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지킬 수 없어서 구원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을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예수님의 영,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자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뤄지게 하려고 즉, 율법대로 준행할 수 있게 하려고 은혜로 구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가 회심하여서 영원한 심판에서 면제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칭의의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구원이 완성되고 성령이 개별적으로 신자들에게 강림 내주함으로써 율법이 요구하는 의까지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영을 따라 “행하는”의 헬라어 ‘페라파테오’는 영어로는 walk로 번역되었듯이 삶에서의 지속적인 순종을 뜻합니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예수님처럼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 전과는 달리 성령이 내주하여서 신자로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면서 율법의 의도 온전히 실현하게끔 이끌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5,6절)는 말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지 않은 때는 성령이 내주하지 않아서 육신의 일만 생각하는데 그 생각은 사망이라고 합니다.(6,7절)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단지 하나님의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혹은 그분의 현실적 보상을 받으려고 율법을 지켰는데 그래선 구원이 없을 뿐 아니라 순전한 성화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성령이 내주하게 되면 형벌이나 보상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서 순전한 의미와 모습의 성화를 이뤄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령이 죄인을 거듭나게 한 후에 내주하는 이유는 성화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회심 중생하는 순간부터 성령의 인도로 성화는 곧바로 시작되어서 평생토록 지속됩니다. 그리스도를 닮게 하려고 성령이 내주했기에 구원의 취소도 있을 수도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럼 성령이 각 신자에게 강림 내주할 이유와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성령의 보호 인도 없이는 성화를 제대로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자유의지로 믿어서 구원을 얻은 자가 다시 자기 의지로 죄를 범하거나 믿음을 버린다면 사실상 성령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성령이 임재 내주하지 않아서 구원 밖에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런 구원 밖에 있었던 자에게 구원이 취소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첫째 모토도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인간 쪽에 아무 공로 자격 조건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이 당신의 한량없는 은혜로 구원을 주셨는데 다시 그 은혜를 거두신다면 그 은혜는 조건부의 제한된 은혜이며 하나님 또한 너무나 치사하고 속이 좁은 분이 되어버립니다.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직 은혜로”가 아니라 “오직 인간 의지로” 구원이 된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이 구원취소의 근거로 드는 성경구절들이 언뜻 그럴 듯 해보여도 면밀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모두 그 구절이 속한 앞뒤 문맥의 뜻은 무시하고 책 전체의 주제와도 동떨어진 해석을 합니다. 어떻게든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주장에 부합되는 의미를 무리하게 갖다 붙인 것입니다. 본문 자체가 정말로 말하는 바를 무시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뜻을 본문에 주입시킨 것입니다.
인터넷 변증사역을 하면서 구원 취소 가능 여부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질문들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신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히브리서 6:4-6과 야고보서 2:14에 관한 저의 이전 답변 글을 아래에 인용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유사한 구절에 대해 답변 드렸으며 또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 의지의 관계에 대한 글들도 많이 올려놓았으므로 관심 있는 분들은 필자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의 성경문답 사이트를 방문해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신자가 구원을 얻은 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핵심 근거로 드는 구절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앞뒤 문맥의 뜻을 찾고 히브리서의 전체 주제와 비추어봅시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첫 번째이자 결정적으로 잘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 읽거나, 어떤 구절을 읽든 자기 생각으로 해석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고난 중에 있으면 위로와 힘을 주는 구절을,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으면 하나님의 신원(伸冤)을 바라는 구절만 찾아 읽습니다. 또 현재 읽고 있는 본문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해보려는 노력은 아예 하지 않고 그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구절과 단어에만 초점을 맞춰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해버립니다.
성경해석법을 배워보지 못한 일반 신자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비록 신자가 그렇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때로는 정말로 궁급한 신자에겐 큰 은혜를 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전문 사역자는 절대로 그래선 안 됩니다.
말하자면 자기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비슷한 맥락의 구절을 찾아서 억지로 그 의미를 짜내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본문 자체의 뜻을 즉, 저자가 당시의 독자에게 어떤 목적으로 무슨 의미로 말했는지 밝혀내야 합니다. 신자들에게도 가장 먼저 그것부터 가르친 후에 실제 삶에 적용하는 차원에선 조금씩 넓혀나가도 되는 것입니다.
본문 자체가 말하는 바
상기 본문은 언뜻 신자가 죄나 잘못을 범하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이 말씀을 살피면 그 적용되는 대상이 구원 받은 신자라고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자들이 지닌 믿음을 묘사한 네 가지 표현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넷은 “1) 한번 비췸을 얻고, 2)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3)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4)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입니다. 모두 일회성의 은혜를 받았다는 뜻이지 지속적으로 은혜 안에 거(居)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의 빛에 한번만 비췸을 얻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 현장의 로마 군병들도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가 분명히 그들의 심령에 비췄기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거듭나서 구원 얻은 것은 아닙니다.
둘째,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습니다. “하늘의 은사”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gift)”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에 베푸는 여러 모양의 귀한 선물 중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면 최소한 “하늘의 은사를 받고”라고 표현해야 타당합니다. 구원은 본질적으로 맛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성령에 참예한 바 된 것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것을 뜻합니다. 성령이 당신의 뜻대로 각 신자에게 나눠주는 영적 선물을 말합니다.(고전12:4-11) 그런 은사를 받은 신자는 당연히 또 자연히 성도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자기 은사를 사용하게 됩니다. 맛만 보았다는 것은 그런 사역을 한 적이 없으며 또 그럼 그 은사를 소유한 적도 없다는 뜻입니다. 불치병을 앓는 불신자가 신유의 은사로 병을 낫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막상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로 말 그대로 단순히 성령의 역사에 참여한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같은 맥락입니다. 마찬가지로 ‘맛보고’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예언도 수긍했습니다. 불신자가 전도 집회에 와서 말씀에 찔림을 받고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평소 교회에 출석하여서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특별히 종말론적 가치관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비록 그 실천이 더딜지라도 그런 가치관이 확고히 서있지 않다면, 구원 받은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히브리서 저자는 네 번이나 일회성을 의미하는 용어를 사용해서 타락한 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그랬다면 분명히 강조하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와서 거하는 즉, 거듭나서 구원 받은 신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락을 하되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형태로 배교한다고 합니다. 온전히 구원을 얻은 자라면 예수님의 은혜를 철저하게 부인하며 모욕하는 방식으로 거역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성령이 내주하므로 일시적으로 하나님, 교회, 성도들에게 상처받고 실망하여 신앙을 게을리 할 수 있어도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저자가 “예수를 현저히 욕보인다.”고 강하게 표현한 의도는 고의적으로 철저하게 예수님을 대적했음을 드러내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스스로 악의를 갖고 타락한 자에 대한 경고이지 하나님이 예수 믿은 후에 잘못을 범했다고 구원을 취소시킨다는 뜻과는 무관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작 배경과 동기
본문의 뜻을 더 정확히 알려면 히브리서를 저작하게 된 당시 상황부터 살펴야 하는데 그래야만 그 저작 동기와 강조하려는 주제가 분명해집니다. 먼저 서신을 받아 읽을 수신자들은 책 제목이 말하는 대로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자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임을 믿고 초대교회에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으므로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역사로 인식했습니다. 생전의 주님의 가르침과 사역도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입증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영광의 빛의 비췸을 받았으며,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 참예했을 수 있으며, 산상수훈과 종말에 관한 설교에 감동받았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각자가 하나님께 받은 재능과 특기를 활용해서 봉사했을 것입니다. 상기 본문의 표현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자 자기들 세력의 약화될 것을 염려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집요한 위협과 핍박이 그들에게 가해졌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박해는 유대교로부터 온 것입니다. 유대인 신자들로 유대사회에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아예 파문 추방했습니다. 이방인처럼 구원 받지 못할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 얻는 것은 틀렸고 반드시 지금까지처럼 모세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부추겼습니다.
이처럼 현실적 핍박 위에 영적인 공격까지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지자 서서히 재차 유대교로 돌아가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래서 초대 교회 안에 동요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십자가 복음의 충족성 완전성 유일성 절대성에 대해 변증할 목적으로 저작된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과 그 십자가 희생 죽음을 구약의 제사장과 율법에 따른 제사에 비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인간 제사장과 달리 주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잇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메시아라고 변증했습니다.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어야만 인간의 죄를 대속할 제물로서 완전한 조건과 자격을 갖춘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정체성을 변증한 후에 율법구원과 은혜구원을 대조합니다. 율법의 짐승 제물의 대속 효과는 행위로 범한 죄들만 그것도 일 년이라는 단기간만 미친다고 합니다. 매년 짐승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반면에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바쳐진 대속의 효과는 영단번(永單番 once for all)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율법의 한시적이었던 제사법도 폐지되었습니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8-20)
간단히 말해 율법에 따른 행위 구원은 틀린 것이므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실현한 은혜의 구원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는 책이 히브리서입니다. 자꾸만 율법을 따라야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교회 안팎의 유대주의자들의 주장 위협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상기 본문이 예수 믿은 후에 잘못을 범하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의미라면 신자는 반드시 또 오로지 자신의 행위를 올바르게 세우는 일에만 믿음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또 은혜구원은 틀렸기에 다시 행위구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히브리서 전체가 힘써 금지하고 있는 권면과 정반대의, 의미가 됩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헛되고 헛된 것으로 전락되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 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저자가 특정한 주제를 강조하고자 한 편의 편지를 작성하는데 서로 다른 의미를 그것도 반대되게 쓸 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의 저자가 일구이언 한다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히브리서의 구조와 주제
저자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어떻게 반박하고 있는지 책의 전체 구조를 간략하게 훑어봅시다. 먼저 1장에서 2:4까지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천사와 대조해서 변증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지만 죄에 묶인 백성들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충성된 대제사장이었다고 선포합니다.(2:17)
이어지는 3장에선 유대인들이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율법을 여호와께로부터 수여 받아 선포하고 가르친 모세보다 그리스도가 우월하다고 변증합니다. 그리고 4장에선 믿음으로만 얻는 안식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히브리 선조들이 약속은 받았으나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는데(4:1), 그 이유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3:8,9)
단순히 그분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히브리 선조들이야말로 출애굽 전후에 상기 본문(6:4,5)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하는 영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도 참예했고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보았습니다. 시내 산의 화염 가운데 강림하신 여호와를 멀리서 목격했고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도 들었으며 온갖 이적을 체험했으며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도 맛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분과 피의 제사로 세운 제사장 나라 언약을 끝까지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스스로 완악하게 거역했습니다. 겉으로는 구약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따랐으나 육신에만 할례를 했지 심령에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형식적 문자적 습관적으로만 지켰지 율법의 정신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택했고 기적으로 보호 인도했으며 거룩한 율법을 수여했기에 구원은 이미 얻었다고 과신했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간주해서 외모로 차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지 못하고 대신에 그분을 시험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율법은 다가올 십자가 구원약속의 표징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래서 4장 말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해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5,16)
이런 예수님의 은혜 구원을 보장하기 위하여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멜기세덱과 비교하여 변증한 후에 교인들의 신앙적 배반에 대해 경고합니다.(5장) 그 후에 상기의 본문이 이어지는데 그 전에 6:1,2에서 유대 기독교인들이 배교하여 타락하는 즉, 유대교로 재개종하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6:1,2)
“그리스도 도(道)의 초보”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은혜를 순전히 믿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간단한 진리를 말합니다. 먼저 그 도를 버리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런데도 그 권면에는 귀를 막고 대신에 “죽은 행실을 회개하려” 하고 또 “유대교 식의 세례와 안수를 행하려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런 일들은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참된 교훈”을 다시 닦는 일이므로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그보다는 완전한데 즉, 십자가 은혜 구원의 절대성 유일성 충족성 완전성을 다시 견고하게 붙들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이후로는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 은혜를 세밀하고도 깊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과 대제사장직의 기원을 비교한 7장,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말한 8장,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완전성을 말하는 9장,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을 말하는 10장으로 이어지고 10장 후반에는 변치 않는 믿음의 능력을 설명합니다. 그후 11장에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후에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은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했습니다.
본문 해석의 결정적인 열쇠
주목할 것은 상기 본문의 다시 타락한 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힌트가 본문의 앞과 뒤에 나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각기 하나씩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하는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4:2) “저희와 같이”에서 ‘저희’는 바로 약속을 받고도 하나님을 시험하여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히브리인 선조들을 지칭합니다. 마침 그들의 선조 가운데는 본문이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왕인데 구약시대에는 종종 그러했듯이 성령의 일회성 은사를 받았으나 구원을 받지 못했지 않습니까? (삼상10:9-13,16:14)
따라서 유대교로 재개종하여 십자가를 욕보인 자들에 관해 4:2에서 이미 그 선조들처럼 복음 전함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은 자라고 설명했기에 6:2이 말하는 바도 당연히 그와 같은 뜻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한 저자가 비교적 짧은 책에서 자신의 논리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전해들은 복음에 반드시 믿음으로 화합해야 구원을 얻으나 그러지 못했다면 아직 구원 얻지 못한 자입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어보려고 교회 생활을 시작한 자들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그분의 참 생명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자들이 다시 할례, 제사, 안수, 세례, 인식일 규정 등을 지켜야만 구원 얻는다는 유대교 교리를 쫓을 리는 없습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12:15,16) 본문 뒤에 나오는 결정적인 힌트입니다.
교회 내에 다시 타락할 자가 있는지 잘 살펴서 믿음으로 잘 세워주어야 하는데 혹시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자가 있는지 주목하라고 합니다. 야곱의 형 ‘에서’는 너무나 사소한 현실적 필요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상속권을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처음부터 믿음이 없던 자였습니다.
상기 본문에서 타락한 자는 초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기독교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 손해 내지 핍박이 두려워서 쉽사리 유대교로 재개종한 자들입니다. 율법의 짐승 제사와 인간 장로들이 제정한 종교적 규례들을 지켜야만 구원이 보장된다는 가르침에 현혹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물론 메시아 되심을 아무 미련 없이 포기했습니다. 에서처럼 처음부터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信者, believer)가 아니라 교회의 일원(敎人 church member)이었을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유대인 신자더러 완악하게 하나님께 패역했던 선조들의 실패를 따르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이자 간절한 호소입니다. 예수 믿어 이미 구원 얻은 신자가 잘못을 범하면 그 구원이 취소된다는 의미는 전혀 없으며 또 성경전체에 그렇게 말하는 바도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당신의 독생자를 다시 현저히 욕보일 일을 절대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 (실제 질문은 야고보서 3:1에 관한 것이었지만 답변 가운데 2:14도 함께 다뤘습니다.)
야고보서의 특징
상기 구절은 본문 자체로도 난해하지만 야고보서 전체가 해석하기 아주 어려운 책입니다. 마치 선행을 쌓아야만 하는 행위구원을 주장하고 믿음으로 얻는 은혜구원이 부인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여질 때에 논란이 많았고 종교개혁의 선봉장이었던 마르틴 루터마저 그 진가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여러 주제를 중구난방 식으로 일관성이 없이 진술하고 있는 것 같아 해석상의 또 다른 장애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기구절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야고보 사도가 과연 행위 구원을 강조하려 했는지부터 온전히 분별해야 합니다. 또 그와 연결해서 앞뒤 문맥에서의 의미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우선 신약 서신서의 가장 큰 특징을 아셔야 하는데 특정 교회나 교인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는 로마서를 빼고는 이미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을 수신자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도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즉, 유대인 신자들에게 문안한(1:1) 후에 곧바로 이런 말씀이 이어집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형제라는 호칭은 앞에서 열두 지파라고 했듯이 유대교와 로마 당국으로부터 이중 핍박은 물론 교회 안의 온갖 문제로 시달리는 유대인 신자를 다시 친근하게 부른 것입니다. 그들더러 그런 시험을 오히려 기쁘게 여기고 인내를 통해 믿음이 온전히 성숙해지라고 권면합니다.
요컨대 이미 구원 얻은 신자가 이룰 성화(聖化 sanctification)에 관한 서신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지 혹은 잘못하면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사도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서신은 그 길이가 일반 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짧은데 그런 서신 한편 내에서 수신자, 저작 의도, 주제, 강조점 등이 바뀔 리는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문제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는 말씀입니다. 이 한 절만 보면 행위구원을 강조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보건대”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근거로 강조 하건대”라는 뜻입니다.
일상적으로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한 것입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예수 십자가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을 자기 구주로 영접한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해주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구원을 뜻합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칭의의 구원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행위도 반드시 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로 보건대”라는 말로 사도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잘 살피면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도 따라야 구원을 얻는다.”는 즉, 성화를 강조하려는 자신의 취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가 앞에서 설명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2:14) 행함이 없으면 능히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행위가 따르지 못하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곧바로 예로든 행함이 없는 믿음을 따져 보십시오. 형제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데 말로만 평안히 가고 배를 불리도록 노력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아무 이익도 없다고 합니다. 반드시 몸에 쓸 것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5,16절) 실제로 도와주지 않으면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아예 그런 관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2:14에서 믿음이 있다고 “말해 놓고” 그 믿은 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거짓이고 사실은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죽은 믿음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믿음이라는 뜻이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2:18) 동일한 맥락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지금 “행함이 있는 믿음”을 “행함이 없는 믿음”과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구원이 없는 반면에, 행함이 없이 믿음만 있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점을 대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20절) 그 대신에 행함이 따르는 믿음의 표본으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들고 있습니다. 결국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은 (구원을 얻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는 2장의 결론을 보십시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영혼 없는 몸과 비교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으려면 영혼과 몸 둘 다 있어야 합니다. 둘 중 하나가, 특별히 영혼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행함이 같이 있어야 살아있지 말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요컨대 야고보의 뜻은 믿음과 행함은 실과 바늘처럼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아예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단순히 도덕군자로 자신의 의만 높이는 치장 자랑 교만일 뿐이며 구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반면에 참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반드시 함께 따르기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한 것입니다.
목사가 더 큰 심판을 받는다면?
이런 결론 후에 전혀 엉뚱한 내용의 본문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 요즘으로 치면 목사가 더 큰 심판을 받으니까 목사가 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칫 목사조차 온전하지 못해 구원이 취소된다면 일반 신자는 더 그럴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또한 전체 문맥에서의 뜻을 잘 살펴야 합니다. 먼저 당시 많은 이들이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말리고 있습니다. 자칫 더 큰 심판을 받기 때문인데 그 이유를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왜 선생으로써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지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말은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너무나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2-6절)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자가 되지만(2절), 정반대로 말은 또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는데 그 불이 지옥 불에서 난다”고 합니다.(6절) 둘째는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진 말을 통제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몸도 굴레를 씌울 수 있으나(2절)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8절)
이런 설명으로 그치면 말을 잘못 통제함으로써 심판에 떨어진다고, 말하자면 목사도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심판받는다는 뜻으로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와는 정반대 의미의 말씀을 덧붙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3:9-12)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만, 감람나무는 감람만, 포도나무는 포도만 열매 맺지 다른 열매는 맺을 수 없는 이치와 같이 말입니다. 그럼 선생이라면 반드시 한 입으로 찬송 하나만 내어야지 만약 저주가 나오면 이미 선생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앞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선생도 반드시 그 가르침의 열매로는 찬송만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선생의 입에서 저주가 있으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듯이 이미 죽은 선생, 선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그 뜻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13,14절)
야고보서 전체에 일관되게 강조하는 맥락대로 행함으로 지혜의 온유함을 보이라고 합니다. 선생이라면 “위로부터 난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의 선한 열매를 맺는 참 지혜”(17절)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열매를 보면 그 믿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반면에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진리를 거스려 거짓을 말하게 되는데 그것들은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이라고 정죄합니다.(14,15절) 결국 선생을 하나님께 속한 자와 사탄에 속한 자 둘로 나누었습니다.
질문하신 구절의 뜻이 이제 더 분명해졌습니다. 첫째 야고보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대로 선생은 “화평케 하는 자로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3:18, 선생에 관한 3장의 결론)는 것입니다. 선생의 책임이 그 만큼 막중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제대로 행하지 않으면 즉, “마귀로부터 오는 정욕적 세상적 지혜로 가르쳐서 교회에 독한 시기와 다툼과 거짓을 만연하게 하는”(14,15절) 선생은 큰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죄를 범하면 구원이 취소되고 큰 심판을 받으니 목사가 될 꿈을 꾸지 말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성경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저자의 저작 의도와 강조하려는 책 전체의 주제에 맞추어 앞뒤 문맥 안에서의 뜻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7/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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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집니다.(To be continued)